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기독자의 자유

마태복음 우정원............... 조회 수 2214 추천 수 0 2007.12.18 20:16:04
.........
성경본문 : 마4:1-11 
설교자 : 우정원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기독자의 자유

마4:1-11


제가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죄인이라는 생각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다만 새길공동체가 평신도교회라는 데서 용기를 얻고 저의 소박한 신앙고백의 기회로 생각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의 간단한 신앙편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총에 대한 저 나름의 감격과 깨달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 영향이 막대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의 소개로 영어 성서공부 모임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72년 유신 선포 하에서 독재의 틀을 굳히는데 막바지 기를 쓰고 있을 때 경북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서 상당히 의식화된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어린 시절 6.25때 북한에서 월남해 오신 분으로, 당시 영어교사가 되시기 전 젊은 시절 강원도 탄광촌에 가서 광부생활도 하시고, 결핵을 앓으시다 거의 죽을 고비도 넘기신 분이었는데 성서를 알게 된 후로는 매우 현실 참여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분이었습니다. 당시 입시지옥의 비교육성을 보시고, 고등하교 학생들에게 영어성서와 타임지 등을 통해 영어공부를 시켜준다는 빌미 아래 사회문제, 정치문제 등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때로는 영어 독해 공부도 함께 했으므로 저 자신은 영어공부에 더 흥미를 가지고 매주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대구지역의 대학생 및 청년들 중심으로 본격적인 성서공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 영어선생님은 이 성서공부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 모임을 이끄시는 분은 40대 후반, 지금은 칠순이신 김목사님이셨는데 대구 동산병원 원목실장으로 계셨고, 그 곳에 오시기 전에는 대구의 빈민촌인 비산동에서 약 25년간 목회활동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성서공부 모임의 성격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영어 선생님의 소개로 김목사님이 가르치시는 성서모임의 고등부에 나가게 되면서 성서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쉽게 번역된 영어성서 TEV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모였던 것 같고 한번 모임에 쉽게 두 세시간씩 공부하는 맹훈련이었습니다. 학교공부를 마치고 성서모임에 가서는 때로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면서 밤 10시 가깝도록 성서공부를 한 기억이 납니다. 마가복음서부터 배운 기억이 나고 후에 바울서신도 공부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김목사님은 물론 그 분의 삶에 새겨진 신앙의 바탕이 가장 주가 되었지만, 칼 바르뜨 신학에 바탕한 변증법적 신학의 내용을 강조하신 것 같았습니다. 한 번은 일주일을 잡아서 매일 저녁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 들은 말씀은 그 후 근 20여년 동안 저의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란 happy, 즉 happen to be, 어쩌다가 생기는 일회성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복, 즉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 특히 상산수훈 팔복의 첫 번째 복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라는 구절을 설명하실 때, 우리가 가치를 두는 명예나 지위나 권력이나 금력이 이 말씀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지는 지,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큰 괄호로 묶여져 있으며, 그 괄호 안에서 어쩌다가 주어진 행복의 크기를 아무리 크게 하더라도 그 괄호를 풀어버리면 마이너스의 크기가 커질 뿐이라는 비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처절한 가난을 의미하며 마음을 그 정도로 가난하게 할 때만 하나님에 대한 희구, 바램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는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심적 평온이나 교양적 겉치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실존적인 울음과 외침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등학생의 수준에서는 조금 난해했지만 바울서신 가운데 가장 짧은 서신인 빌레몬서를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철없이 삶의 아름다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등을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고등학생의 가슴에 산상수훈에 대한 공부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 인간의 깊은 죄성 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근 2년에 걸친 성서공부는 저로 하여금 기독교에 눈을 뜨게 하였고, 고 3이 되어서는 입시공부 때문에 주일날 설교에만 참석하곤 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크게 바뀐 생활로 인해 성실하게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을 거의 마쳐가면서 도대체 대학교에 와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75년도에 대학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이 그렇게 치열한 것을 처음으로 보았으며, 그것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입학해서 한 달이 지나자마자 학교에선 데모가 벌어졌고, 다음날 등교를 하면 아스팔트에 남아 붙은 최루 액이 그대로 냄새를 풍겨서 눈물을 흘리며 관악산을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4월 중순에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게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뉴스를 통해 복교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곤 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에 진학하면서 고등학교 때 함께 성서공부를 했던 여러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대로 우리의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경제학과, 정치학과, 외교학과에 다니던 친구 셋과 이야기가 되어 봉천동에 2층 단칸방을 얻어 공동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취지는 함께 독서도 하며 성서공부도 하고, 기독교적 공동체를 실현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단칸방 벽에다 성서의 구절을 붙여두고, 4명이서 식사당번과 빨래당번을 정해 놓고 매일 저녁 성서 읽기, 기도 등의 규칙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달에 한 권 정도씩으로 책을 정해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읽고 함께 토론한 많은 책들은 우리의 젊은 가슴을 감동시켰고, 우리의 신앙과 사고를 굳혀주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본회퍼의 Nachfolge,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칼 바르뜨의 로마서 강해 같은 책은 지금도 그 때의 감동이 남을 만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서울에서 일정한 교회를 찾지 못했던 우리들은 명동의 향린교회, 장충동의 경동교회, 박형규목사의 제일교회, 당시 압구정동에 막 문을 연 소망교회 등을 배회하며 기존 교회의 부패상을 비난하기도 하고, 또 너무 현실참여적인 교회의 신앙결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정치학과에 다니던 친구가 야학학생들을 소개해 와서 봉천동의 봉제공장에 다니던 국졸 여공들에게 국어도 가르치고, 마가복음을 함께 읽은 기억도 납니다. 지금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시 야학학생들이 하나같이 시력이 나쁘면서도 안경을 낄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양 부족에다가 봉제공장 노동조건이 형편없는 탓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계획대로 공동체 생활이 잘 계속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봉천동 단칸방의 계약이 끝나 대학교 3학년에 와서는 신림동 산 중턱에 다시 방을 얻어 공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 때 본격적으로 읽은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었습니다. 특히 오늘 봉독 해드린 마태복음의 구절은 당시 얄팍하게 가졌던 나름대로의 기독교 신앙에 어떤 의미에서는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는 제 신앙의 선배로서 가장 크게 손꼽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1821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불란서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는 사회혁명운동에 가담했는데 결국 페트리쉽스키 사건에 휘말려 28세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수들이 줄지어 앉아 총살형을 당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짜르의 특명으로 사형이 중지되었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동료 혁명운동가의 한 부인이, 유배지로 떠나는 열차에 던져준 신약성서를 처음 받아 쥐고는, 4년에 걸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신약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된 작가입니다. 그 때 받은 충격으로 인해 평생동안 간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8년 6월에 시작하여 59세의 나이로 죽기 석달 전인 1880년 10월에 완성함)은 그의 장편소설(죄와 벌, 백치, 악령이 있음) 가운데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심각하게 다룬 소설로서, 거기에는 표또르 카라마조프의 네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합니다. 지주이며 술주정뱅이인 아버지 표또르와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재산과 여자를 두고 서로 다투는 사건을 다루는데,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가 무신론자인 이반의 교주 하에 아버지 표또르를 살해하나,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누명을 쓰고 옥으로 가는 것이 소설의 큰 줄거리이며, 그 주제는 크게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성과 구원의 문제로, 기독교의 핵심을 꿰뚫는 논쟁입니다.


드미트리는 인간의 몸, 이반은 인간의 마음, 알료샤는 인간의 영혼을 나타낸다고도 하고, 또는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낙후성과 집단성, 이반은 서구 유럽의 이성주의, 알료샤는 러시아의 기독교적 전통인 러시아 정교를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알료샤는 소설 속의 조시마 장로의 수제자로서 문자 그대로 천진하며 전혀 악에 물들지 않은 선한 인간을 나타내고, 이반은 종교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 비굴함을 알고 칼 막스의 말처럼 종교는 아편이라는 생각에 젖은 무신론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성서구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반이 일년여 전에 쓴 시라며 알료사에게 들려주는데, 옛날 16세기경 시대를 무대로 하여 쓰여진 이야기라면서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리라고 약속한지 1,500년 지난 후 그리스도가 등장하는데 그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다만 나타났다가 지나갈 따름이었다. 무한한 자비 가운데 죄에 물들어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단지 잠깐 동안만 이 땅에 내려오기로 하였다. 장소는 스페인 세빌이고, 종교재판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며 극심하게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할 때였다. 물론 이것은 세상이 끝날 때 구름을 타고 하늘의 영광으로 재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 법관, 기사 추기경 그리고 세빌의 모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심문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의 위대한 사역의 하나로 약 100명의 이단자들을 한꺼번에 화형에 처한 바로 다음날, 그리스도는 조용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신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무한한 자비의 웃음을 띠면서 그들 사이를 지나갔는데 사랑의 태양이 그의 가슴에서 빛나고, 능력의 빛살이 그의 눈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축복하고, 그의 옷자락을 건드리기만 해도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며, 소경의 눈이 뜨임을 받으며, 어린이들이 그리스도가 가는 길에 꽃을 뿌리고, '호산나'하며 노래를 부른다. 죽은 소녀의 관 앞에서 '달리타쿰'이라고 말하여 죽은 소녀를 일으켜 세우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때 조그만 소동이 일어난다. 대심문관이 성당 앞의 네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거의 90세에 가까우며, 메마른 얼굴에 깊이 패인 눈에서 불꽃처럼 빛이 나며 큰 키에 마른 모습으로 오래된 수도승의 검은 색 성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엄숙한 얼굴을 한 그의 보좌관들과 노예들 그리고 그의 '거룩한' 호위병들이 따르고 있었다. 군중들의 모습에 그는 멈추고, 멀리서 죽은 소녀의 관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지는 것, 소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손가락을 내밀어 호위병들에게 그리스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의 능력은 대단해서 사람들은 잘 길들여져 있었고, 복종적이며, 두려워 떨며, 그의 뜻에 따라 호위병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죽음과 같은 정적 가운데 그리스도를 잡아서 호위병에게 건네주었다. 군중들은 하나같이 곧바로 이 늙은 대심문관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대심문관은 그들에게 조용히 축복을 내려주고는 계속 걸어갔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오자 대심문관은 램프를 들고 감옥의 철문을 열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에게 다가가서는 물었다:


정말 당신이오? 도대체 왜 당신은 우리를 간섭하러 왔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소. 당신이 바로 그이든 아니든, 나는 알 바가 없소. 하지만 내일 나는 당신을 판결에 붙일 것이고, 이단자 가운데 최악의 이단자로 화형에 처할 것이오. 그는 계속 말한다: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교황에게 넘겨졌소. 우리에게 묶고 풀어줄 권리를 주어서 이제 모든 것은 교황의 손에 달려 있고, 지금 당신이 올 필요는 없소.


이 늙은이는 그에게 묻고는 또 스스로 답을 하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니, 당신은 권리가 없소. 당신이 이 땅에 있을 때 그렇게 강렬하게 주장했던 자유를 사람들에게서 빼앗지 마시오. 오늘날 사람들은 완전히 자유롭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 발 아래에 겸손히 내려놓았소. 그따위 자유를 당신이 바라던 것이오? 악마가 광야에서 던진 세 가지 질문의 깊이와 힘을 이 땅의 모든 지혜를 다 긁어모으더라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소? 그 세 가지 질문은 그후의 인간의 모든 역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오. 돌덩이로 떡이 되게 하라. 그러나 복종을 빵으로 살 수 있다면, 이게 도대체 어떤 자유란 말인가? 당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 악마의 제의를 거부했으나, 몇 천년이 지난 뒤 인간은 그들의 입으로 외칠 것이오. 범죄는 없고, 죄도 없으며 오로지 굶주린 인간만 있다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 어떤 경제학적 논리를 통해서도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들은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 내려놓으면서, '당신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한 우리는 노예로 있어도 좋소!'라고 외칠 것이오. 만일 하늘의 빵을 위하여 몇만 명이 당신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빵을 위하여 지상의 빵을 포기할 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 나머지 몇백만명, 아니 몇억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연약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은 사람들은 위대하고 강인한 사람들에게 봉사해야만 하는가요? 우리에게는 연약한 사람들도 중요하오. 그들의 주인이 되어 자유를 내어준 그들을 다스리기로 우리가 동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신으로 여길 것이요. 인간은 자유로운 한 숭배하고 섬길 어떤 사람을 가능한 한 빨리 찾고자하는 고통스러운 불안을 항상 갖고 있지. 모든 인간이 공동으로 숭배할 수 있는, 모두가 집단적으로 숭배해야 할 절대적인 것을 찾는 것이지. 인간의 양심을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그의 자유를 얻어낼 수 있소. 빵만큼 명백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빵을 주라, 그들이 당신을 섬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사람이 인간의 양심을 소유하면, 그는 당신의 빵을 내어 던지고 그의 양심을 낚아 챈 사람을 따라 갈 것이오. 양심의 자유보다 더 유혹적인 것은 없지만 동시에 그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오. 인간이 당신에게 자유롭게 끌리고, 붙잡히도록 당신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그들에게 요구했소. 옛날의 확고한 율법 대신에 오로지 당신의 모형만 그들 앞에 길잡이로 두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여야 했소. 그러나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의 양심을 영원히 정복하고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세 가지 힘뿐이라오. 바로 기적, 신비, 그리고 권위지. 그런데 당신은 인간들이 당신을 본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있고, 기적을 요구하지 않기를 바랬소. 그러나 인간이 찾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적이므로 인간이 기적을 저버리는 순간 하나님을 저버리라는 것을 몰랐소? 인간은 기적 없이 살아갈 수 없으므로, 그 스스로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이오. 당신은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어. 그들은 본성상 반역자이지만 동시에 노예들이거든. 인간은 연약하고 비열하오. 그들은 성전을 허물고 땅을 피로 물들일 것이오. 그들은 절망 가운데 이야기할 것이며, 그들이 내뱉는 말은 신성모독이고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불행해질 것이오. 우리가 겸허하게 인간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사랑스럽게 그들의 짐을 덜어주고, 그들의 모든 죄가 우리의 허락을 받는 한 속죄 받는다고 말할 것이며,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우리가 떠맡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오.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려야하는 무서운 고통과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에 그들은 즐거이 우리의 결정을 따를 것이요. 이러한 신비를 지키는 우리, 우리만 불행할 것이요. 평화롭게 그들은 죽어가고, 무덤을 넘어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요.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이제 당신 앞에 서서 이야기 할 것이요. 당신이 할 수 있다면, 감히 그럴 수 있다면 우리를 정죄하시오.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소. 악마가 당신에게 지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준 다음 당신에게 제안했던 마지막 선물, 그것을 그에게서 얻어내었소. 당신은 선택된 자들을 자랑할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그 선택된 자들 가운데서도 도대체 몇이 당신을 기다리는 데 지쳐서, 그들의 영의 힘과 마음의 열정을 다른 곳에 바치고 결국 당신에게 반대하고 자유의 깃발을 들 것인지 아시오? 우리에게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그들은 서로 항거하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오. 그들의 자유를 우리에게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할 때만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것이오. 당신의 자유가 결국에는 무시무시한 노예성과 혼동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동의할 것이오. 우리 손에서 빵을 받으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만든 빵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고 그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우리의 왕국은 세워질 것이오. 다시 반복컨대, 내일 내가 조그만 손짓만 하면 복종하는 무리들이 당신을 화형에 처하는 불길에 석탄을 던지는 것을 당신은 볼 것이요.


 대심문관이 이야기를 끝내고 죄수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죄수는 시종 대심문관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죄수는 갑자기 대심문관의 핏기 없는 늙은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그 늙은이는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감옥 문을 열어 젖히고는 외쳤다.


'가시오, 이제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마시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동시대성이라는 기독교의 중요한 점을 이용하여 자유의 문제를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며, 눈먼자를 뜨게 하고, 사로잡힌 자를 풀어놓으며, 인간의 모습으로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 사건이 이 시대와 동떨어진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곳 이때에 현현히 존재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과 배반의 힘 가운데 바벨탑을 쌓아 가는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시간 가운데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총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바로 기독자의 신앙의 올바른 책임입니다. 이러한 응답은 궁극적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자유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이성적인 노력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알려집니다. 피조성과 죄성에 깊이 물든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내기 보다는 성서에서 고발된 인간의 모습,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면서도 빛을 희구하는 나약함, 비겁함, "아담아,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떳떳이 대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성서의 계시에 바탕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경직화된, 하나의 오점도 없는 경전이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이 눈물과 절규와 외침으로 주어진 역사와 개인의 체험 가운데서 기록한 살아서 생동하는 글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 에레미아든지, 밧모섬에 갇혀서 다가올 미래의 기대에서 쓴 요한의 계시록은 그 자체를 추상화하여 해석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고통과 어려움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며 살아간 용기에 대해 우리는 깊이 침잠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서는 본문(text)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 현재 개인의 삶과 역사 한 가운데서 문맥(context)적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함께 던질 때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죄와 속죄라는 두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의 궤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공허한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간성 가운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 가운데 체험되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는 바울의 기도와 같이, 죄의 씻기움을 통한 거듭난 삶이 없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독선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최대의 우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거부하며 이생의 즐거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유일한 가치로 삼는 인간의 모습, 대낮의 밝은 태양 아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모습만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이라는 직접성의 한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 자연과 인간과 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제3인칭으로만 부르지, 나와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르며 진정한 상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 결국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바울의 말처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 존재의 심연에 항상 끌고 다니는 죄성의 인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갈릴리 해변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누더기를 걸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비울대로 비운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모든 고난과 수치를 그대로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벗고 사죄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자의 책임을 다하는 용기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는 인간은 이웃과 역사 앞에서 예언자적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개인의 삶에 이루어 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섣불리 사회운동에 휩싸여 열렬한 운동가가 되었다가 결국 인간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에 실망하고 거의 폐인에 가까운 삶을 지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근거하고 있으며,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끌어내리려는 무모한 바벨탑 쌓기가 아닐까요? 또한 예언자의 삶은 기도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역사의 모든 사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현실을 안은 채로 아직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청산하지 못한 채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변방에 놓여 있는 현실을 기독교인인 우리는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도 언론의 봉쇄와 탄압은 계속되고, 정치가들의 이기주의가 민주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폐쇄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새삼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러한 신앙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역사 참여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합니다. 그것은 원시교회가 어떠했는가를 돌이켜 살핌으로써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 온 지 100여년이 되었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에 바탕한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근본주의에 뿌리박고 있는 이러한 신학이 한국의 유교적 전통, 샤머니즘적인 풍토와 혼합하여 종교적 신크레티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이러한 왜곡되고 때묻은 교회의 모습을 원시교회의 원형으로 되돌리는 데 있습니다. 종말론적 역사 참여는 본회퍼의 고백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기도의 공동체로써 출발해야 하며, 시간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실에 십자가의 속죄의 은총에 응답하는 실존으로 먼저 설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웃과 역사 앞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하여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72 마태복음 주기도문 강해(1) 마6:9-13  강종수 목사  2008-01-27 1590
71 마태복음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마18:23-35  길희성 형제  2008-01-21 2080
70 마태복음 고백하는 신앙 마10:28-32  강종수 목사  2008-01-13 1829
69 마태복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5-49  소재열 목사  2007-12-22 2137
68 마태복음 인자, 그 영광의 재림과 심판 마25:31-46  소재열 목사  2007-12-22 2196
67 마태복음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한 천국 복음 마20:1-16  소재열 목사  2007-12-22 3771
66 마태복음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예수님 마18:15-20  소재열 목사  2007-12-22 2139
65 마태복음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 마14:22-33  소재열 목사  2007-12-22 998
64 마태복음 예수님의 하신 일 마9:35  소재열 목사  2007-12-22 2175
63 마태복음 백부장을 구원하신 예수님 마8:5-13  소재열 목사  2007-12-22 2239
62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와 권위 마5:1-11  소재열 목사  2007-12-22 1906
61 마태복음 예언 성취자로 오신 그 그리스도 마2:1-12  소재열 목사  2007-12-22 2028
60 마태복음 멍에를 함께 메고 마11:28-30  현요한 목사  2007-12-20 6635
59 마태복음 기억을 함께 나누는 공동 마26:6-13  서창원 목사  2007-12-19 1960
58 마태복음 위험한 만남 마19:16-26  길희성 형제  2007-12-19 1746
57 마태복음 불행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아픔: 삼풍의 교훈 마7:21-23  한완상 형제  2007-12-18 1944
56 마태복음 무너지지 않는 집 마7:24-29  길희성 형제  2007-12-18 2193
55 마태복음 예수사건②:여우와 새보다 더 고독하셨던 예수님 마8:18-20  한완상 형제  2007-12-18 1961
» 마태복음 기독자의 자유 마4:1-11  우정원 목사  2007-12-18 2214
53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50
52 마태복음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마25:31-46  하버트 신부  2007-12-12 2601
51 마태복음 忍從의 성자 요셉: 크리스마스에 잊혀진 성자 마1:18-25  한완상 형제  2007-12-09 2144
50 마태복음 무엇보다 먼저 추구할 것 마7:25-34  한완상 형제  2007-11-29 2150
49 마태복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의 복 마3:18  한완상 형제  2007-11-27 1726
48 마태복음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자 마6:11-18  한태완 목사  2007-11-26 3113
47 마태복음 비판하지 말라 마7:1-6  한태완 목사  2007-11-26 2741
46 마태복음 그녀(여인)을 기억하라 마14:3-9  최만자 자매  2007-11-22 1955
45 마태복음 우리 친구 예수님 마11:18-19  한완상 형제  2007-11-22 2137
44 마태복음 예수님의 개혁비전 마5:1-12  한완상 형제  2007-11-20 2090
43 마태복음 생명의 소중함 마16:26  한태완 목사  2007-11-18 2348
42 마태복음 교회 공동체의 기초 마18:21-35  길희성 형제  2005-09-19 3011
41 마태복음 선의 결여(privatio boni) 마5:43-48  권진관 형제  2005-05-28 2622
40 마태복음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예수관 마11:25-30  정양모 신부  2005-02-16 2847
39 마태복음 새, 여우보다 더 외로운 예수 마8:21  한완상 형제  2004-10-13 2604
38 마태복음 예수 없는 기독교-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마6:25-32  한완상 형제  2004-03-11 2588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