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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배고픔

마태복음 서중석 목사............... 조회 수 1674 추천 수 0 2008.04.18 07: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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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1 
설교자 : 서중석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이 기도는 이천년 동안 줄곧 크리스천들의 입을 통해 암송되어 왔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크리스천들을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로부터 구별지어 주는 뚜렷한 경계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 당시의 초기 제자들로부터 현대 크리스천들에 이르기까지 주기도문은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고 내적 결속력을 다져주는 주요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주기도문 중 이해하기 어려운 탄원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무엇을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가령 이미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같은 대학 입시에 꼭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색한 것은 이미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원래 어떤 정황에서 언급된 것입니까?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첫 제자들의 삶의 상황이 대단히 힘겨웠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예수와 함께 이곳 저곳을 순례하며 그날 그날을 연명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극빈의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마태복음 15장 32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따라서 며칠동안 굶은 상태였던 그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신체적 본능이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러한 수려한 시적 교훈들은 어떤 분위기에 걸맞겠습니까? 이 교훈들을 휴일 오후 한적한 공원 속의 호숫가를 넉넉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읊조리기에 알맞은 싯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런 생각은 단연코 빗나간 해석이라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이 말씀들은 당장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셔야 할지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초기 추종자들의 가혹한 삶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목숨 연장을 위한 개인적인 기본 행위이고, 입는 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인 기본 행위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삶의 기본적인 품목에 대한 관심조차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하고 이를 거부합니다. 예수는 이 거부를 결론 부분에서 재차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신뢰를 철저히 하나님에게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에 집착할수록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감지한 예수는 따라서 그러한 품목에 관해 걱정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적은 사람들'로 규정합니다.
예수가 이 가르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잘'먹을까, 무엇을 '잘'마실까, 무엇을 '잘'입을까를 염려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염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염려에 속합니다. '잘'은 미각이나 시각의 '세련'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예수의 청중은 '세련'과 관련된 종류의 한가한 염려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연명을 위한 기본 사항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 곧 의식주 중 의와 식만 언급될 뿐, 주(住)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할 곳이 없었던 사람들, 곧 이 마을 저 마을을 방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혹독한 삶의 정황을 반영해 줍니다. 이들은 의와 식, 곧 생명유지의 기본만을 염려했을 뿐인데도, 예수는 그것마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는 힘으로 '땅'을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물질이 일용할 양식의 수준을 과도하게 넘어서면 결국은 그 물질이 하나님을 점차 대신하게 됩니다.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점점 줄어듭니다. 현대의 부자들은 과거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던 품목들 중 상당부분이 이미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위대하신 하나님은 점점 작게 보이고, 물질의 위력이 점점 크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에게는 물질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인간이 있고 그 밑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가르침은 물질 없이 살아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물질 없이는 단 며칠도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탄의 유혹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떡만 가지고 살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떡 없이 말씀만 가지고서도 역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여기서 물질의 위치를 바로 정해주셨습니다. 물질만 갖고 살려는 인간은 자신이나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우위에 두고 사는 셈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물질우선주의, 물질절대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위에 모시고 물질을 인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날그날 생명의 존속을 위해 극히 필요한 것들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일용할 양식 정도가 아니라, 몇 달 아니 몇 년의 양식을 쌓아 놓은 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이미 확보해 놓은 채 살고 있는 사람도 상당한 숫자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한 사회에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문자 그대로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정신나간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에 관한 탄원은 주기도문에서 생략해야 하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 속에 숨겨진 그 원래의 뜻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강조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탄원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 물질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살아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질이 일용할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지 않고 물질에 신뢰를 두는 상태에로 전락하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제 위치를 바로 알고 살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은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고려한다면,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북한이든 현재 최극빈 상태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6.25 동란 중이라든가 보릿고개 시절에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가 절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 뿐 아니라 지금도 최극빈 상태로 그날 그날을 연명하는 영세민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탄원은 절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벗어나 있는 우리 대부분에게 그 말씀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아니,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치도록 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일용할 배고픔'으로 새겨들어야 합니다. '배고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배고픔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풍족한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섬기고 물질을 다시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날 그날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배고픔을 느껴야 가능합니다. 배고픔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과 인간과 물질이 서로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과거 첫 제자들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살아가기 위해 일용할 '양식'을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풍족한 현대 크리스천들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용할 '배고픔'을 되뇌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소한 굶주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은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배고픔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조롱 받는 나라, 과소비가 만연된 사회, 외국 고급 상표에 넋을 빼앗긴 사람들이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세련되게 살라는 허황된 각종 선전에 바짝 구미가 당긴 사람들,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사상에 흠뻑 젖어들은 사람들, 이미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들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배고픔'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을 체험하려고 힘써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니, 실제로 배고프려고 애쓰지 않고서는 이런 세상, 이런 물질숭배 풍조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래 전에 시편4편의 시인은 물신숭배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겠느냐"는 하나님의 탄식을 대신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배부르게 해달라는 종류의 기도를 멈출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기도는 지금보다 훨씬 배고프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우리의 발 밑에서 다스리고 하나님을 다시 진심으로 경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문자를 '일용할 배고픔'으로 고쳐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일용할 양식'을 암송할 때마다, 자신이 최극빈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그 뜻을 '일용할 배고픔'으로 이해하면서 암송해야만 행간을 읽는 탄원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인간과 물질이 각기 제 위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초기 크리스천들의 실제적인 배고픔과 그 때문에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고 살았던 그들의 철저한 삶의 모습이 풍부한 물질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큰 각성과 자극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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