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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과 부활

마태복음 정양모............... 조회 수 2283 추천 수 0 2008.04.11 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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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8:16-20 
설교자 : 정양모 신부 
참고 : 새길교회 
나는 태생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한평생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고 삽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나 자신을 이해하고 이룩하고자 합니다. 내가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은 예수 공부, 예수 모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공부, 예수 모방만 일삼지는 않습니다. 동서고금 여러 성현들의 슬기를 익히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비그리스도인의 생사관을 대충 살펴본 다음에, 예수 부활신앙의 유래와 의미를 상론코자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종교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종교를 헤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宗敎)는 글자 그대로 으뜸가는 가르침이라 실로 오묘하고 현묘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창시자들의 깨달음이나 큰 성현들의 가르침을 헤아리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요. 그래도 인생 공부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비켜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 나름대로 보고 느낀 점을 약술코자 합니다.

석존의 생사관: "이 몸은 물거품 같다고 보고, 모든 일은 아지랑이라 깨달은 이는 악마의 꽃 화살을 꺾어 버리고, 죽음의 왕을 보는 일 없다."(法句經, 花香品: 김달진 역). 삶과 죽음 일체가 환상임을 깨닫는 이만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는 묘리를 읊었습니다. 튀빙겐 대학교 가톨릭 신학자 그라이나허는 인격의 개체성과 인격의 구원에 집착하여, 삼법인(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가운데서 제법무아사상을 다음과 같이 비평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의미하면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세계정신으로 들어가기 싫습니다. 나의 원의와 나의 관심사는 내가 노르베르트 그라이나허로서 계속해서 살고싶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내 관심 밖의 것이고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생사관: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 계로는 죽음에 관해서도 물었습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공자는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씀입니다. 이는 공자의 다른 단구들과도 무척 잘 어울립니다. 번지가 지혜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도의에 힘쓰고, 귀신을 섬기되 멀리하면 지혜롭다 하겠다." 공자께서는 괴변, 폭력, 난동, 귀신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세에 대해서도 말을 삼갔습니다. 초월에 대해 침묵을 지킨 공자의 성실성은 높이 살만합니다. 그러나 초월을 떠나 현실에 안주하면 인생에 구원이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생 성삼문의 절명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북소리 둥둥 목숨 재촉하여, 고개 돌려보니 해가 기운다.
황천길엔 여인숙 하나 없으니, 이 밤엔 뉘집에서 쉴꼬."

세조 2년 1456년 6월초 세조가 상왕(上王)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기회에 성삼문은 세조와 그 일파를 살육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성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김질의 밀고로 붙잡혀 6월 8일 일몰 때 동지들과 함께 군기감에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위의 절명 시는 처형 직전에 읊은 것입니다. 슬픕니다. 구원의 빛이 전혀 안보입니다.

장자의 생사관: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습니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혜자가 장자의 무정함을 보고 심하다고 말하자 장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이 생겼고, 이제 다시 변해서 죽은 거요. 생사는 춘하추동 사철이 서로 되풀이하여 운행되는 것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평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오." 장자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생사를 기의 변화작용으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기가 모이는 게 삶이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고, 또한 기가 흩어지면 본래의 기로 되돌아갑니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달인은 죽음을 애통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온다고 슬퍼하지 않듯이. 이와 어울리는 단구들이 있습니다. "삶을 기뻐하는 건 미혹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하는 건, 어려서 집을 떠나 되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같은 것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소?" "옛날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로 되었더니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 되어 마음껏 즐기면서도 제가 주(周)인 줄을 몰랐다. 문득 깨어나매 누워있는 모습이 바로 주였다. 모르겠구나, 주가 꿈에 나비로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주로 된 것인가? 주와 나비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데, 이것을 일컬어 물화(物化)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생사관: "내가 독을 마시면 나는 더 이상 그대들과 함께 있지 않고 어딘가 축복 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훌륭한 나라로 간다고 아까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대가 매장하는 것은 나의 육체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운명한 사연을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생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육신 감옥에서 풀려나는 해방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혼불멸 신념을 지녔기 때문에 그처럼 태연히 독배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리스적 영혼불멸설이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모조리 한시적이지만 오로지 영혼만은 영원불멸 하다는 영혼불멸설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온 누리는 생성소멸 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른바 영혼만은 그렇지 않다고 예외를 인정할 까닭이 없습니다. 영원성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모두 들꽃과 같도다. 풀은 말라버리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만은 영원히 머무는도다."

그리스도인의 생사관: 부활신앙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이룩하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 진실과 사랑의 가치를 철저하게 체현하다가 처절하게 처형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수의 처절한 삶에 관해선 말을 아끼겠습니다. 그분의 처절한 십자가형은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더불어 사람들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립니다. 석존, 공자, 장자 등 동방의 성인들이 천수를 누리고 평안히 귀천한데 반해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비명에 갔습니다.
서기 30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가 창교한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믿습니다. 상식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실로 엄청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일찍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련하셨습니다." 부활신앙이 비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황당무계하게 들릴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부활신앙은 실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신앙을 빼면 그리스도교는 쓰러집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예수께서 창교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이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에 예루살렘 북서부 성밖 골고다 형장에서 처형되셨을 때 그리스도교는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처형된 스승의 발현을 체험하면서 그 부활을 확신하고, 드디어 30년 5월 말경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 그리스도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 예수 부활신앙의 종교입니다. 이제 신약성서를 근거로 예수 부활신앙의 유래와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우선 부활신앙을 담고 있는 구전전승과 기록사료를 유형별로 일별 하겠습니다.

(1)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

- 사도들의 설교 : 예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 곧장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 네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의 설교를 채록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의 필자인 누가가 만들어 베드로의 입에 담은 글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1949년 마르틴 디벨리우스 교수의 연구로 밝혀졌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베드로의 네 설교에 드러나는 기본 구조와 내용은 베드로가 실제로 행한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 설교는 ①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증언, ②구약논증, ③회개촉구 순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런 구조요 내용이라, 베드로도 이런 식으로 설교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베드로의 설교 네 편을 창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 구조와 내용만은 사실과 맞게 집필했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의 신조 :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론적 신조를 만들곤 했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신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 또는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초적인 신조가 조금씩 확장됩니다. 그 단적인 예로 고린도전서 15:3-5절을 들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또한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보였습니다." 이 신조에선 예수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과 발현을 꼽습니다. 언뜻 보면 네 조항 신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 꼽은 원초적 신조로 환원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매장은 죽음의 확인에 지나지 않고, 예수의 발현은 부활의 확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장된 신조의 내용을 좀더 살펴봅시다. 우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풀이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죽으셨으며, 우리 죄를 대신 속죄코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보였습니다"고 하는 것은 예수 부활 역시 하나님의 구세 경륜에 따라 일어난 것이며, 사흘만이라는 것은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한 날짜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을 처음으로 체험한 날짜를 가리키겠습니다. 게파와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심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서 부활신앙의 근거가 되는 가장 중요한 발현입니다.
이제까지 논한 사도들의 설교 및 그리스도인들의 신조에서는 예수 부활을 가리킬 때 '일으키다' 동사의 능동형 또는 수동형을 씁니다. 죽음을 누워있는 것 또는 잠자는 것으로 여기고, 부활을 일으키는 것 또는 깨우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밖에도 부활을 가리키는 동사로는 타동사로서의 일으키다와 자동사의 일어서다가 나옵니다.

- 빈 무덤 사화 :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골고다 근처에 있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기담은 두 가지 이유로 신빙성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부활을 시신이 소생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에 그분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 부활을 도저히 주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무덤이 빈 사실은 유대교인들조차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부활을 주장하려고 예수의 시신을 남몰래 이장한 까닭에 예수의 무덤이 비게 되었다는 소문을 1세기 유대인들은 줄기차게 퍼뜨렸습니다.

-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 갈릴리 출신 여자들이 30년 4월 9일 새벽에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뜻밖에도 그 무덤이 빈 것을 목격했고 이어서 맨 처음으로 예수 발현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부활을 여자들에게 알려주신 사적인지 발현사화입니다. 1세기 교회는 이 발현사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조 발현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여자들의 증언을 청취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라, 그만큼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일화라 하겠습니다. 조작했다면 예수께서 남자들에게 맨 처음 발현하셨다고 꾸몄을 것입니다.

-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는 누가복음서 말미와 사도행전 서두에 나오는 예수 승천기까지 포함해서 도합 여덟 편이 마태, 누가, 요한복음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의 성격을 보면 사적인지 발현사화도 있지만, 그 나머지는 제자들에게 전도사명을 부여하는 공적사명 발현사화입니다. 발현사화와 신조에서 제자들이 예수 발현 체험을 기술할 때 사용한 동사는 '보다' 동사의 능동형 또는 수동형이 가장 흔합니다. 이밖에 '보다' 동사의 능동형, '드러내다' 동사의 능동형, '계시-계시하다' 명사, 동사가 두루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스승의 현시를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실제로 부활하여 실제로 나타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슈트라우스 같은 이는 제자들의 목격담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각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풀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괴팅겐 대학교 뤼데만이 같은 설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부활과 발현 자체는 역사적으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성질의 일입니다.

(2) 예수 부활신앙의 유래

신약성서에 드러나는 사도들의 설교, 그리스도인들의 신조 및 예수 부활에 관한 다양한 사화들을 종합해보면 예수 부활신앙의 유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도피: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달아났습니다. 게파는 대제관 저택에까지 따라가기는 했으나 그 역시 스승을 배반하고 갈릴리로 도망쳤습니다.
②부인들에게 발현: 30년 4월 9일 새벽에 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또한 부인들이 예수 발현을 체험했습니다.
③베드로에게 발현: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갈릴리에서 우선 게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④열두 제자들에게 발현: 이어 갈릴리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⑤오순절: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집결한 제자들은 극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즉 그들은 무아지경에 이르러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언(靈言)을 지껄였고 이어서 제자들은 동족을 상대로 힘차게 예수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⑥오순절 이후 발현: 바울이 55년경에 집필한 고린도전서 15장 6-8절을 보면 오순절 다음에도 33년경 바울이 개심할 때까지 예수 발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보였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잠들었으나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뒤에는 야고보에게 보인 다음 모든 사도들에게 보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사산아(死産兒)같은 나에게도 보였습니다."

(3) 예수부활신앙의 의미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부활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을 신앙의 신비로 받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달리 보고 인생도 달리 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볼 때, 부활한 예수는 시간을 넘어 영원한 존재로, 공간을 넘어 편재하는 존재로, 생성소멸 법칙을 넘어 불사 불멸하는 존재로 탈바꿈하셨습니다. 역사적 인물이 초월자가 되셨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현상적으로는 안 계시지만 신앙상으로는 언제 어디서고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없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작가는 부활하신 예수를 신령한 분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영(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신봉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이룩하기 마련입니다. 우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오롯이 체현한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할 것입니다. 북아프리카 힙보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께서 강조하신 이웃 사랑을 두고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입을 다물어도 사랑으로 하고, 말을 해도 사랑으로 하라. 나무라더라도 사랑으로 나무라고, 용서해도 사랑으로 용서하라. 마음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려라, 그 뿌리에선 오직 선만이 싹트리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진실과 사랑의 가치를 체현한다면 보람도 크겠지만 손해보는 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박해라는 극한 상황에선 예수님마냥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밑지는 삶, 비참한 죽음이 부활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예수의 삶을 거두셨듯이 예수 닮은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거두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을 비교 서술하곤 했습니다. 바울의 확신인즉,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운명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 둘은 팔자소관이 같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이스라엘에 묵시문학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에 씌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묵시문학의 영향을 듬뿍 받은 경전입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대할 때면 묵시문학적 표상과 복음의 진수를 구분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묵시문학과 복음의 뒤범벅인 신약성서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역사의 종말에 육신이 부활한다는 신념을 표명하곤 합니다. 이 신념 가운데서 묵시문학과 복음을 식별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지만 식별을 포기할 수도 없는 형국입니다. 여기서는 이해의 실마리나마 찾고자 합니다.

- 역사의 종말을 개개인의 종말로 앞당긴다. 묵시문학적 종말에 대한 표상을 버리고 인간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말입니다. 각자 죽는 순간에 종말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부활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어 없어진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위업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집착할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세적 실존과 부활 실존을 다음과 같이 대비 서술합니다.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천한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악한 것이 강한 것으로, 자연적인 몸이 신령한 몸으로, 흙으로 된 사람이 천상의 사람으로 돌변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 나'가 '얼 나'로 탈바꿈한다고 하겠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허허무무하게 된 나를 하나님께서는 불멸의 영체로 재창조하신다고 보면 무난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제 나름대로 예수 부활·우리 부활을 두고 평소부터 생각한 바를 내리 말씀드렸습니다. 끝으로 이 신앙에 이르는 길이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예수 부활과 우리 부활은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입니다. 그러므로 인식론으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수시로 발현하셨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초월자가 인간세의 시공으로 들어와 제자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예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은 이런 발현을 제자들의 환각작용으로 돌립니다. 그러므로 순수 사유의 입장에서는 부활이란 주제를 놓고 할 말이 없습니다.

순수 사유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활신앙으로 비약하는 비결을 일컬어 그리스도인들은 은총 또는 은우(恩佑)라고 합니다. 초월자 하나님, 초월자 그리스도께서 은혜로이 도우셔야 비로소 꿈이 아니라 현실로 그 엄청난 초월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부활신앙이야말로 타력신앙의 전형입니다. 정말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구원의 환성을 지를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 승리했구나!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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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마태복음 육신이 되신 말씀의 아픔 마25:31-46  한완상 형제  2008-05-16 1748
89 마태복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1:20-23  이경숙 교수  2008-05-16 2387
88 마태복음 세상을 구할 자 마4:1-11  길희성 형제  2008-05-16 1930
87 마태복음 추수의 보람과 나눔의 기쁨 마6:25-34  이재정 목사  2008-05-13 1598
86 마태복음 오직 생명으로만 마6:25-34  최만자 자매  2008-05-13 1564
85 마태복음 주님의 기도 마6:9-13  정양모 신부  2008-05-13 1783
84 마태복음 예수 없는 교회와 신앙고백 마11:1-6  한완상 형제  2008-04-25 1701
83 마태복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마13:1-9  조용기 목사  2008-04-18 3499
82 마태복음 일용할 배고픔 마6:11  서중석 목사  2008-04-18 1674
81 마태복음 예수님의 진노, 오늘 누구에게 향할까? 마23:29-36  한완상 목사  2008-04-18 1721
» 마태복음 삶과 죽음과 부활 마28:16-20  정양모 신부  2008-04-11 2283
79 마태복음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마22:35-38  조용기 목사  2008-04-06 2670
78 마태복음 믿음으로 삽시다 마17:14-20  한태완 목사  2008-03-25 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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