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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우보다 더 외로운 예수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2623 추천 수 0 2004.10.13 23: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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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8:2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영화 <그리스도의 고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은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실물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부각시키는 데는 끔찍스러울 만큼 성공했지만, 그의 영적 고뇌와 실존적 고독을 드러내 보임에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그 잔인한 고문으로 인한 육체의 아픔은 지나치도록 자세하게 영상화되었으나, 그의 내적 고독은 무시당한 듯 합니다. 고통은 있으나 고뇌가 없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저는 오늘 예수의 깊은 고뇌, 그 실존적 고독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역사적 예수께서 경험하셨던 아픔 중에는 육체적 아픔 보다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아픔이 더 깊었고 더 길었고 더 컸다고 생각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난 이천년 가까이 기독교와 제도교회가 예수를 끊임없이 고독하게 몰아치면서 괴롭혀 왔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도교회가 저지른 끔찍스러운 반(反) 인륜적 범죄들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고통당했던 많은 사람들의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말할 수 없는 고독과 고뇌를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단자>를 처형시키고, <마녀>를 화형시켰으며,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토착주민들을 마구 학살했던 서구기독교의 행패야말로 예수의 몸을 계속 부관참시하는 것과 같은 끔찍스러운 짓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날 예배 때마다 수억의 기독교 신자들이 높은 교리 성곽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향해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찬양경배하고 있는데, 과연 실물 예수께서 당신에 대한 이 같은 종교적 영광과 찬양을 보시고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즐기실까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송구스러워 몸이 움추러드는 듯 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을 강조하셨던 주님의 그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모습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면서, 저는 찬양과 영광일색의 예배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어색하게 여기시거나 수줍어하시거나 외로워하실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갈릴리 예수의 실존적 고뇌와 고독의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고독한 예수와 역지사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외로운 예수께서 외롭고 괴로운 인간들과 끊임없이 역지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물예수의 삶은 처음부터 고독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그의 고독과 고뇌는 참으로 길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같은 신성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외롭다니, 고독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항변하실 분들이 적지 않겠습니다만, 그의 영적 고독과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고 그와 역지사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고독과 고뇌와 고통을 치유해 주는 영적 효험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물예수의 그의 고난은 오늘 우리의 고난을 근본적으로 고쳐주는 능력임을 확신함과 동시에 우리 기독교의 잘못으로 그가 더욱 외로워졌고 괴로워졌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제 그의 고독을 다시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그의 고난을 골고다의 언덕에서만 조망해 볼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구한 교회사의 관점에서도 그의 고뇌의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고난의 핵심에는 언제나 처연한 주님의 고독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자체가 고독이었습니다. 객지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 자체가 그러합니다.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탄생의 신비로움이 오히려 어린 예수에게는 왕따 당하는 아픔을 안겨다 주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처녀 몸에서 났다는 소문 자체가 어린 예수를 그 또래의 친구들 속에서 끊임없이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요.

   자라는 과정에서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과 유난히 다르고 뚜렷하게 비범했을 것입니다. 비범했을수록 그는 아프게 외로웠을 것입니다. 예수의 어린시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도마의 유아복음(Infancy Gospel)에 의하면, 어느 거룩한 안식일, 그 어린이는 너무나 심심했던지 홀로 진흙으로 참새들을 빚고 있었습니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또래들과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며 놀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지나가던 랍비가 예수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거룩한 안식일날 일한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때 어린 예수는 속으로 고독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듯 합니다. 랍비가 지나가자 어린 예수는 갑자기 진흙참새들을 향해 손뼉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진흙새들은 홀연히 살아나 하늘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독의 한 저항이었겠지요.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뿐만 아니라 진흙 같은 자연마저 해방시키는 어린 카리스마의 그 비범함을 보여주는 통쾌한 광경이 아니겠습니까.

   열두 살 때 어린이 예수는 육신의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갔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로부터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진리의 자유, 자유케 하는 진리를 어린 예수는 율법학자들과의 열띤 토론을 통해 신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떠난 것도 모르고 진리토론에 몰입했습니다. 사흘 후 부모들이 그를 찾아 성전에 되돌아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고약하고 불경한 언사같이 들립니다만, 그것은 그의 비범성 때문에 가족 속에서도 그가 겪었던 그간의 실존적 고독을 드러낸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어린시절부터 예수는 고독의 아픔을 내밀하게 씹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서른쯤 되어 광야의 시험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고독 속에서 겪은 시련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고향땅 나사렛에 돌아와 회당에서 첫 말씀 증거한 뒤, 그는 고향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곧 아빠같은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편애하시는 부족신(tribal God)이 결코 아님을 대담하게 증거했기 때문이지요. 고향사람들은 분개하여  벼랑 끝까지 예수를 끌고 갔습니다. 그는 그러한 아픈 경험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지요. 시대를 앞서보고 앞서가는 존재는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공생애도 고독과 고뇌로 시작된 셈이지요.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지배(하나님나라)를 설파하시고, 그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열린 밥상 공동체와 무상의 치료를 베푸셨습니다. 이때마다 당시 기득권층은 예수의 행동과 말씀을 불온한 짓거리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증언과 행동마다 딴지를 걸거나 말꼬리를 잡고 물어 늘어지려 했습니다. 때로는 함정을 파놓고 질문도 했습니다. 이런 도전을 받을 때마다, 실물예수는 분노에 앞서 연민과 고적함을 더 심각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제자들의 우둔함과 한심스러움을 목도할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고독의 찬바람이 쐥하게 불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심하고, 답답하고, 유치하고, 기가 찬 일이 어디 한두 번 이었겠습니까. 얼마나 외로웠길래, 예수의 제자가 되어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율법학자를 보고 주님은 이렇게 대꾸했겠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마태 8:21)

   머리 둘 곳 없다는 표현은 단순히 한 몸 둘 곳 없다는 뜻뿐만 아니라 마음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롭다는 뜻이겠지요. 몸과 마음은 머리에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삶이 집 없는 노숙자(homeless)의 뿌리 뽑힌 삶임을 그에게 각인시키면서 그 같은 삶을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율법학자의 청을 정중하게 간접적으로 거절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삶을 감당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 감히 예수를 따르겠다고 우길 때, 예수께서는 더욱 처연한 고독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편안한 주택을 갖고 사는 현대인들은 더더욱 예수의 이 같은 뿌리 뽑힌 떠돌이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도 예수를 외롭게 하고 있는 셈이지요.

   한심한 제자들로 둘러싸여 있어 이미 충분히 외로운 터에, 육신의 부모형제마저 예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으니 얼마나 더 외로웠겠습니까. 심지어 예수가 마귀의 괴수가 되어 그 초능력으로 다른 마귀들을 쫒아낸다는 소문(고약한 조작된 소문이지요.)을 듣고 미친 자식을, 미쳐버린 형님을 찾으러 어머님과 형제들이 달려 왔었지요. 그 전갈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왕따시켜도 보듬어 줄 따뜻한 가족의 손길이 건재할 때, 그 왕따의 아픔은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실물예수는 그러한 가족의 보살핌마저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떠돌이 카리스마였고 그만큼 고독한 실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영민하고 따뜻하여 고독의 그 아픔을 동고(同苦)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이제 예수를 뼈저리도록 외롭게 했던 제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잠시 주목해 봅시다. 대체로 예수를 세속적 메시아로 착각하여 그를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마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왕이 되시면, 왕의 좌우에 앉아 세상을 호령할 정치권력을 탐했습니다. 정말 천박한 동기로 예수를  따르게 된 셈이지요. 그래도 그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어느 날 주님께서는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 꼭대기에서 주님은 유대인의 최대, 최고의 영웅이요 지도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영적인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너무나 감격적인 황홀경이었지요. 정치적 탐욕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일종의 영성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감동에 사로잡혔던 베드로는 즉석에서 주님께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일종의 경망한 호들갑이지요.

“여기가 좋사오니, 천막 셋을 짓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성은 산 아래 있었습니다. 산 아래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밑바닥 인생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삶, 곧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예수운동(하나님나라 건설운동)을 펼쳐나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홀한 산꼭대기의 영성체험 속에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나음과 자유의 삶, 치유와 정의의 삶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에서 곧 내려오시어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는 어린이부터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쳤던 베드로의 한심한 모습 보고 주님의 심경은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자기 속마음을 이토록 알아주지 못하는 이른바 수제자의 그 탈역사적인 경박한 제안을 들으며 썰렁한 고독의 바람을 마음 속 깊이에서 또 한번 느꼈을 것입니다.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외롭고 괴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어리석은 제자들은 예수가 세속적 영광과 종교적 축복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더 똑똑하고 나은가, 누가 더 높은가를 시비할 정도였으니까요. 제자들의 이 같은 낮은 수준의 권력투쟁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의 심정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하루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코 종교적 영광과 정치적 승리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처음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반응은 과감하게 유치했습니다. 단호하게 한심했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말렸던 베드로의 심중에는 내 신세 망쳤구나 하는 이기적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고독은 마침내 분노로 이어 졌습니다. 주님은 갑자기 베드로의 얼굴에서 오래전 광야에서 그를 시험했던 마귀의 얼굴을 다시 본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심하게 나무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33-23)

   본격적인 수난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서 당국의 체포를 눈앞에 두고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다빈치의 최후만찬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고독을 슬픈 듯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가룟 유다가 돈자루를 쥐고 있습니다. 예수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미리 받았던 돈이 그 자루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기야 이런 절박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고독은 그의 특유의 인내와 사랑의 모습 속에서 더 돋보이는 듯 합니다. 보통 선생이라면, 스승을 돈으로 판 제자를 폭풍처럼 몰아쳐 꾸짖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배신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암시하셨지만 그가 당황할까봐, 누구라고 딱 지목하여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범인이었던 가룟 유다가 주님을 태연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예수님의 표현은 어떠했을까요. 배신자에 대한 인간적 고독과 연민, 고뇌와 온정이 뒤범벅된 아픔의 묘한 표정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의 모습을 처연하게 쳐다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요. 목숨 바쳐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의 힘찬 결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은 그 고백이 갖는 엄청난 치졸함과 성급함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쓴 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쓴웃음은 결코 비웃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면서 주님의 실존적 고독의 표현일 것입니다. 당장 내일 새벽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 땔 그의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여 주님은 속으로 조용히 우셨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연민의 정으로 우시면서 그 경망한 짓거리가 우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웃으시려니까 자연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깊은 고뇌와 고독을 과연 우리들은 역지사지하실 수 있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그 고독을 정말 우리는 역지사지 할 수 있을까요. 역지감지(易地感之)는 더더욱 어렵겠지요. 주님께서는 체포되기 직전 바로 체포된 그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피땀 흘리며 혼신의 힘으로 고투했습니다. 그 실존적 고뇌는 육체의 고통에 비교할 수 없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의 이 같은 고뇌와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 셋은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스승과 동고(同苦)하지 못했던 우매한 제자들의 한심스러운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도 우리 주님께서는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주님이 오히려 먼저 한심한 제자들을 역지사지 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마음이 정말 예수님처럼 절박했다면, 정말 제자들이 먼저 스승과 역지사지, 역지감지 했겠지요. 아무리 그들의 육체가 피곤했다하더라도, 동고의 기도를 스승과 함께 드렸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제자들의 이 같은 육체의 연약함을 오히려 먼저 역지감지 해주셨던 스승의 너그러운 모습이야말로 연약하면서도 독선적인 저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 넓은 마음속에서 그의 실존적 고독은 깊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체포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그를 체포하려 했을 때 제자들의 모습은 스승을 또 한번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급하게 달아나다보니, 체포자의 손에 잡힌 자기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채 맨몸으로 달아난 제자도 있었으니까요. 벌거벗은 체 정신없이 달아나는 제자를 본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뿐입니까.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쳤던 베드로의 과격한 대응에서, 무력으로 폭력을 이기려고 했던 제자의 과격한 모습에서 주님은 더 큰 고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악을 궁극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도무지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 앞에 그는 끝없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골고다로 가는 도상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육체의 아픔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이 점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 고통의 총량을 잘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에 더하여 사회적 수치감 또한 극치에 다달았습니다. 옷을 벗겨 십자가위에서 나신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사회적, 인간적 수치심을 육체의 고통에 더하여 극대화하기 위함이지요. 게다가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주님은 그 배신의 아픔과 함께 엄청난 고독을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빠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으니, 그 고독의 깊이를 누가 과연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이 절규는 억울하게 버림당한 한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고독의 최악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육체의 고통, 사회적 수치감, 정신적 배신감, 영혼의 고독감, 이모든 실존적 아픔을 어찌 한 인간이 모두 한꺼번에 겪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소중한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인간만이 내뱉을 수 있는 절망의 절규를 예수께서 쏟아내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모든 고독한 인간의 아픔을 주님은 뜨겁게 대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모든 이들과 동고하시고, 역지사지하시고, 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값진 십자가의 은총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의 삶이 이러할진데, 지난 이천년 가까운 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의 고독과 고통은 더 깊고 심각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정치권력 중심부로 이동하게 되면서 교회가 더욱 관료제화되었고 또한 교리도 더욱 배타적으로 다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불행하게도 그의 역사적 삶은 점점 희미하게 잊혀지게 되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무시되고 교리의 그리스도는 숭상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리의 옷을 입은 왕중왕은 거룩, 거룩, 거룩한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날로 신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1980년 중반에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가톨릭 성지 가운데 하나인데, 그곳에서 성모마리아는 숭배의 대상으로 높임 받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금관을 쓰고 있는 성모상을 보면서 저는 언뜻 성모마리아가 그곳에 와서 자기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를 잉태한 젊은 마리아의 노래 정신으로 본다면(누가 1:46-55), 휘황찬란한 금관을 쓰고 있는 성모상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성모상은 나와 전혀 관계없노라
이 우상을 제거하라.”

   지난 천 칠백 년간 기독교와 제도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격상시키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그를 더 높혀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고독은 비례로 더욱 깊어 갔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당국이 다른 종교를 십자군의 주적으로 낙인찍어 씨를 말리려 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가부장적 관례에 도전하는 여성을 마녀로 낙인찍어 잔인하게 화행시키려 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로운 신학적 사고를 해내는 용기있는 신자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어 온갖 억압을 일삼았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지역의 토착민을 인종 청소하듯 마구 쳐 죽였을 때,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알카에다와 관계없는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낙인찍어 주저 없이 강행했던 침략전쟁을 축복해주었을 때, 자기이름으로 그 많은 선량한 인간들이 너무나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겠습니까. 피가 마르고 땀이 비오듯하지 않았을까요. 실물 예수의 삶 자체가 고통과 고뇌, 고뇌와 고독의 연속이었는데, 부활사건으로 더욱 그를 기리고 경배하려했던 제도교회가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의 고독을 지난 이천년 가까이 끊임없이 심화시켜왔으며, 그의 고통을 악화시켜왔으니, 어찌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쉽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저는 죄인이 되어 몸 둘 바를 모르는 채 가슴조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매주일 교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주님을 만개의 입으로도 그 은혜를 다 노래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찬양하면서도 실제로는 생각이 다른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 인종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기독교 위선의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예수님의 고독과 분노를 떠올리며 전율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를 거룩,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더 높이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지극히 적은 사람들을 더 적은 자로 축소시키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며, 이미 열등감으로 부당하게 시달리는 꼴지들을 더욱 잔인하게 꼴찌자리에 못 박는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는 기독교의 현실을 볼 때마다 저는 또한 전율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시어 제도교회에 오신다면 (저는 오시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도무지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겠군요.
이들이 나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신자라면,
나는 결단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입니다.”

   이렇게 선포하시고 주일날 교회나 성당에 가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와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베세다 연못으로 발길을 옮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으나 으리으리한 그곳 성전으로 가시지 않으시고, 절망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찌들어버린 인간들, 지극히 적은 자들, 꼴찌들이 우글대는 베세다 연못가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제도교회에 가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그곳에서 견딜 수 없는 고적감과 수치심과 배신감을 견디어낼 수 없어 통곡하실 것입니다. 마치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고독으로 목이 메어 울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독교 교회 안에서 당신의 이름과 명예가 그 요란한 찬양 속에서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몸소 겪으시면서 통곡하실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자기를 스스로 비워 남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고, 오히려 예수사랑의 이름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속을 채우는 크리스천들의 행태를 보시고, 주님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보시고 우셨듯이, 고독에 목이 메어 통곡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의 목도 자연히 메어 지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 자신이 그러한 기독교신자라는 사실에 대해 새삼 부끄러워지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이 위선과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오늘도 저 공중의 새보다 더 외롭게 느끼도록 하고, 저 들판의 여우보다 더 고독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우리의 위선과 독선과 탐욕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하기에 정말 자기를 철저히 비우시는 고독한 주님께서 처절하게 고독한 인생들과 주저 없이 동고하시는 사랑의 십자가 은총을 저희 죄인들이 절박하게 목말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말라 하기에 저희들이 여기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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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42 마태복음 교회 공동체의 기초 마18:21-35  길희성 형제  2005-09-19 3046
41 마태복음 선의 결여(privatio boni) 마5:43-48  권진관 형제  2005-05-28 2635
40 마태복음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예수관 마11:25-30  정양모 신부  2005-02-16 2872
» 마태복음 새, 여우보다 더 외로운 예수 마8:21  한완상 형제  2004-10-13 2623
38 마태복음 예수 없는 기독교-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마6:25-32  한완상 형제  2004-03-11 2598
37 마태복음 암탉 같은 하나님: 전폭적 포용과 忍苦의 神 마5:43-48  한완상 형제  2004-01-06 3531
36 마태복음 신앙의 세 단계 file 마13:44-46  길희성 형제  2003-11-14 5337
35 마태복음 시장의 논리와 하느님 나라의 논리 [1] 마20:1-14  홍근수 목사  2003-09-08 3272
34 마태복음 웃기시는 예수: 해학과 저항정신 마5:38-42  한완상 형제  2003-07-24 4176
33 마태복음 아, 기독교인임이 부끄럽구나 마23:37-39  한완상 형제  2003-07-08 4101
32 마태복음 왜 한국교회는 버림받고 있나? file 마16:21-24  한완상 형제  2003-06-01 4046
31 마태복음 부활의 증인들 마28:1-15  서창원 목사  2003-04-25 5406
30 마태복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라 마5:13-16  한태완 목사  2007-11-15 4678
29 마태복음 표리부동과 외식. 마23:25-28  한태완 목사  2007-11-10 2250
28 마태복음 대속의 은혜 마20:28  한태완 목사  2007-11-10 2933
27 마태복음 외식과 불법 마23:13-15  한태완 목사  2007-11-07 1570
26 마태복음 천국의 열쇠 마16:18  한태완 목사  2007-11-02 3767
25 마태복음 작은 행동 마13:32  한태완 목사  2007-11-08 3035
24 마태복음 증거자의 길 마10:16-20  강종수 목사  2007-09-09 2633
23 마태복음 자기를 부인하라 마16:23-24  강종수 목사  2007-08-05 3144
22 마태복음 섬김의 종교 마6:21-24  강종수 목사  2007-07-01 2751
21 마태복음 판단 기준 file 마7:21-23  강종수 목사  2007-05-27 2720
20 마태복음 천국과 세상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 마5:17-19  곽노아 목사  2007-02-28 3382
19 마태복음 기독교의 경제철학 file 마6:26-34  강종수 목사  2007-01-28 2848
18 마태복음 경배하러 왔노라 file 마2:1-12  강종수 목사  2006-12-24 3242
17 마태복음 구원의 정보 file 마22:27-30  강종수 목사  2006-10-08 2678
16 마태복음 천국형 축복 file 마6:33-34  강종수 목사  2006-09-17 3287
15 마태복음 기적을 믿는 기독교 file 마12:38-42  강종수 목사  2006-08-20 3677
14 마태복음 외식하는 신앙 [1] 마7:1-12  강종수 목사  2006-01-08 3194
13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15:17-20  강종수 목사  2004-04-11 8811
12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12) 내일을 내다보는 자녀되게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10-13 2005
11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11) 자기 자신을 다스리게 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09-22 1978
10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10) 높은 이상을 갖게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09-15 1838
9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9) 예수 잘 믿게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09-02 1794
8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8) 믿음으로 강한 자녀 엡6:4  김동호 목사  2004-07-2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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