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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세 단계

마태복음 길희성 형제............... 조회 수 5304 추천 수 0 2003.11.14 16: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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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3:44-46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초월적 세계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세계나 왕국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배와 착취, 피와 눈물이 그치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적 질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질서를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이며 역사의 부조리와 비극이 종식되는 종말적 실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을 초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주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단어 자체도 하나의 메타포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인간 왕처럼 영토를 가지고 무슨 나라를 통치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우리에게 친근한 주위 사물들을 빌려서 비유로써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도 가깝고 친근하고 절박하고 리얼했지만,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가르치신다고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십니다(마태 13:13). 우리도 물론 그런 무리에 속합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보는 눈이 있는 자에게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만이 접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초월적 세계, 영적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 이러한 초월적 세계를 알도록 초대받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지만, 아둔한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며,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만,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 가끔씩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경험하는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져서 우리에게 희망을,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온통 답답한 일들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그런 사건 하나를 접했습니다. 어느 아이가 아파트에서 장난으로 던진 돌에 길을 가던 교사 한 분이 맞아 죽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너무나 미안해서 전세 돈 4000만원을 빼서 교사의 아버지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전직 교사였던 그 아버지는 차마 그 돈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의 장래를 걱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하늘나라는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감동을 사건화 시키는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 새로운 삶의 질서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복음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임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여기에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개란 세상에 묻혀서, 세상에 휘둘림 당하며 살던 지금까지의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며,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이 하나님 나라라는 초월적 실재, 초월적 가치를 빼고서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언행이 보인 과격성과 파격성, 역설과 뒤집기의 논리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온전히 사로잡혔던 분이며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온 정열을 쏟으셨던 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하나님의 의와 평화, 사랑과 자유가 실현되는 이 하나님 나라에 미친 존재였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에 의해 미친 존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천국을 세우려는 자는 모두 '미친' 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엄청난 몽상가들이나 하는 짓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진정 예수님이 시작한 천국운동을 하는 자들이라면 세상적 기준으로는 솔직히 말해 다 약간씩 정신이 돈 자들입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되고서 저 친구 돌았다는 세인들의 평판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면, 필경 기독교인 노릇 제대로 한 일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 재미도 보고 천국 재미도 누리려는 얌체 신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마태복음서 13장에는 이 하늘나라의 신비, 초월적 세계를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두 가지 짤막한 비유, 즉 밭에 숨겨 놓은 보화, 좋은 진주의 비유를 함께 음미해보면서 신앙의 본질과 그 여정에 대해서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어떤 사람이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 비밀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물은 보물인데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보물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만이 보도록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숨겨져 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라는 보물의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성격을 가리킵니다.

  또 숨겨져 있다는 말은 발견의 기쁨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보물찾기 놀이를 해 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별것 아니어도 숨겨진 것을 찾는 데는 특별한 기쁨이 있습니다. 진짜 보물은 감추어져 있는 보물입니다. 드러난 보물은 더 이상 보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감추어진 보물만큼의 매력은 없습니다. 남들이 모르기 때문에 더 귀하고 흥분됩니다. 감추어진 보물은 드러나 있는 보물보다 몇 갑절이나 더 큰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감추어져 있는 보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감추어져 있는 보물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도 같다는 비유에서도 역시, '좋은 진주'라는 말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상인의 눈이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보통 상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하려면 단지 행운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선, 보통 때도 항시 구하려는 마음, 찾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관심이 없는 자에게 좋은 진주가 눈에 띨 리 만무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이러한 관심과 찾음입니다. 다시 말해 도를 구하는 구도심입니다. 자신의 전 삶을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만들 어떤 것, 자신의 삶 전체를 값어치 있게 만들 어떤 것을 찾는 마음, 곧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구하고 찾는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존의 것, 이미 드러나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더 이상 무엇을 찾거나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의 여정이 시작될 리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궁극적 목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구원할만한 새로운 것을 애타게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 인생의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결핍된 자는 결코 종교의 세계,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하고 찾는다 해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지 않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 즉 지금까지 나의 삶을 지탱해준 가치들의 연장선상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무언가 다른 것,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구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지금까지 추구하던 가치를 구하는 자는 신앙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욕망 성취를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이 있든 없든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에 무언가 부족을 느끼고 자기 삶에 새로운 전환,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는 모험과 변화의 시도가 신앙의 여정에 필수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해 떠나는 모험, 그것이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의 모험이며,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이렇게 찾으려는 구도의 여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의 기쁨도 있습니다. 만약 발견의 기쁨이 없다면 신앙은 너무나 힘들고 끝내는 무의미합니다. 다행히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발견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보화를 발견하셔서 우리들에게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찾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들어서 아는 것, 즉 남이 일러주어서 아는 것과 자기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들어서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깨달은 예수님보다 깨달음이 미약합니다. 최초 발견자인 예수님의 기쁨이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실감도 덜하고 미약합니다.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반하여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비록 우리의 깨달음이 미약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 지를 예수를 통해 조금이나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의 방황으로 시작되는 신앙의 여정은 발견의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앙은 힘을 잃어버리고 지쳐버립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상기하며 삶의 경험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발견하는 소중한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했다면, 이 천국의 비밀을 발견하는 기쁨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지 못했다면 말짱 헛일일 것입니다. 또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었는데도 찾지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자유와 사랑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닌다는 데, 잘 믿는 사람이라는 데,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삶을 사는 신자들을 얼마든지 주위에서 봅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고집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고 배타성과 독선의 화신이 되어 있는 경우를 너무나 흔히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는 증오를 부추기고, 화해와 용서보다는 대결과 고발을 일삼는 것을, 축복보다는 저주를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는 대신 다른 세상적 가치를 발견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차라리 발견하지 못한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개인적 소망과 이기적 욕심, 세상적 가치를 여전히 값진 진주로 알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고 난 다음 자신의 모든 것, 예전의 모든 자랑들을 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초대받은 자들이며, 그 기쁨과 특권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 하나만을 인생의 낙이요 위로로 삼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가슴에 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발견한 기쁨과 설렘, 그리고 그 긍지 하나로 세상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어 지나쳐버리는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상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세 번째로, 보물을 찾다가 발견한 다음에는 그것을 차지하려는 노력과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보물을 발견만 하고 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투자해야 하며, 그것도 자기가 가진 전 소유를 팔아서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몽땅 사버리는 전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값진 진주 하나를 위해 자기가 가진 나머지 것들을 다 팔아버리는 상인의 전적인 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세째 요소이며 단계입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는 전적인 헌신, 순수한 헌신입니다. 오늘의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적인 헌신, 전적인 투자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가진 것을 다 팔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부분적 관심이 아니라 전적인 관심입니다. 신앙은 또 부차적 관심이 아니라 일차적 관심, 우선적 관심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어대로 신앙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입니다. 다른 모든 가치와 관심사에 우선하는 일차적 관심이며, 다른 모든 부분적 가치들을 통어하며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궁극적 가치입니다. 신앙은 자기 삶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전적인 헌신의 행위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묻는 한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물을 몽땅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칼날 같은 지시를 내려 그 청년을 난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는 일을 부차적 관심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이상으로 더 중요한 가치나 관심은 없다는 말이며, 만약 너의 삶에서 그런 것이 있다면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 재물, 명예, 학식, 권력이든 -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우선하여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 있는 한 결코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값진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 시간, 재능을 다 투자하는 전적인 헌신의 행위이며, 신앙의 참 맛, 참 힘은 여기서 옵니다.

  신앙은 결코 part-time business가 아닙니다. 다른 것들을 다 한 다음에 즐기는 여가 행위는 더욱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에 이런저런 핑계를 먼저 대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누가 9:6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예배 시간에만 다짐하는 헌신의 행위가 아니며, 교회는 결코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좋은 얘기 듣고 가는 사교클럽이나 대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삶의 일차적 목표요 궁극적 관심으로 삼고 목이 타게 갈구하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결코 신앙을 부차적으로 여기거나 신앙생활을 삶의 한 부분 정도로 취급하는 부르주아적 종교 생활의 장이 될 수 없습니다.

  전적인 헌신으로서의 신앙 행위에는 당연히 위험이 수반하기 때문에 모험입니다. 신앙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도박 게임입니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신앙적 투자와 세상 사람들의 합리적 투자 행위의 차이점입니다. 신앙인들은 영생이라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그러므로 위험이 따릅니다. 반면에 세상의 상식적 투자 기법은 분산투자입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주식에다 자기 돈을 몽땅 투자하지는 않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얻으려는 행위입니다. 영생을 위해 도박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신앙 행위는 어리석음이요 광기, 광신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러한 광신성과 열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적 헌신의 광신성과 정열이 결여된 종교, 너무나 합리화된 종교, 세상의 지혜로 길들여지고 정제된 종교, 한 마디로 말해 물을 너무 많이 타서 묽어지고 엷어진 부르주아적 신앙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비판을 받는 것도 이렇게 길들여진 기독교, 너무나 세련되고 합리화되어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종말적 긴장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성, 그 종말적 신비를 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인격의 완성 정도로 보았으며, 복음의 내용을 계몽주의 철학 정도로 대체시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는 인간의 왕국의 정의와 평화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맛을 잃어버리고 싱거워진 기독교, 물 타기 신학을 정면으로 치고 혜성처럼 나타난 예언자적 신학자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였습ㄴ다. 믿으려면 제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문화의 일부로 안주하는 기독교, 이성으로 환원되는 계시, 합리적 철학으로 대체될 수 있는 복음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상식과 지혜의 연장 정도 밖에 안 되는 기독교 신앙은 필요 없다고 그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세상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연속성도 있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인간의 질서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 인간의 지혜를 조롱하는 신앙의 어리석음을 역설함으로써 너무나 세상적 질서의 일부로 편입되던 당시 기독교에 초월적, 종말적 생명력을 되살린 것입니다.

   관심이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고 이것저것으로 분산된 자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이며 신앙의 참 기쁨과 자유, 그 충만감을 맛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를 모든 것에 앞서는 우선적 가치로 삼고 사는 자는 그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빛 아래서 새롭게 조명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 속에서 살며, 삶 전체가 초월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교회에 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사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도 하지 않는 형편없는 짓을 해서 비난을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병폐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교회 따로, 세상 따로, 즉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적 생활, 이중적 위선입니다. 성과 속의 영역이 따로 있고 하나님과 세상이 따로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세상살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따로 놉니다. 아니, 따로 노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신앙이 도구 노릇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의 존재 이유인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 관심으로 삼지 않고 교회 자체를 궁극적 관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폐단을 시정하려면, 한국 교회는 교회 중심적 신앙을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가져야 하며, 교회 중심적 선교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선교, 혹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전향해야 합니다. 새길 신앙고백과 결단의 취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한다"고.

  최근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 교회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관심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타격을 입는다고 반드시 하나님 나라도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망해야 하나님 나라가 성할지 모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걱정하기에 앞서 사람을 위해 걱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걱정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 5일 근무제로 인해 교회가 흥할지 망할지, 덕을 볼지 손해를 볼지 따지는 교회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주 5일 근무제가 우리 사회와 문화 일반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는 교회의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과 선교관을 가지면, 교회라는 제도 중심의 배타성, 기독교라는 종교 중심의 배타성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우리 기독교인들만의 독점물,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자유와 사랑은 교회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세계 어디서든 하나님 나라를 사건화 시키기 위해 애쓰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가족이나 혈연의 울타리를 넘고 종교와 인종과 국경의 장벽을 초월하여 모두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지상주의, 교회중심주의는 결코 예수님이 원하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는 잘 해야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요 징표일 뿐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는 자는 결코 교회 확장을 궁극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전적인 헌신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발견에서 오는 기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된 특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의 자녀로서 지녔던 구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하늘의 백성이 아니라 땅위의 백성으로서의 옛 정체성에 연연해합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고민은 이러한 실존적 고민이지,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들(부활이나 삼위일체 같은)을 믿느냐 안 믿느냐, 혹은 성경의 기적 이야기들을 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지적 고민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입니다.

  올해가 다 지나가기 전, 사색의 계절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의 구도의 열정과 고뇌가 얼마나 치열했으며, 발견의 기쁨이 얼마나 컸으며 지금도 종종 느끼며 사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가진 것 모두를 파는 전적인 헌신의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이 셋은 신앙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자 세 단계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 새길 교회에 새로운 형제자매님들이 많이 찾아 오셨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추구하다가 오신 분들입니다. 뒤늦게나마 신앙의 새로운 출발을 선택하신 분들입니다. 새길 교회 자체가 값진 진주가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새길 교회는 무엇이 정말로 값진 진주인지, 무엇이 가짜 진주인지만은 올바로 전하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진리이며 구원의 길인지 만은 제대로 전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또 새길 교회는 가진 것을 몽땅 팔아서 주저 없이 값진 진주에 투자하는 전적인 헌신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도 아직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헌신이 너무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신앙에 필요한 열정과 광기가 없어 창백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이른바 중산층과 지식인들이 많이 모이는 부르주아 교회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짜 진주에 속아 너무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허비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모두가 신중하고 몸을 사리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단 참으로 값진 진주를 발견한 이상, 한국 교회 특유의 열정과 헌신을 본받아 이 진주를 사야 할 것입니다. 발견한 다음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투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의심하고 망설이기만 한다면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값진 진주에 대해 안다고 하면서, 말만 하고 정작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투자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코 하늘나라를 차지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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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6) 승리에 겸손하게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06-30 2067
65 고린도전 신령한 일을 아는 자 file 고전2:14-16  강종수 목사  2004-06-13 2081
64 사사기 세속 속의 크리스챤 삿16:15-19  왕대일 목사  2004-05-05 4024
63 누가복음 길 위의 신앙 눅24:13-35  차정식 목사  2004-05-05 2904
62 누가복음 힘이 있는 예언자 눅24:13-35  길희성 형제  2004-05-05 1937
61 마가복음 최고의 낭비 막14:3-9  권진관 형제  2004-05-05 2647
60 베드로후 몸을 긍정하는 신앙 벧후3:11-13  홍명관 형제  2004-05-05 2456
59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15:17-20  강종수 목사  2004-04-11 8783
58 마태복음 예수 없는 기독교-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마6:25-32  한완상 형제  2004-03-11 2588
57 데살로전 모든 일에 감사: 하나의 해석 살전5:18  정대현 목사  2004-03-11 3383
56 마가복음 동양적 지혜의 예수 막10:17-22  김명수 목사  2004-03-11 2362
55 누가복음 자비로운 삶의 길 눅6:17-26  김장호 목사  2004-03-11 2393
54 로마서 주를 위해 산다는 것 롬14:7-8  박충구 목사  2004-03-11 4943
53 욥기 지혜의 새로운 차원 욥38:1-7  서창원 목사  2004-03-11 2416
52 사도행전 관용의 기억 file 행15:1-12  정경일 형제  2004-03-11 2356
51 누가복음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눅16:9  민영진 목사  2004-03-11 2251
50 로마서 섬기는 한 해 롬12:9-12  길희성 형제  2004-02-12 2385
49 하박국 희망-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가능성 합3:17-19  최만자 원장  2004-02-12 2959
48 고린도전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고전4:6  강종수 목사  2004-01-21 2827
47 누가복음 떡떼기의 깨달음:역사적예수와 그리스도의... file 눅24:13-35  한완상 형제  2004-01-06 3024
46 누가복음 평화 눅2:14  강기철 목사  2004-01-06 2885
45 로마서 선물 롬12:4-8  이혜경 자매  2004-01-06 2751
44 로마서 침묵의 방에서 롬11:1-5  이경숙 교수  2004-01-06 2450
43 마태복음 암탉 같은 하나님: 전폭적 포용과 忍苦의 神 마5:43-48  한완상 형제  2004-01-06 3520
42 사도행전 힘있는 교회 행12:1-19  김삼환 목사  2003-12-23 3812
41 요한일서 있는 그대로 요일4:7-13  차옥숭 원장  2003-11-28 2838
40 출애굽기 오늘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출20:1-17  권진관 형제  2003-11-28 2995
39 요한일서 예수의 현존체험 요일1:1-2  김 진 목사  2003-11-28 2745
38 마가복음 예수의 시선 - 예수는 호주제를 폐지하였다 막10:29-30  최만자 자매  2003-11-28 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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