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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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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소재열 목사 |
참고 :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
어느 선생님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시계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제일 키가 큰 아이에게 먼저 시계를 꺼내 보이면서 “네가 이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이는 선생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어린이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도 손을 내밀며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제일 키가 작은 아이에게 똑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이는 얼른 그 시계를 받아 제 주머니에 넣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시계를 받아든 어린이에게 “참 고맙다. 네가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이제 그 시계는 네 것이니 잘 보관해라. 태엽 감는 것 잊지 말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두 아이는 “정말 주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가졌을 것을….”이라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해 의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믿고 신뢰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한 상대가 나를 믿어 주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뿌듯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인정하고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이렇게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서로를 믿고 신뢰한 생활 그 자체가 좋은데 하물며 우리들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세계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영혼을 책임지시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을 위로하십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희망과 우리들의 생명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그같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어떠한 자들이 그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뻐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도 그런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백부장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5절)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어떤 분이 어떠한 사람들에게 무슨 내용으로 주신 말씀입니까? 또한 무슨 목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우리들의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사랑과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요구하기 전에 그분이 알아서 먼저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 땅에 나타내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위로했습니다. 위로할 뿐만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게 했습니다.
이제 사람을 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외치게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받아 외쳤지만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의 법을 외쳤습니다.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에는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5절)라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방 사람인 로마의 백부장을 만났다는 사실을 본문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먼저 나아왔다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제될 것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에게 찾아오니까 그가 예수님께 왔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가운데 로마 백부장을 만나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4:12-16절 말씀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예언이 무슨 예언인가? 가버나움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마태복음 4:16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큰 빛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그늘진 곳에 있던 백부장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그 빛되신 메시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지금도 천상에서 이 지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달플 때 우리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도 불평할 것입니까? 그래도 계속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를 등한시 여기고 예배에 빠지겠습니까? 그래도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부끄럼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에 나타난 구원사의 파노라마(6-10절)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백부장의 믿음”이 부각되면서 백부장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면 안됩니다. 물론 백부장의 믿음은 칭찬해야 되고 우리들이 그런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려고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까? 또한 마태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백부장은 로마군인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방인입니다. 더더군다나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방인이며 로마군인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볼 때 절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그들을 개와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차적으로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로 하여금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들이 개 돼지처럼 생각되었던 이방인 가운데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 한 행위는 유대인을 거부한 행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의 종인 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면 목사님의 자녀들을 좋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사님의 자녀를 미워한다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미워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로 본문 10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구원얻는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이스라엘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아직 구원 얻는 백성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방이든 유대인들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모세의 법을 지켰다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이방인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을 믿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라고 한다면 그 성도라는 이름대로 살았습니까? 교회를 섬겼고 이웃을 섬겼습니까?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습니까? 물질가는 곳에 마음도 가기 마련입니다.
처녀 총각이 자기 애인을 사랑한다면 선물을 사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봉사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 (11-13절)
본문 11,12절 말씀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충격입니다. 충격보다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이 완전히 무너진다. 아직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1-12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이야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시기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구원자로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진자 못가진자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구원의 기준임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을 소유하고 그 법을 지킨 자들만이 구원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방 로마 군인인 백부장, 100명 정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자신도 병사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병사들이 움직이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보다 더 월등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병든 하인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병고침을 받을 줄 믿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었습니다.
이런 백부장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만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능력 많으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런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
4. 말씀에로 초청
요한복음 3:17-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정죄가 없습니다. 영생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영생의 축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 마귀가 이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사망의 그늘이 우리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힘은 이 영생으로부터 옵니다. 왜 낙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그렇게 나약하다는 말입니까? 힘을 냅시다. 우리 앞에는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선생님은 그 시계를 받아든 어린이에게 “참 고맙다. 네가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이제 그 시계는 네 것이니 잘 보관해라. 태엽 감는 것 잊지 말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두 아이는 “정말 주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가졌을 것을….”이라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해 의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믿고 신뢰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한 상대가 나를 믿어 주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뿌듯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인정하고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이렇게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서로를 믿고 신뢰한 생활 그 자체가 좋은데 하물며 우리들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세계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영혼을 책임지시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을 위로하십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희망과 우리들의 생명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그같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어떠한 자들이 그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뻐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도 그런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백부장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5절)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어떤 분이 어떠한 사람들에게 무슨 내용으로 주신 말씀입니까? 또한 무슨 목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우리들의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사랑과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요구하기 전에 그분이 알아서 먼저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 땅에 나타내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위로했습니다. 위로할 뿐만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게 했습니다.
이제 사람을 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외치게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받아 외쳤지만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의 법을 외쳤습니다.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에는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5절)라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방 사람인 로마의 백부장을 만났다는 사실을 본문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먼저 나아왔다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제될 것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에게 찾아오니까 그가 예수님께 왔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가운데 로마 백부장을 만나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4:12-16절 말씀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예언이 무슨 예언인가? 가버나움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마태복음 4:16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큰 빛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그늘진 곳에 있던 백부장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그 빛되신 메시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지금도 천상에서 이 지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달플 때 우리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도 불평할 것입니까? 그래도 계속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를 등한시 여기고 예배에 빠지겠습니까? 그래도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부끄럼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에 나타난 구원사의 파노라마(6-10절)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백부장의 믿음”이 부각되면서 백부장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면 안됩니다. 물론 백부장의 믿음은 칭찬해야 되고 우리들이 그런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려고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까? 또한 마태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백부장은 로마군인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방인입니다. 더더군다나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방인이며 로마군인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볼 때 절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그들을 개와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차적으로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로 하여금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들이 개 돼지처럼 생각되었던 이방인 가운데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 한 행위는 유대인을 거부한 행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의 종인 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면 목사님의 자녀들을 좋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사님의 자녀를 미워한다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미워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로 본문 10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구원얻는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이스라엘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아직 구원 얻는 백성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방이든 유대인들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모세의 법을 지켰다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이방인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을 믿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라고 한다면 그 성도라는 이름대로 살았습니까? 교회를 섬겼고 이웃을 섬겼습니까?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습니까? 물질가는 곳에 마음도 가기 마련입니다.
처녀 총각이 자기 애인을 사랑한다면 선물을 사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봉사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 (11-13절)
본문 11,12절 말씀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충격입니다. 충격보다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이 완전히 무너진다. 아직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1-12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이야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시기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구원자로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진자 못가진자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구원의 기준임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을 소유하고 그 법을 지킨 자들만이 구원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방 로마 군인인 백부장, 100명 정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자신도 병사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병사들이 움직이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보다 더 월등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병든 하인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병고침을 받을 줄 믿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었습니다.
이런 백부장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만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능력 많으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런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
4. 말씀에로 초청
요한복음 3:17-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정죄가 없습니다. 영생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영생의 축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 마귀가 이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사망의 그늘이 우리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힘은 이 영생으로부터 옵니다. 왜 낙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그렇게 나약하다는 말입니까? 힘을 냅시다. 우리 앞에는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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