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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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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친구 없는 세상은 삭막합니다. 친구 없는 삶 역시 적막합니다. 헌데 더 괴로운 것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 바로 지옥 같은 삶입니다. 지금 세상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나 친구들이 멸종되어 가는 듯한 삭막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의 친구이시다"는 말씀은 기쁜 소식(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지존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같이 보잘것없는 죄인의 친구가 되신다는 진리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참된 친구 예수님을 이 시간 만나보는 것은 적막해지는 우리 상황에서 너무나 절박하게 요청됩니다. 왜 "주님은 우리 친구가 되시나"를 이해하기 위해 도대체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친구는 相通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인간이란 동물과 달리 서로 통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깊은 뜻, 情, 꿈, 좌절 등을 서로 나눔으로써 하나되기 원합니다. 의사소통, 통신(communication)이란 말도 원래 하나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짧은 감옥 독방생활에서 通房의 기쁨이 얼마나 컸나를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며칠 전 보훈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相通하지 못하고 겨우 눈동자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함께 나누어 그것을 증가시키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 그것을 축소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눈물 흘려 용기 주고, 함께 웃고 기뻐하며 행복을 나누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한이 많았던 당시 인간들, 죄인, 쌍것, 여성, 어린이, 이방인 등과 상통하면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온전함을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당시 위선자들로부터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시면서 항상 희망의 커뮤니케이션(相通)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된 친구이십니다.
둘째로, 친구는 참으로 편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 앞에 가면 폭풍같이 분노했던 격정이 조용하게 가라앉게 되고 코브라 뱀처럼 독기를 품었던 강팍해진 마음이 비둘기처럼 유순해 집니다. 괴로울 때 만나면 힘이 생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런 친구로 본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친구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로 읽어도 좋습니다. 주님은 친구이시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란 자기 약점까지 서슴없이 고백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마음이 더 편해지지요. 우리가 주님께 기도 드리는 것도 우리의 잘못을 주님께 고백하는 행위일진데, 그런 기도는 우리에게 안정과 평안과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주님은 참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감옥은 마귀와 함께 하는 궁전보다 더 행복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친구와는 정말 동등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겉으로 높낮이가 다르다해도 친구가 되면 동등해집니다. 서로를 투명하게 보고, 바른 말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끼리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눈치보는 관계는 불평등하고 불편한 관계입니다. 참된 공동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눈치보는 사람은 비굴하게 낮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무 돈이 많아, 너무 지위가 높아, 너무 지식이 많아 친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스스로 낮고 천한 인간과 동등해지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우리 친구이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넷째로 친구란 항상 가까이 있는 흐뭇한 존재입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공간적 거리를 없애주는 사랑이라는 묘약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친구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 속에 살아 계십니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는 흐뭇한 존재가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사셨던 분이었으나 지금 여기서 그 분의 現存을 우리는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 넘어 항상 우리 곁에 계셔 힘과 꿈과 용기와 건강을 주시는 우리 친구가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5:12-15)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친구 되는 것이 큰 기쁨이라면 주님의 친구 되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주님의 친구가 되는 영광을 얻는 비결은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면 내 친구가 된다"가 아니라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면 내 친구가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직접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친구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공동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불구하고의 사랑을 합시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은 저희들에게 "너희들은 내 친구다"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친구가 없어지는 이 적막한 세상에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주님이 내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세상에 참 친구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친구들의 모임 아니겠습니까? 친구 되신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이 교회를 사랑하기에 주님이 우리의 친구 되심을 감사 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첫째 친구는 相通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인간이란 동물과 달리 서로 통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깊은 뜻, 情, 꿈, 좌절 등을 서로 나눔으로써 하나되기 원합니다. 의사소통, 통신(communication)이란 말도 원래 하나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짧은 감옥 독방생활에서 通房의 기쁨이 얼마나 컸나를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며칠 전 보훈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相通하지 못하고 겨우 눈동자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함께 나누어 그것을 증가시키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 그것을 축소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눈물 흘려 용기 주고, 함께 웃고 기뻐하며 행복을 나누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한이 많았던 당시 인간들, 죄인, 쌍것, 여성, 어린이, 이방인 등과 상통하면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온전함을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당시 위선자들로부터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시면서 항상 희망의 커뮤니케이션(相通)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된 친구이십니다.
둘째로, 친구는 참으로 편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 앞에 가면 폭풍같이 분노했던 격정이 조용하게 가라앉게 되고 코브라 뱀처럼 독기를 품었던 강팍해진 마음이 비둘기처럼 유순해 집니다. 괴로울 때 만나면 힘이 생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런 친구로 본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친구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로 읽어도 좋습니다. 주님은 친구이시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란 자기 약점까지 서슴없이 고백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마음이 더 편해지지요. 우리가 주님께 기도 드리는 것도 우리의 잘못을 주님께 고백하는 행위일진데, 그런 기도는 우리에게 안정과 평안과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주님은 참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감옥은 마귀와 함께 하는 궁전보다 더 행복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친구와는 정말 동등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겉으로 높낮이가 다르다해도 친구가 되면 동등해집니다. 서로를 투명하게 보고, 바른 말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끼리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눈치보는 관계는 불평등하고 불편한 관계입니다. 참된 공동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눈치보는 사람은 비굴하게 낮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무 돈이 많아, 너무 지위가 높아, 너무 지식이 많아 친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스스로 낮고 천한 인간과 동등해지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우리 친구이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넷째로 친구란 항상 가까이 있는 흐뭇한 존재입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공간적 거리를 없애주는 사랑이라는 묘약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친구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 속에 살아 계십니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는 흐뭇한 존재가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사셨던 분이었으나 지금 여기서 그 분의 現存을 우리는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 넘어 항상 우리 곁에 계셔 힘과 꿈과 용기와 건강을 주시는 우리 친구가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5:12-15)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친구 되는 것이 큰 기쁨이라면 주님의 친구 되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주님의 친구가 되는 영광을 얻는 비결은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면 내 친구가 된다"가 아니라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면 내 친구가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직접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친구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공동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불구하고의 사랑을 합시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은 저희들에게 "너희들은 내 친구다"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친구가 없어지는 이 적막한 세상에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주님이 내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세상에 참 친구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친구들의 모임 아니겠습니까? 친구 되신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이 교회를 사랑하기에 주님이 우리의 친구 되심을 감사 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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