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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는 집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2231 추천 수 0 2007.12.18 2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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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24-29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경악, 충격, 분노, 울분, 원망, 저주, 원통, 비탄, 악몽, 사투, 실의, 절망, 공포, 불안... 우리는 지난 한두 주간 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니, 이러한 극단적인 단어로도 결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지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사고나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인재,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었던 재난이었다는 데서 우리 모두는 너무나 안타까워했으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거짓, 부실, 엉터리, 속이기, 눈가림, 뇌물, 봐주기, 무책임, 무관심, 탐욕, 뻔뻔스러움...이러한 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는 어리석게도 이제야 그것을 조금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성수대교의 붕괴를 보고도 교훈을 받지 못한 민족이 과연 이번에는 정말로 무언가 깨달았을지 아직도 회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번에야말로 대오각성해서 우리 사회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 위에 세워질 수 있다면 이번에 무참하게 간 무고한 생명들은 이 시대 이 민족을 위한 순교자들일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 무엇이 와르르 붕괴될 지 모르는 붕괴공포증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건물들만 그렇게 부실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는 어떠합니까? 지난번 선거가 보여주듯, 정치도 붕괴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선거 후유증으로 민자당이 붕괴될지도 모른다, 민주당도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대두하고 있으며, 그런가 하면 엉뚱하게도 군사독재의 원조 유신 본당이 기세등등 재기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민주와 반민주, 선과 악의 구별이 도무지 흐려지고 지역감정이라는 가장 원시적 본능만이 정치를 움직이는 실세로 등장하게 되어 마치 역사가 거꾸로 흘러 삼국시대 말기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후3김 시대라는 신 유행어조차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실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우리 정치에서도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대로 개혁도 많이 했고 권력의 분권화도 이번 선거를 통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니 그만하면 만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정치란 게 어차피 상대적인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정치가들이 하는 얘기이며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지, 결코 교회의 신앙적 시각에서 할 말은 못 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정치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이어야 하며, 어디까지나 도덕적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은 정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탈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도둑정치요 폭압정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더불어 우리는 한 시대, 한 사회의 붕괴를 목격하는 셈이며, 이 붕괴가 당분간은 괴롭겠지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키는 해산을 위한 산고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는 무엇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고 새로운 정치를 펴나가야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붕괴의 근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건물의 붕괴는 단순히 건물의 붕괴가 아니며, 정치의 붕괴도 단순히 정치의 붕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기술의 붕괴가 아니며, 법률이나 조직이나 제도의 붕괴가 아니라,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근본적 토대인 도덕의 붕괴이며 거짓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 위에서는 아무 것도 설 수 없다는 것, 인생의 본질적 기반 자체가 정직과 진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의식적이든 아니든, 한국사회에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어디서든 산다는 것 자체가 죄악을 먹고 마시는 일이요 항시 허위와 거짓의 게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부정부패, 거짓과 사기, 편법과 탈법 등 죄악에 면역이 되 있는 나라는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자조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이라는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보아도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그 나름대로 또 다른 종류의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국제관계나 세계로 눈을 돌려보아도 역시 거짓과 탐욕과 착취와 전쟁의 현장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이 짓는 죄악을 보면 세상이 붕괴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은 붕괴 안 되고, 곧 망할 것 같은데 망하지 않고 굴러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의 선하심과 신실하심, 그의 진리가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떠받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짓을 행해도 하나님과 자연세계는 거짓이 없으며, 인간이 지은 집은 붕괴해도 하나님의 지으신 집은 붕괴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붕괴란 것은 없습니다. 생성과 변화와 소멸은 있으나 붕괴는 없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건물이 붕괴되어도 우리는 천재지변 자체를 붕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붕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형성물에만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지은 건축물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수명이 다하면 우리 손으로 허물어 버립니다. 이것을 우리는 붕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은 세계에 변화는 있어도 붕괴라는 것은 없다는 것, 이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연적 은총입니다. 유독 인간만이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 법칙인 정직을 어김으로써 붕괴라는 현상을 자초합니다. 물론 이 붕괴는 정직이라는 도덕법칙을 어기고 건축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물리적 법칙을 무시한 결과로 일어나는 자연적이고 당연한 결과입니다. 인생에는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인생의 도덕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와 인생의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세우신 공평무사한 법칙입니다. 그것을 우리 선조들은 천리, 천도, 천명이라고 말했고 서양 중세의 사상가들은 자연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바로 이 절대불변의 법칙, 우주와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질서를 기독교에서는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며 그의 말씀인 로고스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말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기심으로 왜곡되어 있고 탐욕으로 물들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공평무사하고 모두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은 간사하고 때에 따라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의 말씀, 로고스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바로 이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 '집 짓는 자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이 말씀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서 인생을 집 짓는 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어서 모래 위에다 집을 지어 당장은 번듯하게 보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들이닥치면 무너져버리나, 슬기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 비바람과 홍수가 휘몰아쳐도 꿈쩍도 하지 않게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집 짓는 일에 비견 할만합니다. 10대 청소년기가 꿈을 키우면서 인생을 설계하는 기간과 같다면, 20대는 교육과 사회경험을 통해 꿈을 이루기 위한 토대를 다지고 기초공사를 하는 기간이며, 30대는 부지런히 짓는 기간이며, 40대는 완성을 해야 하는 기간, 그리고 5,60대는 인생의 원숙기로서 지은 집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기간입니다. 물론 각자가 짓는 집은 모양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며 크기도 다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색깔과 스타일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이 획일성 아닙니까? 각자의 소질과 개성을 살려 독특한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다 똑같은 집을 짓도록 훈련하고 강요하는 잘못된 교육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각자 자기의 독특한 집을 지어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자기가 시작한 집을 완성하고 죽어야 하며, 집을 짓되 무너지지는 않는 집, 그것도 자기만 쓸 것이 아니라 후대에 물려서 쓸만한 유익하고 견고한 집을 짓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꿈은 어디까지나 이상이고 현실은 이와 다를 수 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기초공사를 잘못하여 중간에 붕괴되는 집을 짓기도 하고, 기초공사는 잘 했는데 집을 짓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안 되는 사람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다 잘 되다가 갑자기 늦바람이 불어 인생의 막판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보다 좀 늦게 집짓기를 시작하는 늦깎이 인생도 있으며, 아예 자기 집이라는 걸 지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비극적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번 참사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가운데 누구의 죽음인들 억울하지 않으리요 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역시 피지도 못하고 진 꽃봉오리들, 인생의 집을 지어보지도 못하고 허물어진 젊은 생명들일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인생을 집 짓는데 비유하셨을 뿐 아니라, 인생 집짓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대를 잘 놓는 기초공사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집의 다른 부분은 좀 잘 못 되어도 어느 정도 고치고 보완이 가능하나 기초란 것은 한 번 잘못 놓으면 집을 허물고 다시 짓기 전에는 고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의 참사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삼풍이란 건물은 기초공사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쓰레기 매립 터였든 곳을 얼마나 잘 다졌는지는 몰라도 설계를 몇 번이나 바꾸어 가면서 그 위에 날림으로 공사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확장을 하느니 증축을 하느니 하면서 하중을 더했으니, 안 무너지는 것이 되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집이란 비교적 간단하여 설계라는 것도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토대와 터에 말씀의 초점을 맞추셨지만, 오늘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설계를 토대 못지 않게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집 짓는 일을 눈에 보이듯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잘 아시는 대로 매우 메마른 사막지대와 같은 곳이기에 집을 지으려면 우선 터부터 잘 잡아야 합니다. 모래가 많은 곳에 집을 지으면 지을 때는 문제없는 듯 보이지만 비바람 치고 홍수가 나면 바닥부터 침식되면서 그 위의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단단한 반석이 떠받치고 있는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아무리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닥쳐와도 끄떡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생의 집에 있어서 반석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세 번째 교훈은 이것을 말해 줍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새겨 볼만한 말씀입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이 인생 건축물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지으시고 우리 인생을 내신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들 인생의 튼튼한 반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내신 분만이 우리 인생에 참으로 선한 것,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입법자가 되시며 설계자가 되신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약적, 성서적 개념이며 예수께서도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설계자는 오직 인생을 내신 하나님 자신뿐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선을 추구하는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육체적 감각과 욕망에 따라 사는 길과, 이성에 의거하여 무엇이 우리 삶에 유익하고 좋은 길인지를 생각해서 결정하는 길입니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육체적 본능과 감각이 삶의 길잡이가 되며 그것이 명하는 대로 우리도 살아갑니다. 결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고 생존에 필요한 것이며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망과 감각만을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생의 참 선을 올바로 다 찾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참 선을 위해서는 욕망과 감각을 자제하고 초월하여 인간만의 특성인 이성이라는 것을 믿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야 합니다. 이성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설계도, 그의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 우주와 인생의 어길 수 없는 법칙을 어느 정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성적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를 속이기도 하고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에 의해 왜곡되기도 합니다. 이성이란 그렇게 공평하거나 순수하거나 보편적인 것이 못됩니다. 만약 감각적 욕망과 이성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는 어디까지나 초감각적이고 초이성적인 진리를 말해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계시된 진리,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씀만이 인생의 참다운 법이 되고 설계도가 되고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 인간의 생각, 인간의 말이 토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토대와 설계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이성은 이 주어진 것에 대한 탐구요 응답은 될지언정 토대와 설계 자체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우선 설계도가 있고 집 지을 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모래냐 반석이냐는 이미 주어진 것이며, 우리에게는 여기서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설계와 토대로 잡느냐 아니면 나의 감각, 나의 지성, 나의 지혜, 나의 꽤, 나의 생각과 판단에 나의 인생을 맡길 것이냐는 참으로 중대한 선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일단 설계도이자 토대로 삼는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지성, 우리의 지혜로써 그 설계도를 깊이 연구하기도 하며, 이성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생의 안내자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와 토대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 자체가 주어진 것이지 내가 나의 뜻대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작과 기초만은 말씀의 육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과신한 나머지 이성의 오만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의 잣대로 저울질하려고 하나 이것은 결코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을 가야 신앙의 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성이 계시, 즉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올바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적 태도입니다. "알기 위하여 믿는다는" 교부 안셀무스의 말 - 알아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 은 모순적인 듯 하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나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생의 기초로 삼는 결단과 순종의 행위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개념은 말씀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개념입니다. 성서 종교는 듣는 종교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먼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며, 이 누군가는 바로 인생을 내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말씀으로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그 분의 말씀, 그것이 태초부터 먼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음을 받은 자들이기에 누구든 먼저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성과 로고스를 부여받고 태어났으며, 언어를 구사하는 만물의 영장임에 틀림없지만, 우리의 말, 우리의 로고스는 먼저 영원한 로고스를 듣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내가 먼저 이니시어티브를 취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것이며, 겸손이며 순종입니다. 그것은 곧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오만한 자, 미련한 자는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씀을 전하고 듣고 믿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믿음을 의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로마서 10: 14-17).
다음으로, 듣기만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으며,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것은 거짓 선택입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누누이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셨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고, 오늘 말씀에서는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서 종교는 결코 고요한 묵상을 즐기는 명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을 위한 것이며, 참으로 들은 자는 행함이 있을 것입니다. 들음으로써 순종하는 자는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 당시부터 지금 우리들처럼 건성 듣기만 하고 삶과 행동은 따로 노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마태 7:21-23).
요약컨대,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는 자기 인생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저쪽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귀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반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붕괴의 불안과 공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우리가 출입하는 건물들의 붕괴만이 아니라 우리 건강의 붕괴,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 자체가 어느 순간에라도 붕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며, 또 언젠가는 무너질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이 먹고 녹이 쓸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가져가는 것이 우리들이 지은 집이요 우리들이 쌓아놓은 재물이라고 예수께서는 경고하십니다(마태 6:19-21). 자기가 모은 재산은 언젠가는 결국 남의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기에, 재물을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소유로 인생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미련함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반석이요 토대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 어떻게 붕괴될지 모르는 인생이 불안해서 단단히 잠금장치를 마련하느라 분주하고, 안전을 확보하느라 온갖 묘안을 다 짜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안전장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이 주는 안전은 결국에 가서는 허상이요 거짓안전임을 깨달을 날이 오고야 맙니다. 우리가 갈 때는 돈이나 권력은 두고 가야하며 가족이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친구가 동행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독한 단독자로 홀로 떠나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안전불감증에 걸렸다고들 말합니다. 저마다 빨리 가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난폭하게 거리를 질주하고 다니면서도 자기만은 안전할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들인데 누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병은 '인생안전불감증'에 걸려 무너질 인생의 집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혼자 영원히 잘먹고 잘 살줄 크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안전한 것이 못 되고 무너지기 쉽고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상고 올리기에 급급했던 삼풍의 경영진, 그들의 인생은 지금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큰 사고가 나서야 인생이 연약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아니, 결국 죽음이 코앞에 임박해서야 자기 인생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이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허망한 꿈을 좇아 짓는 우리의 인생 집짓기는 몽땅 부실공사가 되어 짓는 도중에 무너지든지 아니면 다 지었다고 만족해하는 순간 와르르 송두리째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진리에 따라, 말씀에 따라 사는 삶에는 붕괴란 없습니다. 오직 소멸만이 있을 뿐이며 이 소멸은 오히려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비록 불의의 참변을 당해서 육신이 붕괴된다 하여도 그의 인생 자체는 붕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는 길은 오직 영원한 로고스, 말씀 그 자체이시며 우주와 인생을 떠받치는 진리의 화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함을 토대로 하여 집을 짓는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시편 127:1-2). 그리고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을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의탁하고 사는 지상의 건물도 무너지지 않게 지을 수 있는 법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폐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은 국민 각자가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각종 사회 제도들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총체적 부정부패로 인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는 이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새로이 거듭나는 길 외에는 살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은 계속 붕괴 될 것이고 정치는 계속 표류할 것이며 나라 전체는 거대한 부실기업체로 혹은 부실 건물로 화하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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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마태복음 백부장을 구원하신 예수님 마8:5-13  소재열 목사  2007-12-22 2278
62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와 권위 마5:1-11  소재열 목사  2007-12-22 1925
61 마태복음 예언 성취자로 오신 그 그리스도 마2:1-12  소재열 목사  2007-12-22 2055
60 마태복음 멍에를 함께 메고 마11:28-30  현요한 목사  2007-12-20 6674
59 마태복음 기억을 함께 나누는 공동 마26:6-13  서창원 목사  2007-12-19 1981
58 마태복음 위험한 만남 마19:16-26  길희성 형제  2007-12-19 1768
57 마태복음 불행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아픔: 삼풍의 교훈 마7:21-23  한완상 형제  2007-12-18 1959
» 마태복음 무너지지 않는 집 마7:24-29  길희성 형제  2007-12-18 2231
55 마태복음 예수사건②:여우와 새보다 더 고독하셨던 예수님 마8:18-20  한완상 형제  2007-12-18 1977
54 마태복음 기독자의 자유 마4:1-11  우정원 목사  2007-12-18 2238
53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88
52 마태복음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마25:31-46  하버트 신부  2007-12-12 2627
51 마태복음 忍從의 성자 요셉: 크리스마스에 잊혀진 성자 마1:18-25  한완상 형제  2007-12-09 2159
50 마태복음 무엇보다 먼저 추구할 것 마7:25-34  한완상 형제  2007-11-29 2167
49 마태복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의 복 마3:18  한완상 형제  2007-11-27 1746
48 마태복음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자 마6:11-18  한태완 목사  2007-11-26 3182
47 마태복음 비판하지 말라 마7:1-6  한태완 목사  2007-11-26 2783
46 마태복음 그녀(여인)을 기억하라 마14:3-9  최만자 자매  2007-11-22 1972
45 마태복음 우리 친구 예수님 마11:18-19  한완상 형제  2007-11-22 2146
44 마태복음 예수님의 개혁비전 마5:1-12  한완상 형제  2007-11-20 2102
43 마태복음 생명의 소중함 마16:26  한태완 목사  2007-11-18 2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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