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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기도(Centering Prayer)

기도자료 관조............... 조회 수 2116 추천 수 0 2009.02.21 21: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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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기도(Centering Prayer) - 마음의 기도

John Jay Hughes 글

능동적인 추론적 묵상과는 달리 구심기도는 수동적이다. 선택된 묵상자료에 우리의 생각, 상상력,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집중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구심기도는 하느님 앞에 침묵 중에 기다리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이 활동이 어떠한가는 구심기도의 다음 세 가지 규칙 안에 잘 묘사되어 있다:

1.우리는 일 분 내지 이 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음으로서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거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로 나아간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정신으로 "주의 기도"나 다른 어떤 기도를 바침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마친다.
2.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에 대해서 인식한 후, 우리는 우리의 응답을 표현하는 하나의 짧고 단순한 기도-말을 속으로 반복한다.
3.기도 중에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도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의 기도에로 조용히 되돌아간다.

그 기도-말은 이 방법의 핵심 부분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도록 우리 마음을 비우게 해준다. 그 기도-말은 우리가 내적인 침묵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 침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기다린다. 그것은 예수, 하느님, 사랑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말마디와 같이 하나의 단순한 단어이어야 한다. 그것은 생각이나 상상을 쉽게 흐트러트리는 단어여서는 안 된다.

구심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만일 묵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숙고하는 것과 같다면, 구심기도는 친한 친구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서로를 마음으로 알고 또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는 말이 필요 없다. 말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그 두 사람은 침묵 중에 서로의 우정을 나누면서 함께 있는 것에 행복해 한다.

구심기도는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짧고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그 이유는 14세기 영국 작품 '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작가에 의해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을 잘 사랑할 수 있지만, 사유할 수는 없다. 그분은 결코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붙잡혀지고 소유되실 수 있다."

자기-부정

구심기도의 가장 큰 장점들 중 하나는 그것의 단순성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복잡화된 것들을 습득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성취감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좋아한다. 구심기도는 너무 단순해서 자축(自祝)을 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 9,23). 구심기도는 다음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기-부정에 대한 요구를 성취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하고자 원하는 어떠한 놀라운 일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 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생각들이 아무리 유용하거나 아름답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들 역시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지 우리가 마음을 비우게 되는 정도로만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실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시간이다. 추론적인 묵상 후, 우리는 그것이 잘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도움이 되는 많은 생각들을 하였는지의 여부를 안다. 구심기도는 그러한 평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결과를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결과는 훌륭하다. 만일 우리가 너무 산란해져서 기도-말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훌륭하다.

구심기도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기도시간 외의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과 사랑, 그리고 내적 평화를 심화시킨다. 그것은 관대해지고 죄를 피하는 것을 더 쉽게 해준다. 그러나 구심기도의 이러한 결실들은 단지 우리가 얻고자 하지 않고 주려고 하는 한에서만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셨다. "주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받을 것입니다. 좋은 되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한 되를 여러분의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입니다"(루가 6,38). 예수께서는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더욱더 적용된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

묵상 중에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심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낭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침묵과 사랑 중에 그분을 기다림으로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스런 하느님의 자녀임을 보여준다. 구심기도의 가장 뛰어난 현대의 스승들 중 하나인 배절 페닝턴(Basil Pennington) 신부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그의 장난감과 친구들을 떠나 자기에게로 달려와 자신의 팔에 메달릴때 기뻐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주위를 둘러보는지, 하나의 사물에서 또다른 사물로 주의를 집중시키는지, 또한 그가 자기 아버지께 몰두하는지 또는 잠을 자기 위해 안정되어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 관심, 안정에 대한 확신으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고자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의 그러한 휴식은 그렇듯 많은 사람들을 무능케 하는 부정적인 자아상(自我像)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치료제이다. 우리 자신이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할지라도, 구심기도 중에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구심기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가 적합하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에 있어 유일한 관심사가 '최소한의 의무'를 채우는 데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들의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율법의 종교이다. 그들은 구심기도의 기초인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성서독서, 충실한 성사생활, 추론적인 묵상, 그리고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보다 더 관대해 지고자 하는 노력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됨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구심기도는 또한 다른 형태의 기도들 예컨대, 묵주신공, 추론적인 묵상, 은사적 기도, 또는 교회에 의해서 공인된 어떤 다른 종류의 기도들로 위안을 얻는 사람들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모든 이를 위해 유효한 하나의 기본 규칙이 있다: 당신이 할 수 있을 때 기도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없을 때 기도하지 마시오.

모든 시대에 가톨릭의 위대한 기도의 스승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즉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를 심화시키고자 진지하게 갈망하는 사람들(달리 말하자면, 율법의 종교에서 사랑의 종교에로 나아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추론적인 묵상을 실천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관상에로 불리고 있다. 구심기도는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나의 단순한 방법이다.

초심자를 위한 규칙

 우리가 구심기도를 시작할 때,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즉 몸의 자세와 규칙성이다. 구심기도를 위해 정해진 자세는 없지만, 긴장과 과로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척추를 곧게 세우고 앉는 것이 가장 좋다.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흉식호흡이 아닌 단전호흡을 해야 한다. 등과 허벅지, 그리고 무릎을 잘 지탱해 주는 견고한 의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좋다.

규칙성은 기도의 규칙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한다면 우리는 별로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하고자 노력할 때 시련이 온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도 규칙을 세우는데 있어 너무 많이 시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10분, 일주일에 5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7일의 분량을 일주일에 두 번에 시도하여 우리가 너무 많이 시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

모든 위대한 일에서와 같이 영적인 일들에서 우리는 천천히 시작할 만큼 충분히 인내롭고 겸손해야 한다. 스위스의 전문 등반 안내자들은 언제나 초보 등반인들을 가려낼 수 있다. 초보자들은 너무 빨리 시작한다. 경험 있는 산악인들은 매우 천천히 등반하지만, 피로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다. 따라서 기도의 규칙을 세우는데 있어 우리가 쉽게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확실한 규칙을 세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러 달 동안 매우 적당한 목표를 위해 충실히 노력한 후 그것을 늘이는 것을 고려해도 좋다. 처음에는 쉬운 것처럼 보이던 것이 오랜 시름 끝에 종종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실함은 큰 것이다.

몸의 자세와 규칙성에 대한 이러한 의견들은 단지 지침(指針)일 뿐이다. 이 지침은 각 개인에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기도 중에 각자가 체험한 영적인 지침은 하나의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을 그러한 지침에로 이끌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 만일 당신이 신앙과 인내심을 갖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에 대해 보다 깊은 독서를 위한 제시들이 뒤에 주어져 있다.

당신이 영적 여정에 착수하거나 또는 당신이 이미 시작한 여정을 계속할 때, 당신은 어려움과 실패를 예상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들을 인내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 나리라.
날개쳐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사 40,28-31

출처/ http://blog.daum.net/chiram/14421116

구심기도 (책)

하루는 아기 물고기가 엄마 물고기에게 물었다.
"엄마, 바다가 뭐예요? 어디서 듣긴 많이 들었는데..."
엄마가 대답했다.
"어리석기는! 그건 바로 네 주위에,
그리고 네 안에 있단다.
물가에서 파닥거리다가 거기 잠시 누워 있다 보면
절로 알게 되겠지."

어느 날 아기 곰이 엄마 곰에게 물었다.
"엄마, 공기가 뭐예요? 어디서 듣긴 많이 들었는데..."
엄마 곰이 말했다.
"어리석기는! 그건 네 주위에,
그리고 네 안에 있단다.
그저 잠시 물통에 머리를 담가 보아라.
그럼 절로 알게 되겠지."

영성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초심자가 있었다.
그가 하루는 영적 지도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대체 누구죠?
어디서 듣긴 많이 들었는데..."
영적 지도자는, 물론,
"어리석기는! 그건 바로 네 주위에,
그리고 네 안에 있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실재를 발견하고 체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구심 기도는 이를 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출처/ 구심 기도 : 바실 페닝튼 중에서

구심기도에 대한 소고    - 조병갑 리드비나

이번 한국 베네딕토회원들의 모임을 위한 주제 강의로 '구심기도'라는 제목을 정해 놓았지만,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동안 씨름하며 읽어 본 몇 권의 책에서 겨우 짜집기를 해보았다. 서투르고 어색한 곳도 많겠지만 성령께서 활동하시어 모든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를 바란다. 또 한편,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레시오 디비나를 이미 수십 년씩 실천하시며 맛들이신 선배님들이니까 다 걸러서 들으시리라 믿는다.

저는 5개월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구심기도를 위한 연수와 피정을 하면서, 구심 기도를 배우고자 열망하고 실천하며 삶의 활기와 기쁨을 느끼는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특히 평신도들을 보고는 놀아움이 컸다. 또 구심 기도를 설명할 때 크리스챤 최초의 영성의 발상지로서의 렉시오 디비나와 연관을 짓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뻤고, 은근히 이런 기도의 전통을 지닌 베네딕도회 수도자임에 자부심도 느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우리의 영성인 렉시오 디비나를 제대로 충실히 살고 있지 못했던 것도 절감하여 부끄럽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 동안 렉시오를 안다고 했어도 무언가 석연치 않고,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늘 있었음을 돌이켜 보며 구심기도를 통해서 렉시오 디비나의 본연의 의미를 찾고, 그 충만함을 누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오래 전에 3개월가량 베네딕도회 관상 수녀원에서 살 때에 만난 수녀님 한 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당시 70세에 가까웠는데 영적 독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더 이상 아무 책도 읽지 않고 다만 요한 복음 13~17장을 마음에 지니고 산다고 대답하셨다. 도서실에 들어서면 늘 "신간"에 맨 먼저 눈길이 쏠리곤 하는 나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언제나 한결같고, 맑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분의 모습, 깊은 기도에 잠긴 모습은 내 마음에 지을 수 없는 인상을 새겨 주었다.

관상기도. 이는 참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추구해 왔고, 이리저리 쫒아다니게 한 내심이 목마름이었다. 구심기도를 접하면서 이론적인 정리를 하니까 조금은 명료한 길이 보이는 것 같아서 기쁘다. 문제는 다만 이를 충실히,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실행하는 것이다. 관상의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으 "오로지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고 했으며 토마스 머튼은 "타인을 위한 연민을 길러 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상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관상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망이 삶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리 놓은 관상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1고린 13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나누는 뜻에서 오늘 다음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 구심기도의 기원을 간단히 보고, 그 다음 관상에 대해서 잠깐 살펴본 다음 렉시오 디비나와 구심기도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심기도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구심기도의 기원

구심기도라는 말은 현대의 영성 신학자, 토마스 머튼의 "중심으로 돌아 가자"는 말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구심기도가 현대에 생긴 것은 아니다. 이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시편기도, 렉시오 디비나, 예수기도, 14세기의<무지의 구름>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전통 안에서 계속 전해 내려 왔던 것이다.

 구심기도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관상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교리서에서 찾아보면 "관상이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침묵 속의 사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진정으로 일치하여 우리도 그분의 신비를 나누어 갖게 하는 기도의 단순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상기도란 생각이나 느낌, 의식이나 상상을 초월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하느님을 기다리는 행위로 부터 기도의 원천으로서 성령의 선물들이 점점 더 우세해지는 것이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관상은 성서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서 얻어지는 열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느님 안에 쉬는 것"이라고 그 전통을 요약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교 개혁 이후부터 계몽주의, 이성주의 등이 대두대면서 신비적인 기도를 배척하고 경계하기까지 되어, 교회 내에 관상의 전통은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고, 따라서 관상 기도는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복음과 창립자의 정신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수도생활을 재점검하고 쇄신하라는 교회의 요청으로 과거의 영성 대가들-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로써 교회 내의 그 동안 맥이 끊어졌던 관상의 풍요로운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 명상의 방법을 찾아 동양 종교에 매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이 가톨릭이었다. 그들은 더 깊은 차원의 기도 생활-하느님과의 일치, 관상기도-을 목말라 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1970년대에 미국의 마사츄체츠주의 스펜서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의 아빠스인 토마스 키팅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이미 교회 내에 있는 관상적인 전통을 현대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제시해 주어야 할 책임감-소명감-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윌리엄 메닝거 신부는 '무지의 구름'을 이용하여 '구름의 기도'라는 기도법을 고안해서 사제들을 가르쳤는데 상당히 좋은 호응을 받았다. 그 후 베이실 페닝톤이 남녀 수도자 장상들에게 피정을 주었으며, 이 피정 중에 토마스 머튼의 글에서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용어를 접하게 된 그들은 스스로의 이 기도방법을 <구심기도>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시작된 구심기도는 그 동안 많은 호응을 받아 특별히 평신도를 사이에 활발히 움직였으며 드디어 1984년에는 뉴저지에 관상기도 지원단이 창립되었고 1987년에는 콜로라도 덴버 교구청 내에 키팅 신부를 중심으로 관상생활 센터가 발족하게 되어 각종 피정과 세미나를 주최하면서 이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구심기도는 관상기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형대인이 접할 수 있는 방법과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열매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미국 전역 뿐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필리핀 등에 지원소가 있으며 현재 36,000명이 구심기도이 정규적 우편물(소식지, 피정 안내서 등)을 받아 보는 것으로 등록되어 있다.

2. 관상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목적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으며 현대의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 역시 "신학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 길을 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즉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우리도 아버지가 하나가 되고,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라고 부르신다(요한 17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관상은 우리의 사고, 의식,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또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말로 다 할 수없는 깊은 탄식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리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신다. 그리고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관상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지만, 우리 편에서도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1)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능력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2) 열망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만나 뵙고 싶은 열망,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려 그분 홀로 우리를 주관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3) 침묵

"하느님은 순전한 영적 존재이시니, 영적으로 예배드려야 한다"(요한 4.24).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이다. 그 어떤 언어도 다만 잘못된 번역일 뿐"이라고 키팅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로는 그분과 합당한 대화를 할 수 없고 오직 침묵을 통해서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상의 뿌리는 내적 고요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목적이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데 있고, 같은 맥락에서 관상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볼 때 관상기도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가능하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도록 불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일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칼 라너는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신비가가 되는 것이다. 실상 신비가가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비가가 되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3. 그리스도교 기도의 전통: 렉시오 디비나와 구심기도의 관계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려고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은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되새겨서, 하느님을 알고, 이렇게 체험한 하느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리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사람에 잠기는 것, 곧 사랑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 때부터 있어온 자연스러운 기도의 전통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렉시오 디비나가 4단계의 과정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 카르투시오회이 원장이었던 귀고 2세에 의해서이다. 그는 렉시오 디비나를 각각 읽음, 되새김, 기도, 관상의 4단계로 이름 지음으로써 렉시오 디비나의 정점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감미로운 관상으로 분명히 제시했다.

이처럼 렉시오 디비나는 관상으로 나아가게 하고, 관상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기도법으로서 초대 교회 때부터 수세기 동안 행했다. 렉시오 디비나의 자발적이고 단순한 기도 방법 대신에 체계화되고 조직적인 "정신 기도"가 통용되었고, 16세기 말에는 관상은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위험한 것으로까지 간주되었으며, 비범한 은총으로서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관상이란 진지하게 영적 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았던 15세기까지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위배된다.

이어서 17세기에는 정적주의라는 이단이 생겼다. 이는 주님 안에서의 쉼이라는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였으나, 선업을 제한하고 삶의 도덕적인 차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의 현존 안에 쉬는 것에만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17세기의 또 다른 이단은 얀세니즘이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정화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관상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로서, 완덕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을 뿐더러, 생각하는 것조차도 죄스런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근세에 와서 성서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좋은 현상이나 성서를 머리로만 받아들여 지나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어 말씀을 가슴과 영혼으로 받아들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체험하며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쉬는 렉시오 디비나의 4번째 단계인 관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희미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를 실천하는 수도자들마저도 대부분이 렉시오 디비나의 최종 목적인 관상, 즉 하느님과의 일치에는 별로 도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심기도를 렉시오 디비나의 한 부분이라던가 또는 렉시오 디비나의 기도에서 관상으로 옮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수련으로서 렉시오 디비나와 연관지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묵상에서 내적 침묵(관상)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과잉활동: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기도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함.
2. 사고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기도라고 여김.
3. 자아탐구: 자신의 활동이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렇다면 구심기도가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의 본래 목적을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가? 구심기도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기도로서 전 존재를 사랑으로 열어 드리고 맡겨드리려는 지향으로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이다. 마음 속에 사고나 집념이 떠오를 때마다 거룩한 단어-하느님 앞에 있고자 하는 우리의 지향을 드러내느 사랑의 말-를 의식함으로써 거듭 지향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로 우리의 존재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지향을 순수하게 가지는 것이 구심기도 실천의 초점이다. 이는 바로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가기 위해 이전에 지녔던 사고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과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활동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구심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거듭 지향을 새롭게 하다 보면 어느덧 거룩한 단어가 이식으로부터 사라지고 일반적인 평화를 느끼거나 또는 하느님께 사로잡혔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그저 편안하고 고요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의 활동을 떠맡으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섞이게 되며 우리 안에 일종의 행복감이 생기고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확신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성령의 활동이 우리의 활동을 흡수하여 떠맡게 될 때 엄격한 의미의 관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4. 구심기도의 방법

구심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키워나가는 수련이다. 그러므로 구심기도에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지향과 이 지향에 동의하는 의지의 행위가 중요하다. 구심기도의 방법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다른 모든 사고를 떠나보냄으로써 우리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 성실함과 인내로써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심기도의 지침-

1.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주님, 예수, 아버지, 아빠, 마리아, 성령, 평화, 아멘, 사랑 등이다.

<거룩한 단어라고 하는 것은 그 낱말이 지닌 본래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을 표현해 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 낱말은 기억하기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짧을수록 좋다.>
<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했으면 기도 중에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 사람에 따라서 거룩한 단어보다 어떤 이미지를 사용하여 마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하느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갈 수도 있다.>

2.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기도에 들어갈 준비로 성서나 시편의 짤막한 구절을 암송하거나, 간단히 몸을 푸는 운동이나 심호흡을 할 수 있다.

3.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을 표현해 주는 거룩한 단어를 의식 속에 가볍게 떠올리면서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한다.

< 기도 중에 일단 의식과 상상이 사라지면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할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 그 자체가 나를 관상으로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단어로 표현되는 나의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잡념이나 상상을 벗어나면 그냥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 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는 희미해지고, 의지의 충동만이 남다가 아주 사라지기도 한다.>

4. 어떤 생각이나 느낌, 감각-어떤 종류의 인식이든 간에-을 알아 차리게 되면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 간다.

<구심기도의 진보는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는 데에 있지 않고, 사고로부터의 이탈, 사고를 어떻게 다루는 가에 있다. 어떤 사고에 대해서도 저항하거나, 머물거나,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말고, 다만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 간다. 이것이 구심기도에서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활동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 감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최초의 지향을 새롭게 하고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거룩한 단어는 생각을 없애는 신비스런 무기가 아니다. 거룩한 단어를 의식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생각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5. 정한 시간이 다되면 그 상태로 잠시 머무른다. 그 다음 주님의 기도나 적합한 시편을 암송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맺는다.

구심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향'이라고 키팅 신부는 거듭 강조한다. 여기에서 '지향'이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쉬는 것이며,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전 존재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명확한 정신, 깨어 있는 자세, 예리한  현존의식을 유지하려 애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단순히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동의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동의 즉 우리의 가장 깊은 심연을 하느님께 기꺼이 넘겨 드리는 것은 구심기도에서 진정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오,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주님, 당신은 저를 속량하셨기에 당신의 손에 저를 맡기나이다." 이러한 정신들이 이 기도의 신학적인 기반이며, 이것 없이는 이 기도의 실천이 무의미하게 된다. 키팅 신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바로 관상기도의 고전적인 이해임을 거듭 강조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적인 허무를 통해서 사랑을 쏟아 붓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구심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상의 수련이라기 보다.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 맡기는 것이다. 주의 집중이 아니라 지향이며,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구심기도를 실천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키팅 신부의 권고 말씀을 들어 보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십시오. 하느님의 현존을 실천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쉬기를 배우십시오. 하느님 앞에 단순히 머물기를 배우십시오. 하루에 두 번씩 단 10분이라도 말하기와 분석하기를 멈추고 단순히 "중심으로 오십시오." 당신의 인간적인 영이, 당신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되는 그 곳으로.

맺음말

"지금은 우러러도  숨어 계신 예수님
이렇듯 애타하는 소원을 들어 주시어
언젠가 드러나실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환히 보며 복되게 하옵소서"<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우리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진한 그리움이, 그분을 뵈옵고 싶은 끊임없는 갈망이 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말씀대로 님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님의 품에 돌아가기까지 늘상 서성이며 불안해하는 우리들을 주님 친히 가없는 사랑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시어 당신 모습으로 다듬어 주신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과 같은 모상으로 모습이 바뀔 것이니,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모습이 바뀔 것입니다"(2고린 3.18) 얼마나      벅찬 부르심인가! 이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다.

출처/http://cafe.daum.net/chspeace/FZlA/1

구심기도(Centering prayer)

구심기도(향심기도)는 내가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께서 내안에서 활동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시간입니다.
아래에 설명하는 것들은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준비하고
주님께 자신의 마음을 내어 드리는 시간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보잘 것없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
내 안에 있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소리들로부터
잠잠해져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만들어 줍니다.

조용히 방 안에서 촛불을 켜고 매일 10분-20분 정도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 중 단 10분 만이라도 주님을 위해 내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 구심 기도의 방법

우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이나 경당이면 더욱 좋겠지만, 자신의 방에서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방이라면 약간 두꺼운 방석과 작은 초를 하나 준비하세요. 방바닥에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해서 앉거나,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허리를 바로 펴고 코와 턱, 그리고 배(배가 많이 나온 분은 예외 ^^)가 일직선이 되도록 바른 자세를 갖춥니다.
자신에게 있어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른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하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아침이 피곤한 사람은 저녁 시간이라도 좋을 것입니다. 혹은 학생이라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10분 정도 명상에 잠기는 것도 집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밥 먹고 나서 바로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졸립거든요. 식사 전이 가장 적당해 보입니다.
옷은 가급적 몸에 꽉 조이지 않는 옷이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허리띠를 꼭 조이고 있다면 약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준비가 되었으면 성호를 긋고 조용히 명상에 잠깁니다.

1. 하느님의 영께서 이 시간 자신과 함께 하도록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주님 저희의 모든 것 당신께 맡겨 드립니다.
이 시간 저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소서.
나약한 저희 가운데 오시어
저희가 당신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호흡에 맞춰 일정한 만트라를 되뇌며 듣는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호흡(뒤 이어 호흡에 대해 설명함)에 맞추어 선정한 만트라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재미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한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리고 마음을 모으기가 실재로는 힘든 하나의 수행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시간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도록 '내어 드림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구심기도의 핵심은 만트라, 호흡, 되뇌임의 반복, 들음 등이다. 이것들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만트라의 선정

만트라는 짧은 성구를 말합니다. 계속하여 되뇔 수 있는 짧은 기도문들은 모두 만트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묵주기도 때 성모송, 예수의 기도, 시편의 짧은 성구들 등은 모두 만트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트라의 사용은 여러 고등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신(信), 망(望), 애(愛)의 대신덕으로 충만된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만트라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트라는 단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의 고요에 이르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의식적으로 만트라를 부단히 되뇌며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와 하느님의 현존에 이르게 됩니다. 구심기도만 할 경우에는 자신이 선정한 고유한 만트라(예를 들면 ‘마라나타’(μαρ?ν?θ? 오소서 주 예수여), ‘아빠’, ‘사랑’, ‘아버지’, ‘하느님’, ‘예수’ 등등)를 바꾸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아버지”라는 만트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란 단어는 저에게 평안함, 자유로움, 고향, 인자함 등을 가져다 줍니다.

2) 호흡

호흡이 불안하면 마음도 불안하여 흔들립니다. [호흡은 기도]라는 말도 있듯이 호흡을 통해 하느님이 계신 우리 존재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호흡을 통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되어 있는 인간 존재의 허약함과 가난을 깨닫게 되며, 호흡에 맞추어 만트라를 반복하는 중에 그대로 마음의 기도에 이르게 됩니다. 만트라를 호흡에 맞추어 고요히 반복하십시오.
"아버지"를 만트라로 선정했다면, 숨을 천천히 들이쉬면서 "아버", 내쉬면서 "지" 다시 들이쉬면서 "아버"를, 내쉬면서 “지”를 계속 반복하면 됩니다. 숨을 내 쉬면서는 내 안에 온갖 찌꺼기를 모두 내 뱉는다는 마음으로, 숨을 들이 쉴 때는 온갖 하늘스런 기운들을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맘으로 하면 좋습니다.

이때 복식호흡을 권하고 싶습니다. 들이쉴 때 아랫배가 나오고 내쉴 때 아랫배가 들어갑니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려고 하지 말고 평상시대로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이에 맞추어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처음에는 호흡에 마음이 많이 가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호흡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조용히 머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나”를 잊고 온전히 ‘무아’의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3) 들음

듣기를 어려워하고 침묵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구심기도는 일종의 침묵과 들음의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만트라를 되뇌면서 듣다 보면 저절로 침묵이 따라오고 심신의 긴장도 풀립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만트라를 되뇌며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인 것입니다.

4) 분심과 잡념

이 기도 중에 많은 이들이 어려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심”입니다. 분심에 대해서는 제가 앞으로 따로 한 장을 마련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심기도 중에 생각이나 상상이 떠오르더라도 즉시 원위치로 돌아가서 만트라를 듣는 것을 계속합니다. 생각이나 상상, 분석, 추리, 체험에 집착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구심기도 중 숱한 분심과 상상은 일상생활 그대로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마음을 모으는 것은 지금 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자신을 찾게 해주기도 합니다.
구심기도는 무엇을 얻거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고 기다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구심기도는 자신의 중심에 있는 하느님 찾는 기도이기에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비움의 기도'이며, 머리의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기도' 입니다.

5) 자세

초심자에게는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계속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불편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자세를 찾아 나가도록 하며, 한번 취한 자세는 가능한 바꾸지 앉는 것이 좋습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흐트러집니다. 극기와 절제가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될 있을 것입니다.

3. 일정한 시간이 되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마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주님의 기도나 영광송, 혹은 짧은 청원기도나 감사기도로 구심기도를 마친다.

[구심기도의 열매는 사랑]
구심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느님과의 현존은 내가 성당이나 방에 촛불을 켜 놓고 있을 때만이 아니다.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따라서 그분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보다 더 확장된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되고,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랑의 삶을 살게 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그 자체가 천국이 아닌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가 기쁨과 행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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