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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의 기초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3011 추천 수 0 2005.09.19 07: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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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1-35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생활이 바쁘거나 피곤할 때 교회를 빠지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꼭 교회에 가야 하나? 단순한 습관으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매력과 가치를 체험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가대의 은혜로운 찬송이든 목사님의 감동적 설교이든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이 있어야 교회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그 가운데서 특별히 믿음의 형제 자매를 만나는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이 기쁨은 다른 어느 가치보다도 큽니다. 믿음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의 친교와 사귐은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지난주 감사절을 지냈지만, 과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무엇을 제일 감사할 것인가를 누구나 한번쯤은 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리라 생각하지만 - 아름다운 공동체를 주신 것을 가장 감사합니다. 아무 부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무엇보다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사람 만나러 가나, 하나님 만나러 가는 것이지 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양자가 불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 속에서, 믿음의 형제 자매 얼굴 속에서 확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를 공동체적 사랑 속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친교 (koinonia, fellowship)는 신앙의 목적 자체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따라서 나가도 되고 안 나가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을 무시한, 혼자서 신앙양심을 지키면 된다는 무교회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의 친교는 신앙의 목적이자 구체적, 가시적 표현이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친교란 일그러지고 상처받은, 적대적이고 소외되었던 인간관계의 회복,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개인주의적 종교가 아닙니다. 혼자서 도를 닦는 수행의 종교가 아니며, 혼자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몇 일전 불교계의 큰스님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이 입적했습니다만, 속세를 떠나 절 안에서 각고의 수행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맹목적이라 봅니다. 자기 혼자 도를 닦아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한국 불교의 맹점도 여기에 있으며, 입으로는 대승 보살도를 말하지만 지극히 소승불교적임을 보게 됩니다). 자기 완성이라는 것도 그리스도교에서는 같은 인간들과의 친교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관계 속에서 파악합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게 되어 있는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나라라는 것도 사회적 개념으로서 단지 개인의 내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현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죄란 바로 이러한 관계를 왜곡시키고 차단해 버리는 힘이며, 더불어 사는 친교의 삶을 깨는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회복이 곧 구원이며, 친교는 구원 그 자체, 곧 하나님나라 그 자체로서 신앙의 목적이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친교, 이러한 구원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땅 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친교는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확실한 징표요,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고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만약 그렇지 못하고 교회에서의 인간 관계마저도 진정한 친교가 못되고, 사회적·세상적 인간관계의 또 하나의 연장이나 재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에 나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제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를 전한다 해도, 제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말한다 해도, 이 친교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그러한 진리를 믿지 않을 것이며 교회에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행여 형제 한 사람이라도 상처받거나 실족해서는 안 될 것이며, 나로 인하여 친교가 깨어지고 나로 인하여 교회라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나로 인하여 하나님나라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각자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또 하나의 세상적 모임으로 만들지 맙시다.

그러면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도대체 어디에 기초해서 성립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세상의 공동체들과 다른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교회는 용서라는 것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 관계는 늘 왜곡되거나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서로를 실망시키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처받은 관계를 끊임없이 회복시키는 일이며, 그 유일한 길은 용서와 화해뿐입니다. 교회공동체의 기반은 용서이며 하나님 나라의 기초도 용서와 화해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아무도 그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또 인간끼리의 용서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다툼이나 미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인간들 사이의 용서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없으며 그의 나라에 참여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제일 먼저 유의할 사항은 "하늘 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간과하기 쉬운 점이지요. 내용은 빚의 탕감, 즉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도덕적 덕목으로서 자비나 관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우리의 구원 그 자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는 오직 용서 위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예수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모두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종과 같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엄청난 빚을 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탕감과 용서 없이는 도저히 풀려나기 어려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자각이 없는 자는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이미 항복 선언을 한 자들이 나오는 곳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숭고성을 믿는 휴머니스트들의 집단도 아니고, 엄격한 유교적 도덕군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독선적인 바리사이파 의인들의 회중도 아닙니다.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본래 매우 자존심이 강한 유태인이었으나 십자가에서 흉측한 죄인으로 죽은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를 깨달은 순간 그의 자만과 긍지는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고 예수 앞에 무릎꿇게 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요 그의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칠 자 아무도 없으며 그 앞에서 우리의 의는 50보 100보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의 논리이며 사회의 논리는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는 내가 내 손으로 떳떳하게 밥 벌어먹고 사는데 내가 왜 죄인인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저 친구보다는 그래도 나은데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사회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자기 정당화, 자기 변명에 급급하고, 자기 잘남을 선전하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 반대입니다.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기를 포기한 자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당신 처분대로 하소서라고 목을 내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단 인생의 사표를 제출한 자들, 그래서 홀가분하고 담담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죽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부질없고 구차한 짓을 깨끗이 포기하고 아예 죽기를 각오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자칭 의인들, 성자, 성도들의 집단이 아니라 죄인들, 용서받은 죄인의 집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예배는 이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아니 사도 바울처럼 나야말로 죄인의 괴수라는 생각, 즉 의와 옳음에 있어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 있어서 나를 능가할 자가 없다는 고백이 교회공동체의 기초이며, 바로 이 점이 교회가 세상의 여타 공동체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사회가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곳이라면, 교회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탕자의 비유; 성전 안에서 머리를 감히 들지 못하는 세리와 머리를 고추 세우고 자기 의를 열거하는 바리사이인의 기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바울은 이 예수의 가르침을 달리 표현하여,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더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들, 잘난 체 하는 사람들,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이며, 그럴 필요도 없는 곳이기에 편안한 곳, 자기 의를 외치면서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인생의 전투가 멎고 평화가 지배하는 곳,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의 대들보를 보지 못하는 눈먼자들이 없는 곳, 범죄자를 심문하는 검사의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자들이 없는 곳, 남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고발하며 남의 실수를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이 공격하는 그런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검사처럼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 기독교인들은 말이 많고 남을 비판하는 데에 능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용서를 모르는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죄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의인의 하나님, 모범생들의 하나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릇된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여 자기가 그런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동료 인간들을 비판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대범한 데, 어수룩한 데가 있어야 하며, 보고도 못 본척, 듣고도 못 들은척하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잘 되는 교회, 따뜻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는 교인들이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가 많은 교회일 것입니다. 나는 요즈음 불교에서 선악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음미하고 있습니다. 한 때 그 말이 그렇게 싫었으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사회의 일반적 원리, 공적 윤리로 삼아서는 문제가 많겠으나,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마태 7: 1-5).

따라서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교회공동체의 또 하나의 원리를 말합니다. 형제들끼리의 용서와 용납, 용서받은 자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는 이 종이 억울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베푼 자에게만 갚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자기가 받은 대로 누구에게든 갚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진 빚을 동료 인간에게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도 용서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주기도문)을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시작은 공짜,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그 다음은 공짜가 없습니다. 나도 남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아예 나는 용서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교회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용서는 의무이며 주님의 명령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과거를 묻지 않고,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기는커녕 기억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일본 수상의 과거사 사과가 다시 한번 우리의 관심을 끌었지만, 잊지는 말지만 용서는 하자는 얘기가 있습니다. 국가간의 관계, 사회의 공적 윤리로서는 당연히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이사야 43: 25, 히브리 8: 12 등). 기억 안 하는 것, 잊는 것이 최고의 용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는 상대방의 좋은 점만을 자꾸 기억하다보면 나빴던 것이 잊혀질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시지 아니하듯 우리도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기억하고 추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전력을 시비하는 곳이 될 수 없으며 과거에 진 빚을 자꾸 독촉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든 형제를 검사처럼 고발, 고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공동체와 다른 점이며, 교회는 문자 그대로 범죄자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도피처, 은신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숨을 돌리고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얻게 하는 곳으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사랑과 용서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일주일에 엿새는 범죄자이었다가 주일날 하루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쉬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우리의 쉼터가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여야 하는 존재 이유이며, 과거를 묻지 않는 이러한 은총의 장이 없다면 세상은 삭막하고 질식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많은데, 제일 나쁜 부모는 검사 같은 부모, 끊임없이 아이들을 비판하고 몰아치고 못살게 볶는 부모입니다. 장로, 목사, 선생들의 자녀들이 그래서 힘이 듭니다. 아이들을 좀된 사람, 남을 용서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남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 늘 쫓기듯 불안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용서란 용납, 받아주는 행위로 너는 안 된다, 너하고는 상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죄지은 자로서, 그리고 같이 이미 용서받은 죄인들로서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겸손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시듯 우리도 형제들을 이렇게 용납하는 데서 구원, 곧 하나님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받아줌이 없는 곳, 서로 고발하고 너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했을 때, 너는 나와 함께 거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의 단절,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그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를 회개하게 만드셨고 다시 그의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너는 안 된다는 말을 누구도 하지 못 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사랑을 증언하기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누가 감히 소송하겠습니까? 의롭다고 선고하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능히 정죄하겠습니까?(로마 8: 33).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고소가 취하된 자들, 면책 받은 자들로서, 다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고발하거나 소송을 걸어 괴롭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이요 자유이며, 이 자유와 기쁨은 "죽음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권세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로부터 앗아갈 수 없다고 바울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피 흘려 속량해 주시고 면책해 주시고 자유롭게 해준 우리를 우리들 자신이 또 다시 고발하고 정죄하고 묶으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고발 안 하겠다는 데 감히 죄인인 우리가 누구를 고소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을 두고서 바울은 엄히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자들이여, 당신이 누구든 간에. ....(로마 2: 1-3).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앞 둔 존재들입니다. 이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면 단 한가지만이 진정으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죄로 얼룩진 나의 인생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인가, 아니면 너는 도저히 나의 나라에 참여 못하겠다고 거부당할 것인가 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의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그리고 이 선택은 결국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자기의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조그마한 빚진 자를 괴롭히는 배은망덕하는 종처럼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납되고 형제 자매들에게 용납됨으로써 인생의 무거운 짐이 덜어진 곳,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나 형제들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내보이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곳,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 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해방의 경험이며, 교회의 사귐 그 자체가 구원의 기쁨입니다. 교회는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오는 수단적 가치만을 지닌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친교는 그 자체가 신앙의 존재 이유요 목표입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구원의 예비적 경험, 예행연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이 교회의 사귐, 친교를 감사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가꾸어 나갑시다. 교회를 또 하나의 세상적 공동체, 또 하나의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만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것인가를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줍시다. 그리하여 이 삭막한 세상, 나그네 인생 길을 걸으면서 서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키워주는 존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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