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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소중함

마태복음 복음............... 조회 수 2348 추천 수 0 2007.11.18 07: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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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26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1953년 11월 13일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벽 3시에 소방단의 신고센터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야간근무를 하고 있던 젊은 소방대원 에릭이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소방단입니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에 여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 살려요! 도와주세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진정하세요. 곧 가겠습니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모르겠어요.” “집에 계십니까?”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디입니까? 집 번지를 말씀해주세요.” “모르겠어요. 어지러워요. 출혈이 심해요.”
“그렇다면 이름만이라도 대세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것 같아요.” “전화 수화기를 놓지 마세요.”
에릭은 다른 전화기를 통해 교환수를 찾았습니다. 남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 소방단과 통화하고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저는 경비원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것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책임자들은 이미 퇴근했어요.” 에릭은 전화를 끊었습니다.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전화 속의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소방단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전화기에 붙어 있었어요. 넘어지면서 전화기를 끌어안았나 봅니다.”
“그쪽 전화번호도 혹시 붙어 있지 않나 찾아보세요.”
“아무 것도 없네요…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말씀해보세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저… 유리창이 보이고, 밖으로 길가의 가로등이 보여요.”
에릭은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녀의 집은 길가에 있으며, 가로등이 창문으로 보이니까 3층 이하의 건물이 틀림없었습니다.
“어떻게 생긴 창문입니까?” 그는 다시 물어보았다. “사각형입니까?”
“아니에요. 긴 창이에요.” 에릭은 그녀가 분명 시내 쪽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에 불이 켜져 있습니까?” “네, 불이 켜져 있어요.”
에릭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응답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했습니다. 그는 근처 소방서로 가서 소방서 서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서장의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방법이 없네. 그 여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리고 그 여인의 전화와 계속 연결해 놓고 있으면 다른 신고를 받지 못하지 않나? 다른 곳에 화재가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러나 에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훈련받던 시절, 그는 소방대원의 첫 임무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그것을 소방서장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서장은 그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그건 미친 짓이야! 사람들은 아마 원자폭탄이라도 있는 줄 오해할 걸. 수백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한밤중에 그럴 순 없지!”에릭은 애걸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신속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서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잠시 후 에릭은 서장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좋아, 해보자! 나도 곧 그곳으로 가겠다.”
15분 후 스무 대의 소형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그 도시의 가장 오래 된 구역으로 출동했습니다. 각 차량마다 특정한 구역을 순찰하도록 배당했습니다. 그 여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지만, 에릭은 수화기를 통해 그녀의 숨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10분 후 에릭이 서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수화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서장은 곧바로 무전기를 통해 지시했습니다. “1번 차량, 사이렌을 끄시오.” 그는 에릭에게 다시 연결했다. 에릭이 말했습니다. “아직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2번 차량, 사이렌을 끄시오.” 차례로 그렇게 하여 마침내 12번 차량에 이르자, 에릭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서장은 무전기를 통해 명령을 내렸습니다. “12번 차량, 다시 사이렌을 켜시오.” 에릭이 말했습니다. “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멀리 들립니다.”“12번 차량, 오던 길로 되돌아가시오.” 서장이 명령했습니다. 잠시 후 에릭이 보고했습니다. “점점 소리가 커집니다. 그 거리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서장이 “12번 차량, 불빛이 비치는 창문을 찾으시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불평 섞인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서장님, 수백 개의 집에 불이 다 켜져 있습니다. 모두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며 구경하고 있어요.”
“확성기를 이용하라.” 서장이 명령했습니다. 에릭은 수화기를 통해 확성기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생명이 위독한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을 모두 꺼주십시오.” 불이 모두 꺼졌고, 단 한 집의 창문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왔습니다. 잠시 후 에릭은 수화기를 통해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소방대원의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의식이 없지만 맥박은 아직 뛰고 있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하겠다. 그녀는 무사할 것 같다.”
엘렌 손달-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녀는 잘 견뎌내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보름 후에는 그녀의 기억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생명경시 풍조입니다.
얼마 전 한 엄마와 세 아이가 생활고에 못 이겨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해 온 국민을 경악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사회적 우려와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자살 사이트를 드나들며 만난 젊은이가 동반 자살을 하고 있으며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도덕적 살해 등이 만연해 있습니다. 지난해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으로부터 얼마 전 한강에 투신자살한 박태영 전남지사에 이르기까지 줄 이은 자살 행위는 그 이유를 막론하고 사회의 병리현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45분에 한 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캥은 이러한 자살 현상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애타(愛他)적 현상은 사회의 통합과정에서 개인의 관심이나 생명이 과소 평가될 때 일어납니다.
둘째, 이기적 현상은 사회 규범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기능을 잃을 때 의지력이 약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셋째, 아노미(anomie) 현상은 사회의 격변기 때 가치혼란으로 말미암아 방향감각을 상실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넷째, 숙명적 현상은 사회악으로 규정된 범죄 행위 때문에 겪는 심리적 압박과 자괴감, 그리고 명예훼손에 대한 모욕감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의 생명경시 현상은 하나의 일시적 분류 현상이라기보다는 총체적으로 복합화한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자살을 결정했을까요? 목숨을 내던져버릴 정도로 삶이 고통스러웠나요? 그런 문제의 요인을 생각하기보다 그 영혼이 그 육체 가운데서 빠져나가기 직전의 그 아찔한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자살을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힘으로 버텨냈을까요.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지 그 힘이 더 궁금합니다.
단순히 “죽어버리면 돼!”라는 도발적인 자살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무언가의 이끌림으로 인해 치밀하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미묘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도 아닙니다. 자살은 남은 자들에게 무서운 부담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살이나 살인을 유도하는 악령의 문화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당하고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악한 영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생명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악령은 목숨을 끊는 것을 마치 ‘진정한 용기’인 것처럼 부추깁니다. 엄연한 살인인데도 말입니다. 나 자신을 무인지경에 던져버리게 하는 놀이문화, 너무 잔인하고 순간적인 컴퓨터 게임,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오늘의 세상 풍조가 바로 자살을 조장하는 공범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살이 아니라 성실한 생존임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한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어떻게 할 권리가 없음을 왜 가르치지 못했을까요.
교회가 오늘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살의 충동을 이겨내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사단은 예수님도 시험산에서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자살은 고통의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죽을 용기로 세상을 살면 얼마나 좋은 일이 많겠습니까. 이제 생명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만드시고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인간의 생명중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의 생기, 혹은 입김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됨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영적 존재인 한 그것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신비보다도 생명의 신비는 고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존엄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 윤리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간직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의 자녀들, 부모들, 스승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우리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삶의 보람을 함께 나누면 어떨까요?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이 전문의를 포함한 일단의 의료 봉사팀이 의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필리핀 오지에서 10일 동안 자원 봉사한 것을 소개했습니다.
올해로 8년째를 맞는 봉사단의 활동은 제대로 병원을 찾지 못하는 필리핀 빈민들에게는 가뭄 속 단비 같은 손길이었습니다. 특히 심한 욕창으로 고생하는 환자에게 왕진을 간 외과 전문의가 열악한 환경에서 3시간 동안 수술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빡빡한 일정과 예측할 수 없는 환자들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봉사하는 젊은 그들의 모습은 나눔과 사랑,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 가는 것 같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몇 푼의 돈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게다가 수많은 어린이를 담보로 한 러시아 인질 사태의 참상은 생명의 소중함이 상실된 현장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알사스 로렌지방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배를 곯는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개구쟁이로 활달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 3-4세부터 교회에 출석하여 성경과 기도를 배우는 등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마을 인근의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기를 즐겼습니다. 하루는 낚시바늘에 걸려 올라온 물고기 한 마리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낚싯바늘을 빼고 되놓아 살려 주고는 그 후 다시는 낚시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루는 새를 잡으러 쫓아 다니다 작은 새 한 마리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습니다.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새 한 마리를 움켜쥔 그 순간 황혼 녘에 때마침 교회당의 저녁 종소리가 울려펴졌습니다. 이때 슈바이처는 손에 힘이 빠지고 가엾은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새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자마자 재빨리 창공으로 날아올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는 새잡이 같은 놀이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물 한 마리도 어여삐 여기는 이러한 마음과 자비는 그의 고매 한 인류애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는 실로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생명의 외경(畏敬)사상과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배우려고 람바레네 밀림 속으로 세계의 뜻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간 의학도 이일선 목사가 큰 나뭇가지 사이에 막대기를 걸쳐놓고 거기에 흔들 침대를 만들어 놓았다가 이를 발견한 슈바이처 박사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비록 말하지는 못하지만 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물론 슈바이처 박사는 그 밀림 속에 병원을 짓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큰 나무를 많이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지요.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혹은 좀더 편하기 위해서는 나뭇가지 하나도 꺾지 않을 뿐 아니라 껍질을 상하게 하는 일까지도 자기 몸의 아픔과 같이 느꼈던 그의 생명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슈바이처는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낍니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듣는 일련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감증을 반성하며 다시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어느 날 미네소타대학에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강당을 가득 메운 교수와 학생들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그레이엄을 주시했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파멸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호기심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인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이 하는 농담 중에 “죽을 뻔한 것이 좋으냐. 살 뻔한 것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성급한 어린이는 생각도 없이 살 뻔한 것이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살 뻔하였으나 아쉽게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믿을 뻔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못 믿을 뻔했어야 합니다. 말구유의 아기를 못 찾을 뻔했어야지 찾을 뻔했었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받을 뻔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은 목수들입니다. 길이는 300규빗. 넓이는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3층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뿐인가.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한 때가 아니니 산에서 나무를 찍어 내려와 다듬는 데서부터 운반하는 데까지. 또는 그것을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조립하고 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 런지는 모르나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다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뿐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건축에 참여하고 교회 강대상 밑에까지 가 보았으나 구원과는 먼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으나 아그립바 왕처럼 거의 구원받을 뻔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해도 당선이 아니면 낙선이요. 될 뻔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가 구원받을 뻔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생물학자가 조그마한 씨앗을 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씨앗의 성분을 저는 잘 압니다. 이 씨는 질소, 수소, 탄소가 얼마씩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와 똑같은 모양의 씨앗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씨앗을 심으면 아무것도 나지 않고 그저 땅속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씨앗은 땅에 심기만 하면 열매가 열립니다. 생명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눈으로 보기에는 여러 성분으로 생명은 그 어디에도 있어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는 온 세상보다 더 귀한 생명이 들어 있어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달걀이 다 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정란이라는 게 있습니다. 수정(受精) 되지 않은 달걀입니다. 아무리 커도, 아무리 때깔이 고와도 부화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많은 경험을 해도, 공부를 하고, 교회를 다녀도 결코 부화되지 않는 미성숙 인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도 그와 같으면, 아쉽고 안타깝고 측은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육신의 생명은 잘살든 못살든 100년 미만에 끝나고 맙니다. 대통령이 되고, 재벌이 되고, 노벨상을 탄다고 해도 금방 죽음의 날이 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영생을 얻었다가 죽을 때 천국으로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일장춘몽 같고 전광석화 같은 짧은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영원한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심으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수십 배, 수백 배로 다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도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더욱 귀중한 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고 영접하면 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었다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63빌딩에 가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만 누르면 20층, 30층 공짜로 올려다 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가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과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복음전파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작은 미물 같은 나를 돌아보시며 나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 마른 땅과 같은 나의 삶에 주님만이 샘의 근원이 되시며 끊임없는 생수로 목마르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침체되고 의욕 없는 내 삶을 회복시키셔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사람들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주여, 갈취와 학대와 살인이 난무하는 이 황무한 땅을 정켤케 하시고 고쳐 주소서. 주의 긍휼로 이 땅을 덮으소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영생의 길을, 나도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따라가게 하옵소서.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보배로우신 나의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생명을 위한 투자

어느 날 저녁 멕시코 과달라쟈라에 있는 선교본부에 죠세 곤잘레스라는 13세의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저녁예배가 끝날 무렵 그는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 소년과 상담한 오빌 라이드 선교사는 그가 아버지를 잃고 갈 곳이 없어서 제빵공장 화덕을 온돌 삼아 자는 소년임을 알았다. 그 선교사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두 살 난 아들은 미국으로 보냈으므로 그 소년을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여 같이 기거하며 학교를 보냈다. 선교사는 소년을 의과대학에 보내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의사가 되게 했다. 라이드 선교사가 양육한 많은 소년들은 의사, 변호사, 목사, 기술자, 교사 등이 되어 모두 각각의 일터에서 일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산 증인들이 되었다. 라이드 목사는 그의 시에서 "한 소년이란 얼마나 귀한가 !
누구의 손에 붙잡혔는가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되거나 파멸의 폭탄이 될 수도 있다. 마귀와 죄가 열심히 그들을 부르고 있는데 교회는 그들을 부르고 있는가 ? 썩을 것에는 투자하면서 소생하는 생명을 위하여서는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가 ?" 라고 했다.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0 나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고 있는가?
0 나는 죽음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0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0 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생명이 주어집니까? 또한 내 주변에서 이 생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0 나는 죽음이 문밖에서 노크할 때를 대비하여 살고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앞으로 1년만 허락하신다면 무슨 일을 하다가 가시겠습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 우리 생명의 주인

어느 목사님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정밀한 진찰을 한 후 의사는 그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는 목회를 그만두고 편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를 더 살 수 있느냐는 그가 얼마만큼 안정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의사의 충고를 들은 목사님은 "만일 내가 당신의 충고대로 한다면 얼마를 더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약 6년"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질문하기를 "만일 계속해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대답은 "길어야 3년입니다"였습니다. 목사는 잠깐동안 생각한 후에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6년 동안 앓으면서 사는 것 보다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3년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병원을 나와 열심히 일하면서 12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27:1)

* 예화(2): 140명의 생명을 위해

북해도의 가장 큰 도시가 삿뽀로의 '키따이찌죠오(北一條)교회의 교회학교 유년부 부장 집사가 있었는데 나이 많은 총각 집사이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삽뽀로 철도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아사히가와라고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아사히가와는 북해도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주일이 되면 꼭 돌아와 본 교회에서 봉사하고 다시 아사히가와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삽뽀로와 아사히가와 사이에는 '시오카리'라고 하는 큰 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는 너무 높아 고개 밑에서 기관차 한 대를 더 붙이고 기관차 두 대가 끌어야만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총각 집사가 다음날이 자기의 결혼식 날이기에 삿뽀로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올라 가다가 마지막 끝에 객차 두 번째 세 번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뒤로 다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관차 두 대는 그 사실도 모르고 나머지 객차들을 끌고 그냥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객 차 두 대는 계속 후진하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대해서는 이 총각 집사만이 조금 아는지라 달려가서 브레이크를 당겼으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후진하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높은 고개에서 벼랑에, 또는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어 140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 때 이 총각 집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주님께서 만약에 이 기차에 타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간단히 기도합니다. 이 기도 후에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밖으로 뛰쳐 내렸습니다. 돌을 주워다가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에 객차는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던져 기차를 막았습니다. 몸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연락이 되고 구조대가 달려왔습니다. 시신을 꺼냈더니 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교회학교 부장을 하며, 독실히 믿는 이 사람은 죽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유서를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지녔던 유서입니다.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다. 내가 죽지 않을 자리에 가서 죽음을 자청하지 않겠다."라는 줄거리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던져 140명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죽어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화(3):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4세기의 교부 크리소스톰이 체포되어 로마 황제 앞에 끌려갔을 때의 일입니다. 심판석에 앉은 황제의 질문과 크리소스톰의 대답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네 재산을 몰수하겠다.’ ‘저의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너를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떼어놓겠다. 평생 외톨이가 되는 거야.’ ‘친구는 예수님입니다.’ ‘너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리라.’ ‘제 나라는 하늘 나라입니다.’ ‘목숨을 잃어도 좋으냐?’ ‘제 생명은 벌써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겨 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저로부터 빼앗을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적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동원하여 우리를 위협합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때론 협박을 통해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것으로 동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하늘 나라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기록되었으며 그곳에 한번 기록되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하고 달라질 수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 없는 사랑으로 감싸 주십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시69:28)

* 예화(4): 생명이 없으면

자장면을 싸고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서 가족들이 가끔 갑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고급스럽게 꾸며진 실내장식 중에 특히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막아놓은 빈 공간에 심겨진 여러 가지 화초들이었습니다. 빈 공간 하나도 세심하게 신경 쓴 것이 좋았고 화려하게 활짝 핀 꽃이 아니라 조금씩 자라는 화초들을 심어놓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 화초들이 실물보다도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화초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생생한지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그것이 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가짜 꽃 만드는 기술은 발전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언제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변하는 것은 변해야 하는데,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색만 바랠 뿐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내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고백하여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한번쯤 의심해보면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오래 믿었어도 내 안에 '생명'은 없고 '외식'만 남아 있다면 그 구원이 정말 나에게 지금도 유효한가? 혹시 나는 근거 없이 구원받았다고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정말 거듭났는가? 한번쯤 자신을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용우

* 예화(5):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에노스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이 자기 아들에게 지어 준 이름은 ‘에노스’입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의미입니다.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에노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셋은 그 중요한 깨달음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자기 한계, 자기 실상을 일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한번 호칭해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몰랐으면 모르되 자기 죽음을 자각한 이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 즉 인생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생 사용설명서를 좇아 살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능과 욕망에 계속 사로잡혀 사느라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더 이상 허망하게 갉아먹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 자신들이 ‘에노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했던들 그들은 창조주를 마냥 외면하는 삶을 계속 살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감한 자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가꾸게 됩니다.

4. 찬송: (258장) 물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1. 물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누구가 던지려나
2. 너 빨리 생명줄 던지어라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보아라 저 형제 빠져 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가라
3.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
4. 위험한 풍파가 쉬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너 어찌 지체하나 곧 생명줄 던져서 구원하라

[후렴]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5. 성경말씀:
0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0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시56:13)
0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4)
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6:48)
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0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0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0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6. 금언:
0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영미 속담)
0 인간의 생명은 나뭇잎과도 같다.(호메로스)
0 성장은 생명의 유일한 증거이다.(죠셉 헨리)
0 깨어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도로우)
0 생명이 있는 곳엔 위험이 있다.(에머슨)
0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자연의 계교이다.(괴테)
0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영국 격언)
0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문을 생명의 돌파구로 바꾸셨다.
0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다른 그 무엇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생텍쥐페리)
0 생명 이외의 재산은 없다.(존 러스킨)
0 생명은 존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토마스 굿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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