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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마5: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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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
"웃기시는 예수: 해학과 저항정신"
성서 본문: 마태복음서 5:38-42
예수 말씀에는 진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말뜻은 청중을 놀라게 하고, 경탄케 합니다. 때로는 익살스러움도 있되 그 속에는 날카로운 뒤집어엎음의 과격성도 있습니다. 대체로 약자와 피해자들에게는 당당함과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강자와 가해자에게는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안겨다 줍니다. 예수의 비유말씀이나 경구(警句)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속에 놀라운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지혜로 인해 청중은 키득키득 웃기도 했을 것이며, 때로는 은밀하게 미소짓기도 했을 것이며, 스스로 유식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의 말씀이 졸음이 올 정도로 싱겁거나 무미건조한 것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 유명한 산 위의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면 퍽 흥미롭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찌든 생활을 했던 밑바닥 인생들은 예수의 주옥같은 말씀에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며, 그들은 위로 받아 기뻐했으며,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군중 속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섞여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얼굴은 긴장되었거나 굳어졌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대체로 예수님의 경구(aphorism)는 부당했던 당시의 관행과 전통을 뒤집어 엎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금언이나 경구가 단도직입식으로 기존질서를 엎어버리는 거친 표현으로 꾸며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되씹을수록, 말씀의 급진성, 정직성, 날카로움이 은근히 우러나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은근히 급진적이라는 뜻은 익살스러움을 지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은근히 청중들을 웃기면서 기득권층이 누렸던 관행의 어두운 모습과 모순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예수는 대단한 익살꾼(humorist)이면서도 이데오로기 비판자였다 하겠습니다. 청중을 즐겁게 해주면서 날카롭게 당시 지배이념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갖는 이러한 익살성, 급진성, 당혹성을 온 몸으로 느끼지 못 할까요? 왜 우리들은 그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놀라운 지혜의 향기를 맡을 수 없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기독교 교리와 신조, 교회의 전통이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 담고 있는 폭발적인 감동의 힘을 억눌러 왔다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삶(고난과 죽음을 포함한)을 온통 구속사적 시각에서 조명하게 되면, 로마 지배층, 토착 지배세력, 당시의 정치·종교적 제도 관행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무시하게 됩니다. 선의의 무시라고 하더라도, 이같은 교리적 관점에서만 예수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예수 말씀이 지닌 놀라운 지혜를 놓치게 하지요. 아담의 원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거대한 하나님의 뜻만이 부각되기에, 그 뜻에 합당한 예수의 모습만이 또한 강조되기 마련입니다.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이 구원사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강조되기 마련이지요. 거의 모든 찬송가의 내용도 구세주 그리스도의 찬양으로 일관되어 있지요. 그래서 익살꾼 예수의 모습은 교인들의 상상 밖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교회 틀 안에서는 증발되고 말았지요. 지도층의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예수의 모습 또한 희미하게 나타나게 되지요. 패러디 작가 같은 모습은 아예 무시되고 말지요.
이같은 결과에 대해 사도 바울도 책임 없다 할 수 없겠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 또는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에게는 부활의 예수의 능력 곧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중한 체험을 매순간 하면서도, 역사적 예수를 우리 삶 속에서 매순간 만날 수 있어야 더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 그의 놀라운 통찰력, 그의 감동적인 혜안, 그의 날카로운 해학을 실존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래서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더욱이 최근 유일 초강대국의 호전적 정책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이 때, 특히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나아가고 있어 한반도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는 듯 한 이 위기 상황에서, 예수따르미들이 전쟁을 불사하는 제도폭력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육신으로 살고 계신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시고 어떤 결단과 선택을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놓고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교리의 눈으로는 이러한 심각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눈으로 이 본질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그의 번뜩이는 혜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산 위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경구의 말씀입니다. 세 가지 경구에서 우리는 오늘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지혜, 곧 그 패러디의 지혜를 얻어, 오늘의 상황에서 올곧게 판단하고 올곧은 선택을 해야하겠습니다.
1.〈오른 뺨 치면, 왼 뺨을 돌려라〉
먼저〈오른 뺨 치면, 왼 뺨을 돌려라〉를 숙고해 보기로 하지요. 이 경구야말로 교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 해석해왔습니다. 폭력의 피해자로 하여금, 더 큰 폭력에 순응하도록 교회가 가르쳐 왔습니다. 폭력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가르쳐준 셈입니다. 비굴하더라도 폭력 앞에 순응하는 것이 교인다운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예수의 진의가 그러한 것일까요? 이 경구를 통해 예수께서 선포하시려했던 메시지를 올곧게 깨닫기 위해 예수 당시〈뺨치기〉에 대한 관행적 인식을 잠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왼손 사용은 점잖지 못한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들끼리 싸울 때 왼손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는 왼손 사용하는 경우 열흘 간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참회를 해야했습니다. 오른 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경우에도 손등으로 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일정한 사회·정치적 뜻을 지녔습니다.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낮은 자의 분수를 깨달아 예절 바르게 행동하도록 깨우치려할 때 오른손 등으로 낮은 자의 오른 뺨을 때렸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인이 유태인에게, 주인이 종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까불지 말고 절도 있게 행동하면서 분수 있게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권장할 때 오른 손등으로 때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멸감을 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약자로 하여금 비굴하게 처신하게 하려는 강자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당시 상황의 빛 아래서 보면, 예수의 이 경구가 갖는 의미는 매우 뚜렷해집니다.〈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라〉가 갖는 의미는 명료해집니다. 왼뺨을 돌려, 상대방으로부터 당당히 맞음으로써, "나는 당신의 부하나 똘마니가 아니요" 라고 외치는 당당한 주격선언입니다. 그리고 비폭력 적극 저항 선언이기도 합니다. 더 아프지만 의젓하게 맞음으로써,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요" 라는 인간선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용기 있는 비폭력 저항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사회에서는 이 같은 저항 선언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열등감에 사로잡힌 강자일수록 약자의 당당한 비폭력 저항을 더 추악한 폭력으로 대응하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1957년 전방 군대있을 때 겪은 경험을 말씀드리지요. 일요일에 사단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일선 소대로 돌아왔습니다. 분대장이 화를 내면서 저를 포함해 네 사람의 졸병을 불러 세웠습니다. 곡괭이 자루로 구타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잘못은 일요일에 소대에서 할 일 많은데 한가하게 사단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1월말이라 일선은 시베리아처럼 추웠습니다. 제가 제일 끝에 서 있었는데 분대장이 순서에 따라 곡괭이 자루를 내리치니까 내 옆의 졸병이 자지러지게 소리 지르며 아파했습니다. '퍽퍽' 때리는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잔뜩 긴장했습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저는 어금니를 단단히 물고 눈을 지긋이 감았습니다. 내 어깨 위로 몽둥이가 떨어졌습니다. '퍽' 했는데, 생각보다 덜 아팠지요. 그래서 눈을 뜨고 나도 모르게 지긋이 웃었습니다. 저는 은근히 미소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분대장은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세 놈은 돌아가, 한 이병 이 새끼 웃어, 비웃어? 어디 진짜 단단히 맞아 봐라." 저는 다른 사병보다 몇 배로 더 맞게 되었고, 영하 20도 가까운 추운 겨울밤 팬티 하나만 걸치고 엎드려 뻗쳐를 오백번 해야 했습니다. 겨울 찬바람이 나의 나신에 맞닿을 때 수백 개의 작은 바늘이 한꺼번에 꽂히는 듯 했습니다. 저의 당당함이 가해자에게 특히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해자로 하여금 더 추악한 폭력을 가하게 했습니다.
이런 아픈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당신의 삶 자체가〈왼뺨 돌리기〉의 삶이었으니까요. 당신의 경구가 종교지도자들을 당혹시켰으니 고난의 길로 걸어가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의 가시밭길 삶을 구태여 저 거창한 구원사(구원의 역사)의 관점에서 교조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 외롭고 괴로웠던 예수 삶은 오늘 우리에게 가치 있는 메시지로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 처형이야말로〈왼뺨 돌리기〉의 감동적인 본보기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특히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가해자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던 예수의 그 너그러움은〈왼뺨 돌리기〉의 극치였습니다. 만일 예수가 그때 그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면 가해자들은 코웃음치거나 비웃었을 것입니다. 허나 예수의 '뜻밖의' 관용에 대해 그들은 당황과 수치심을 두고두고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왼뺨 돌리기〉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경구를 말씀하였을 때 청중의 반응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만일 예수님께서 누가 너희들의 오른 뺨을 오른손 등으로 치면 고개를 숙여 '순종하라' 또는 '잘못했습니다' 라고 빌어라 또는 '달아나라' 라고 하셨다면 청중들이 놀라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웃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순종의 몸짓은 관례에 따른 예측된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일 뿐 거기에 흥분할 일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왼뺨을 돌려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강자의 오른 손바닥으로 당당히 맞으라는 명령입니다. 오른손 등으로 맞아 생기는 경멸의 아픔은 오른 손바닥으로 맞는 아픔보다 정신적으로 더 아프지요. 육체적으로 더 아프게 맞되 당당한 모습 의젓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폭력 저항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아프게 맞으면서도 평화스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맞는 적극적 자세를 견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죽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진의를 알아차린 약자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감동의 미소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자 가해자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을 것입니다. 강자들의 당황을 곁눈질로 확인한 밑바닥 인생들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당혹의 수준을 넘어 수치감마저 강자들이 느꼈다면 그리고 그 표정을 약자들이 간파했다면, 속으로 더욱 고소하다고 느끼게 되어 박수를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들어도 2천년 전의 그 통쾌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도기독교의 눈으로는 그 통쾌함을 볼 수도 없고 제도교회의 귀로는 그 통쾌함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없게 된 것 같군요. 주님께서〈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귓속에는 교리와 전통의 소리차단장치가 너무 오래 동안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멋대로 치려해도 약소국이 비굴하게 순종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아멘〉으로 강대국을 축복해주는 것이 아닌지요.
2.〈속옷 달라면 겉옷마저 주라〉
이 경구의 해학성을 알려면 여기서도 당시 사회관습을 먼저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때는 누구든지 두벌 옷을 입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졌습니다(two-garment society). 즉 누구나 속옷과 겉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당시 재력 있는 사람이 돈을 꾸거나 상거래를 할 때 대체로 담보물로 토지 아니면 가축(양, 염소)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작농이나 농노 같은 무산자가 내놓을 담보물은 겉옷이었습니다. 당시 관행은 유대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왔습니다. 신명기 24장(10-14절)에 보면 겉옷을 담보물로 내놓아 추운 밤에 떨며 지나야 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겉옷과 속옷을 바꿔놓았습니다. 채권자가 담보물로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벗어 주라고 했습니다. 겉옷은 외부 일기에 따라 다소 융통성 있게 활용하는 것인데 반해, 속옷은 항상 입어야 할 더 긴요한 옷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채권자는 좀 더 악질적인 인간인 것 같습니다. 담보물로 처음부터 속옷을 요구했으니까요. 이런 딱한 경우에도 예수께서는 겉옷까지 홀랑 벗어주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벌거벗으라는 말 아닙니까! 채권자 앞에 겉옷이든 속옷이든 하나는 걸쳐야 하는데 그것마저 벗어주라는 것은 완전히 裸身이 되라는 명령이지요. 도대체 이 같은 황당스러운 가르침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가혹한 명령이 아닙니까?
당시 관습에 따르면 裸身(벌거벗은 몸)은 사회적 금기(taboo)였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미치지 않고 다중 앞에 벌거벗는 것은 수치이지요. 그것은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벌거벗는 사람 자신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남을 벌거벗기는 사람은 더 큰 수치심을 느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몸의 일부를 일부러 드러내는 것은 저항과 결단의 뜻과 이어져 있습니다. 삭발은 머리 부분만 벌거벗기는 일인데 이것은 수치이면서도 저항 또는 비상한 결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혹하고 비정(非情)한 채권자 앞에 속옷, 겉옷을 스스로 다 벗어 던지는 채무자는 대단한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채권자의 비인간적 탐욕을 적나라(赤裸裸)하게 폭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단한 저항의 몸짓이라 하겠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채무자 여러분. 너무 가난해 빚을 갚지 못하여 속옷까지 벗어 달라는 채권자의 등살에 고생하는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속옷이고 겉옷이고 채권자에게 다 홀랑 벗어 주시지요. 까짓 것 빨가벗은 몸으로 당당히 사시지요..."
이렇게 말씀했을 때 가난한 청중들은 자기들 주변에 있는 부자들을 힐끗 쳐다보며 킥킥 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무자를 이렇게 웃기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同苦하시면서 그들에게 부자 채권자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당시 수탈적 경제제도에 대한 예수님의 해학적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해학적이었기에 더욱 철저한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경구를 듣고 읽으면서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할까요?
3.〈오리 가자면 십리를 가라〉
이 경구에도 예수님의 '오기' 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막강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한 군대였습니다. 로마체제는 또한 법질서가 막강했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로마도로를 따라 행군했습니다. 로마도로에는 거리의 이정표가 뚜렷했습니다. 군인들의 배낭과 등짐은 무겁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의 등짐 지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필요할 때 민간인들을 징발했습니다. 군법에 따르면 민간인에게 등짐지게 할 때는 반드시 1마일(오리로 번역)을 넘겨서는 안됩니다. 1마일 이상 민간인으로 하여금 등짐 지게 하면 군법을 어기게 됩니다. 당시 로마군의 백부장이 이 법을 주로 집행했습니다.
예수님의 경구를 이 같은 당시 법 상황아래서 조명해보면 예수님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곧 깨닫게 됩니다. 식민 지배국의 군대가 피식민지 민간인에게 등짐 지울 때 오리만 가지말고 십리를 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백하게 범법(犯法)을 명하신 것입니다. 신성한 로마 군법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중대장은 그의 상관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 군 계급이 높을수록 토착 민간인들의 원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한 미군 사병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범죄는 미군 계급이 높을수록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군장성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反로마 저항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를 극형에 처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경구는 십리를 감으로써 로마 군법의 부당성을 폭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리 가자 할 때 제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그것에 순응하되 오히려 십리까지 더 가줌으로써 로마 체제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 제도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 그것이 예수따르미의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까짓 것 여러분 십리까지 등짐 지고 가시지요..." 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의 속뜻을 알아차린 청중들은 또한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의 제도에 대해 웃으면서 적극 저항하는 자세, 그것이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결코 환상적 유토피아론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폭력으로 제도 폭력을 뒤엎는 테러리스트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더구나 우리 주님은 부당한 제도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무저항주의자가 아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익살로 웃기시되 품위 있게 저항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지혜의 스승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전통과 기독교 교리가 너무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경구와 비유 등)이 갖는 해학적 급진성, 평화적 저항성을 은폐해왔음을 깨닫게됩니다. 우리들의 귀는 그 전통과 교리로 멀어졌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값싼 종교적 축복으로 어두워졌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종교적 규례와 관례에 메어 우둔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 보물처럼 담겨있는 그 익살스러움, 그 날카로움, 그 통쾌함, 그 당혹스러움, 탄성을 발하게 하는 그 감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는 오늘 저희들에게 "귀 있는 자는 제대로 내 말의 뜻을 들어 깨달을 지어다." 라고 외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육성을 직접 듣고 감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간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역사적 실존 인물인 나사렛 예수의 삶과 말씀을 찾아 보려했으나 때로는 허무하게 실패했고 때로는 안타깝게 역사탐구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최근에 와서 역사의 예수를 만나보려는 시도가 더욱 맹렬해지는 듯 합니다. 대체로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서 뜻밖의 놀라운 뒤집음을 시사하거나 강조하는 말씀은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예수 말씀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당시 제도의 틀을 깨는 혁파성(革破性)의 메시지를 지닌 경구나 비유는 대체로 예수의 말씀으로 수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음성을 비록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그가 의도했던 익살스러운 혁파의 메시지는 항상 새롭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와 세계는 전쟁의 소문으로 흉흉합니다. 유일 초강대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이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열정에 힘입어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때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의 위선과 허위성을 밝게 드러내는 예수의 해학적 비판이 바로 우리 예수따르미의 선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한반도에 사는 예수따르미는 예수의 그 놀라운 지혜를 새롭게 깨닫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의 경구에 탄복하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정의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늘도 '왼뺨을 돌려대시고' 오늘도 '겉옷까지 벗어주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십리까지 등짐 지고' 가시는 주님을 뜨겁게 만나야 합니다. 이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평화의 주님!
황량했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힘없는 민초들에게 인격의 존엄과 그 당당함을 깨우쳐주신 우리 예수님!
당신의 그 해학과 풍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허락하소서.
저희들의 귀는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전통으로 멀어졌습니다.
저희들의 눈은 너무나 오랫동안 값싼 종교적 축복으로 희미해졌습니다.
저희들의 머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독교적 관례로 우둔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로마제국의 교만한 횡포 앞에서
왼뺨 돌려댈 용기도 없고
겉옷까지 벗어줄 배짱도 없고 십리까지 걸어갈 힘도 없나이다.
아니, 그것의 중요성을 깨닫지도 못하나이다.
주여!
성령으로 깨달아 힘을 얻어 당신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왼뺨 돌리기'의 그 감동적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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