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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 같은 하나님: 전폭적 포용과 忍苦의 神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3520 추천 수 0 2004.01.06 23: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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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43-48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예수 따르미가 되기로 자청하는 사람은 마땅히 예수께서 직접 체험하셨던 하나님을 오늘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다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빠(abba)로 다정하게 불렀던 예수님의 그 마음이 바로 오늘 예수따르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그 하나님나라가 바로 우리 삶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의 삶의 내용이 되도록 힘쓰고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따르미의 삶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체험했던 하나님을 정말 우리가 오늘 이 순간에 체험하고 있는가? 나의 하나님 인식과 체험이 예수님의 인식과 체험과 얼마나 닮은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신자로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엉뚱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고 체험하려고 하지 않는지 때때로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

  나의 짧은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에 대한 내 인식이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급격하게 변화된 것 같다. 모태신앙인으로 자랐기에 어릴 때 품고 있었던 하나님의 이미지가 꽤 오래 지속되어 오다가, 주변의 실존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나의 하나님 인식도 달라지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대체로 몇 가지 단계로 달라진 듯 하다.

  첫 단계에서는 독선과 배타의 신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로지 홀로 독존하시는 절대자이시기에 당신만을 신앙하고 숭배하도록 명령하는 신이였다. 온갖 올곧지 못한 나의 행위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였다. 나의 조그마한 잘못까지도 모두 헤아려 알아내시는 全知하시고 全能하신 분이였다. 선과 악을 명쾌하게 구분하시어 선은 권장하고 상주시며 궁극적으로는 천당으로 초청해 주시고, 악은 가차 없이 심판하여 지옥으로 추락시키시는 분이였다. 악 중에도 가장 심각한 악은 예수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 믿기도 예수에 관한 교회의 교조적 지식을 바탕해서 믿어야 한다. 학습, 세례문답은 이 같은 예수에 대한 신조적 지식을 깊이 주입시켜준다. 그리고 예수믿기는 교회 섬김의 행동으로도 규정된다. 교회 출석(특히 새벽기도 출석), 헌금, 교회봉사와 전도행위 등으로 강화된다. 당연히 목회자에 대한 충성도 예수 믿기 행위에 포함된다. 하나님 두려워하듯, 목회자에 대해 경외심을 갖도록 권장된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아주 배타적 절대자였다. <우리>와 <저들>간을 분명히 구분 짓고, 그 구분을 거룩한 것으로 받든다. 곧 성별(聖別)의 이름 밑에 차별이 종교적으로 정당화 된다. <우리들>은 거룩한 무리이고 <저들>은 잡되고, 불순하고, 불결한 존재 곧 죄인으로 정죄된다. 저들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다. 우리가 저들로 전락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저들>에 대한 미세한 규정이 계속 생산된다. 그래서 종교적 금지행위, 금기(禁忌)행위가 율법주의식으로 자세하게 나열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순수>에 대한 끝없는 추구로 이어지고 이것은 윤리적 완벽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한다. 복음 앞에 순(純)을 부치게 되고,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면 <참 순 복음>을 추가하게 된다. 이 같은 순수 추구가 끝없이 강조되면서 또한 끝없이 추진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쉼 없는 <불순의 제조>작업이다. 성별되기 위한 순수 추구는 불가피하게 불순 추구를 재촉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대들보로 확장시켜 보려는 종교적 독선이 독버섯처럼 번지게 된다.

   나는 어릴 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멸했던 것 같다. 다른 종교를 두려워했고 멀리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나 자신도 불순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번민했다. 죄의식에 시달렸다. 기도할 때 마다 내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학대이기도 하다. 자학증세가 심해질수록 예수의 속죄행위가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하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는데, 그때 흘린 감동의 눈물은 예수의 보혈이 주는 속죄의 효험에 대한 감사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가는 <샘물과 같은 보혈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등이었다. 예수의 피, 그의 고난과 죽음은 전적으로 내 개인의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과 <죄>를 해소시켜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 예수의 피 속에 올곧은 새 인간 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구조를 세우기 위해 흘린 피는 없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은 몰역사(沒歷史)의 신이요, 몰사회적(沒社會的) 독존자였다.

  <우리의 신>은 항상 <저들의 신>보다 절대적인 우월한 전능자였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의 신들은 불순한 신, 잡신, 또는 악귀로 인식되었다. 절에 가서 대웅전 안의 부처와 그 주변을 보면 으시시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불상(佛像)이 나에게는 일종의 바알신처럼 여겨졌다. 그곳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을 새삼 그리워하기도 했다. 바알 신전을 불로 태워 없앴던 강력한 엘리야의 신에 대해 자긍심을 갖기도 했다. 나는 최근 미국의 국방성 정보담당 차관보로 있는 보이킨(Boykin)장군의 발언에서 나의 초기 하나님의 모습을 새삼 발견하고 놀랐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추진하는 미국의 신이 테러를 지원하는 아랍의 신보다 더 강력하다고 말하면서 아랍의 신은 우상이지만 그의 신은 진짜 신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배타의 신, <순수>의 신에 대한 믿음이 가공할 침략전쟁을 합리화 해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한 신을 믿고 매달렸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둘째 단계에서는 정의의 신이 나를 사로잡았다. 6.25를 중학생 때 체험하면서, 예수의 하나님은 전쟁을 선호하는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회의사가 되어 전쟁, 빈곤, 부패, 질병 등을 고쳐보겠다는 꿈과 의지가 꿈틀거릴 때, 나에게 다가온 하나님은 결코 전쟁과 부패와 가난을 부추기시는 분이 아니었다.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했다.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려 보면서, 닫힌 부패 체제에 대한 반발심은 나의 창자에서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나의 하나님은 억압적인 부패 체제를 뒤엎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하나님이 정말 절박한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출애굽을 모세에게 명령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시다. 정의와 자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시는 절대자다. 그러기에 그 분은 저 높은 보좌에 앉아 역사와 사회에 무관심한 초월신으로 남아있기를 거부한다. 억울하게 억압받고, 서럽게 차별받고,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민중의 편에 확고하게 서서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신이다. 이런 뜻에서 역사참여의 신이다.

   어떤 뜻에서는 역사참여 신은 한쪽을 단호하게 선택하는 신이기도하다. 억눌려 지극히 작은 존재로 축소되어버린 보잘 것 없는 존재들, 곧 지극히 적은 자들(the least)과 극심한 경쟁에서 탈락되어 왕따 당하고 있는 꼴찌들(the last)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신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예수는 가난한자를 축복하면서 동시에 부자를 저주했다. 확실하게, 올곧게 선택하고 편드는 신이다. 내가 미국에 유학 갔던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킹 목사의 하나님도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나라는 지극히 적은 자들과 꼴찌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다. 흑인노예의 아들과 딸이 백인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정답게 식사하는 마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는 신이라고 믿었다. 흑인 인권운동에 있어서나, 한국 민주화운동에 있어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의 노랫말은 승리를 확신하는 운동주체들의 종말론적 희망의 고백이기도 하다. 정의는 꼭 승리하고 만다는 신념은 곧 불의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악이라는 신념이기도 하다. 악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뜻에서 정의의 신 또한 배타적이기도 하다. 비록 탈 역사적 입장에서 악을 심판하여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제1단계의 신과는 다르다고 하나, 역사 속에서 불의의 세력을 결연하게 배척한다는 뜻에서 제2단계의 신도 승리주의 신이요 배타적 신임을 부인 할 수 없다. 물론 정의의 하나님은 몰역사적 개인적 배타성을 거부하지만 역사참여를 통한 공익적 배타성은 존중한다.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기간과 부당하게 해직되어 재야생활을 했던 기간 내내 나의 하나님은 역사참여의 하나님이었다.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그 후 3년간 미국 망명생활을 하는 기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민중의 고난을 안타깝게 체험하고 가까이 지켜보면서 조금씩이나마, 하나님의 <무능력>과 그의 <무반응>에 대해 예민해지기도 했다. 때로는 불평으로, 때로는 분노로 원망하기도 했다. 불의의 창궐, 불의의 연속적 승리가 계속 펼쳐지는 듯 하는 역사 현장 속에서 계속 침묵만 하시는 신에 대한 나의 원망은 옛날 바빌론 포로 때의 유대인들의 원망과 독일 나치의 학살 제물로 죽어갔던 20세기 유럽의 유대인들의 불평으로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친 들판에서 이 같은 침묵의 신이야말로 신의 참 모습일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무력화시키는 신이야 말로 무력화된 인간에게 참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세 번째 단계의 하나님의 모습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스스로를 비우시는 同苦神의 모습이다. 1980년 봄과 초여름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지하실에서 지옥 심문을 받고 있었다. 절망과 고통의 심연에 내동댕이침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나에게 벅찬 진실로 다가왔다. <성경은 꿀맛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어머님의 평소의 이 말씀의 뜻이 절망과 공포의 처절한 상황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비로소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성서의 맥락(context)속으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본문(text)이 되살아나 나에게 진실의 감동으로 뜨겁게 다가왔다. 성서본문의 구체적 역사적 맥락 속으로 내 실존이 몰입될 수 있었던 것은 내 맥락이 절망과 고통과 고독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문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면서 본문의 뜻이 단지 옛날의 메시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무나 절절한, 가슴 벅찬 메시지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정말 뜨거운 감동의 순간이었다. 텍스트의 주인공이 울면, 나도 함께 울었다. 객관적으로는 1980년 늦봄 나의 맥락과 성서의 맥락이 너무나 먼 것이었지만, 그 메시지가 주는 감동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았다. 이것이 바로 성서를 몸으로 읽는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성서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 나의 상황 속에 내려오시어 나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친히 느끼시는 분이었다. 이때 아! 同苦神이 나의 신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나의 하나님도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처럼 심문을 받고 계시구나 하는 진한 느낌. 그것은 은총이었다.

  동고신의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의 사랑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샘 솟듯 했다. 이때 내 옆방에서 육체적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있는 목사님 한분이 계셨다. 그분에게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성서, 나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생명의 원천을 주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 성서를 막상 주려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어떡하나 하고 불안 속에 망설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성서를 찢기로 했다. 4복음은 목사님께 드리고 바울서신은 평신도인 내가 지니기로 했다. 성서를 찢는 불경(不敬)을 감히 저지르기로 했다. 그런데 성서를 찢는 순간의 그 기쁨, 그것은 곧 희망과 용기 그리고 생명을 나누는 기쁨이었다. 내 것을 비워 남을 채워주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이 반쪽 성서를 받은 목사님 방에서 찬송소리가 마침내 들려왔고, 그분의 흙빛 얼굴색이 날로 밝아지는 것을 매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부활의 모습,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나는 기뻐했었다.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 것이다. 무서워했던 군사재판정에서 피고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애국가를 불렀을 때 내 바로 곁에 함께 계신 하나님. 그분은 힘없는 당신백성 바로 곁에서 그들과 함께 계시어 힘없는 그들의 모습을 지닌 채 그들을 격려하고 계셨다. 아마도 저 아우슈비츠 유대인수용소에서 하나님은 매일매일 그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同苦神은 저 높은 곳, 영광의 보좌에 위엄 있게 앉아계실 틈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항상 저 낮은 곳, 어두침침한 곳, 고통의 낮은 현장으로 내려가고 계실 것이다. 이런 신은 자기중심적 유아독존적 존재, 자기 완전화(完全化)의 절대자가 아니라, 자기해체(自己解體)의 신이요, 자기를 지워 남을 있게 하시는 신이다. 날마다 지구 여기저기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받으시고, 부당하게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죽어가는 신이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너무나 억울하고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도 바로 동고신이시기 때문이리라. 개인의 원죄를 속량하시려는 교리적 이유에서라기보다, 당신의 그 지극히 작은이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직접 체험하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시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同苦神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적은 자들이나 꼴찌의 아픔만을 함께 아파하시는 <편애>의 신이 아닌가?

  한국사회가 민주화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지난 10년간 적잖은 혼미 속에서도 민주화는 계속 진전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른바 불의의 세력은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기에 동고신과 정의의 신은 계속 악과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 나는 계속 고뇌하였다. 이런 안타까운 심경을 지닌 채 나는 폭넓게 껴안으시는 하나님(all-inclusive God)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악을 방조하거나 불의를 부추기는 신에 대한 인식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나는 네 번째 단계로 들어가는 듯 했다. 멋지게 지시면서 악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모든 것을 껴안으시면서 그 속의 불의의 세력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민주화국면에서 나는 복직, 복권되었고, 정부요직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전히 번성하는 듯 한 구악(?惡)의 문제, 악과의 동거문제를 놓고 나는 계속 고민하는 가운데 악을 껴안고 그 악에 의해 때로는 패배 하면서도 마침내 악과 불의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타는 목마름으로 보고 싶었다.

  악은 제거해야한다. 그러나 결단코 악의 방법으로 악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당위의 명령일 뿐, 현실에서는 악을 선으로 이기기 어렵다. 오히려 선으로는 악에게 패배하기 쉽다. 십중팔구는 악에게 지고 만다. 다만 그 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보라. 빌라도법정에서 희대의 웃음거리가 된 예수의 그 의연한 모습. 온갖 수모와 배신과 채찍질을 감수하시면서 조용한 침묵과 우아한 평정심을 유지하셨던 예수님, 성서는 이런 장면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비유했다. 우리는 이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에서 속죄의 교리적 가치만 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껴안고 용서하면서 아름답게 악을 변화시키는 잔잔한 감동의 모습, 곧 하나님 패배의 미학(美學)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패배>가 전달 해주는 그 감동의 평정함(serenity)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일찍이 페니키아 이방인 여성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시어 그녀의 딸을 낫게 해 주셨는데 그때의 모습, 곧 팔이 밖으로 굽는 아름다운 모습을 이미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예수에게 다정한 아빠로 다가오신 하나님은 바로 이 같이 멋지게 지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예수의 하나님은 결코 로마의 황제 시저의 오만한 승리의 신이 아니었다. 시저의 신은<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찬미 숭상하는 필승의 패권적 신이었지만, 예수의 신은<왔노라, 당했노라, 졌노라>를 고백하는 패배의 멋진 신이었다. 바로 그 같은 패배의 아픈 어두움이 치열했기에 그만큼 부활의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참하지만 의연한 패배가 있었기에 아름다운 부활의 승리가 있는 것이리라. 사도 바울도 이 같은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을 매 순간 체험했기에 온갖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주검까지도 즐겁게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나. 이 같은 패배의 미학을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은 악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 악을 꼭 껴안고 오래 참고 참는 하나님이시다. 인고(忍苦)와 자비의 신이다. 바로 이 진리를 예수는 산위에서 이렇게 설파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이 말씀은 원수사랑을 강조하신 뒤 곧이어 하신 말씀이다. 악과 불의와 동행하고, 동거하면서 참을성 있게 그것들을 껴안고 변화시키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악 자체를 사랑하거나 불의를 즐기라는 뜻으로 그것을 껴안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껴안으므로 그것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혹시 변화시키려다가 악에 의해 처참하고 억울하게 패배당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평정한 마음으로 의연하게 수용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멋지게 지라는 명령이다. 그래야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를 맞거나 햇볕을 쬐일 때마다 이 같은 껴안으시는 하나님을 보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불의에게 햇빛과 비를 고루 주시는 하나님은 암탉과 같은 하나님이기도하다(마태 23:37). 암탉은 자기 품안에 다른 새의 알이 있어도 그것을 품는다. 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듬고 키워준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악과 세속적 불의를 보고 탄식하고 눈물 흘리셨다. 당신 스스로가 암탉이 되어 그들을 병아리처럼 품어 그 생명을 보듬어주시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못해 눈물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온갖 다른 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하나님이다. 원수의 알도, 불의의 알도 품어서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전폭적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바로 이 같은 껴안음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원래 아람어나 히브리어에는 윤리적 완벽성 또는 율법주의적 완전성을 담아내는 언어가 없다고 한다. 마태복음 5장 48절의 완전함은 teleios로 번역했다. 희랍어 teleios는 그리스의 미학적 개념이다. 그러기에 이 희랍어를 윤리적 완벽성이나 율법주의적 완전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원래 구약 신명기 18장 13절의 완전함(tamim)의 뜻은 온전성, 전체성, 성실성, 충만함, 건강함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원수까지를 포함해 전체를 껴안아, 아픔을 함께 나누는 전폭적 同苦의 충만한 사랑행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님의 완전함은 바로 자기비움의 폭넓음, 동고의 전폭성, 사랑의 충만성을 뜻한다. 忍苦와 同苦의 하나님 사랑의 그 엄청난 크기와 깊이를 뜻한다. 결단코 개인의 윤리적 완성이나 독선적 율법주의 완수를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하나님 순례는 이제 끝난 것인가? 결단코 아니다. 이제 겨우 첫발을 디뎠을 뿐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존재가 사랑 실천의 삶을 통해 영속하기를 바라신다. 시간 속에 사는 풀과 같고, 기껏해야 풀의 꽃과 같은 우리 인간이 이 같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영원에 잇댈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예수를 통해, 예수의 사랑을 통해(예수에 대한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예수님 당신의 하나님을 오늘도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체험하면서 시간에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값진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기쁨은 곧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악과 불의를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더욱 헌신하게 하는 기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나의 하나님 인식이 나의 실존과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깊이 성찰해보면 인간이 자기의 경험과 절박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비록 안팎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다르게 인식하고 체험하더라도 이 같이 달라지는 우리의 인식과 체험을 넉넉하게 받아 주시면서 우리를 더욱 껴안고 더욱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는 정말 넉넉한 하나님이 바로 암탉 같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실까? 우리의 달라지는 인식과 체험 속으로까지 스스로를 비워 들어오시어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실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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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2 마태복음 교회의 3대 사명..... 마4:23-25  이정원 목사  2010-02-25 3536
17241 마태복음 낙심 포기하지 마라 마15:21-28  한태완 목사  2013-04-09 3532
17240 레위기 생각을 바꾸자 레17:1-16  최장환 목사  2013-03-20 3532
17239 예레미야 옛 언약, 새 언약 [1] 렘31:31-34  정용섭 목사  2012-04-06 3531
17238 마가복음 휴식의 중요성 막6:30-31  한태완 목사  2010-07-06 3530
17237 시편 희망을 잃지 말라 [1] 시121:2  한태완 목사  2012-07-17 3527
17236 설교자료 말씀의 숨과 결-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9-05-08 3526
17235 마태복음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자가 되라 마25:1-13  한태완 목사  2011-05-31 3525
17234 잠언 동물의 지혜를 배우자 잠30:24-28  민병석 목사  2010-05-14 3525
17233 시편 하나님의 섭리 시69:13-18  한태완 목사  2014-02-22 3524
17232 고린도전 방언 기도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전14:39~40  조용기 목사  2009-06-01 3524
17231 누가복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눅16:1-9  허태수 목사  2013-08-25 3522
17230 마태복음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라 마5:43-48  한태완 목사  2013-12-14 3521
17229 민수기 축복하며 복받는 세상 민6:22-27  김필곤 목사  2012-08-28 3520
» 마태복음 암탉 같은 하나님: 전폭적 포용과 忍苦의 神 마5:43-48  한완상 형제  2004-01-06 3520
17227 출애굽기 이 세상은 누릴 곳이 아니라 나의 영적 실력을 준비하는 곳 출2:1-10  김경형 목사  2013-06-12 3517
17226 시편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150:1-6  한태완 목사  2011-01-31 3516
17225 신명기 축복의 길, 고난의 길 신8:2~3  조용기 목사  2010-02-15 3516
17224 사도행전 21세기의 바나바 행11:19-30  유흥준 목사  2013-02-12 3515
17223 이사야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사25:6-8  정용섭 목사  2010-06-14 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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