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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되신 말씀의 아픔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737 추천 수 0 2008.05.16 09: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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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5:31-46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나라의 경제가 도산 지경에 이르러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상업주의 정신은 여기 저기서 춤추고 있습니다. 온 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배 밑으로 들어가면서 침울하고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맞는 세상은 여전히 예수 없는 성탄절, 아니 예수를 무시하거나 능멸하는 성탄절의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있으나 예수는 없는 듯합니다. 온갖 세일즈의 소음은 들리고 있으나 참된 복음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수선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를, 갈릴리에서 선교·봉사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 가셔서 혹독한 고난을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나아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성탄절은 보다 보람있게 맞이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놀라운 사건의 참된 의미를 폭 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입니다. 대체로 성육신은 하나님이 시간과 역사 속으로 오신 사건, 즉 구체적인 역사 상황으로 오신 사건으로 봅니다. 초시간적, 초역사적 존재이신 절대자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대적인 상황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천년 전에, 그 많은 장소 가운데 하필이면 팔레스타인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제국의 한 변방에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은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그 막강한 로마제국의 국제적 넷워크(통신망)를 적절히 활용하여 당시 변방의 한 종파에 불과했던 기독교를 세계화하려 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역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팔레스타인은 참으로 신기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양도 아니요 서양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아세아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큰 대륙을 이어주기도 합니다. 그 조그마한 땅에는 없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눈 덮인 헬몬산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계곡도 있습니다. 비옥한 농토가 있는가 하면 삭막한 사막과 광야도 있습니다. 요단강이 있는가 하면 바다보다 낮은 저지대도 있습니다. 온대도 있고 열대도 있습니다. 그 조그마한 땅에 이 모든 자연적 조건들이 두루 갖춰진 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전 지구 땅의 축소판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과 특수한 장소를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은 대체로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받아드립니다. 요한복음(1:14)도 이 사건을 은혜와 진리로 가득 찬 영광의 사건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말 기쁘고 반가운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우리는 구원의 사건으로 반겨야 마땅합니다. 진리와 은총이 충만한 영광의 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날을 올바르게 맞아드리고 기리려면, 이날의 보다 깊고 보다 넓은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징글벨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맞이하고 마는 세속적 잔치의 날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은 궁극적으로는 환희의 사건임에 틀림없으나, 그 과정은 뼈아픈 고통을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아픔의 측면을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서로 돌아가 그 아픔의 연속적 계기를 새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IMF 지배하에 놓인 오늘의 우리의 딱한 현실 속에서 성육신의 참된 뜻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과 역사 속으로 오셨습니다. 화려한 궁전 속에서 귀하신 황태자의 몸으로 오시지 않고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이점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된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억울하게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평등을 빼앗긴 사람으로 육화되셨습니다. 건강마저 훼손된 초라한 병자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성탄절에는 하나님이 새삼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와 계신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건강과 자유권과 평등권을 부당하게 빼앗겨 아파하는 사람들과 나그네처럼 서러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은총의 계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육화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며, 특히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때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서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기에 성탄절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극적인 성서의 한 장면에서 또 육화의 아픔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기야 복음서에는 육화의 아픔을 알려주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만, 가장 드라마틱한 것을 선택해 본다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값진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는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마가 14:3-6). 이때 가롯 유다는 회계를 맡았습니다. 그는 이 값진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듯한 불평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가롯 유다가 정말 몰랐던 것은 자기가 섬겼던 예수님 자신이 철저하게 가난했던 분임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통상적인 빈자와 달랐습니다. 가난하기에 항상 더 좋은 것을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분입니다. 호주머니의 돈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의 살과 피, 당신의 눈물과 땀, 당신의 온 몸과 마음을 다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여기 나오는 마리아 여인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철저한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의 처절한 죽음을 가슴아파하면서 참된 성찬 예식을 행한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마가 14:3-6). 이런 뜻에서 이 여인의 성례전은 예수께서 남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보다 더 뜻깊은 예전이라 하겠습니다. 성례전에서 "떡은 내 몸이요 이 잔은 내 피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 죄인을 위해 받쳤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것을 내어주어 아무것도 없는 진짜 빈털터리가 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짜 가난뱅이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은 철저하게 가난해지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셋째로,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성육신의 아픔이 극치에 달한 사건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무력한 존재로 '허무하게' 죽임 당하십니다. 그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이른바 강도들은 그나마 반항이라도 할 힘이 있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죽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육화 고통의 극치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아픔 없는 성탄절은 가짜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십자가들이 곳곳에 우뚝우뚝 서 있지만, 그것이 과연 성육신의 아픔을 절박하게 나타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이기도 합니다. 보통 바보가 아니라 이기도 합니다. 항상 신실하게 고민하는 김병종교수의 그림 가운데 핏방울을 눈에서 흘리는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 한 방울마저 남김없이 다 쏟고 돌아가신 바짝 마른 골고다 예수 모습을 그린 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더 흥미를 끄는 그림은 라는 그림입니다. 그 큰 눈이 양쪽 아래로 쳐져 정말 바보처럼 보이는 가시 면류관 쓰신 예수의 모습입니다. 김교수는 바보 예수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바보이십니다. 당신을 따르던 그 수많은 민중의 힘을 이용해 허약할 대로 허약해빠진 빌라도 정권을 순식간에 뒤엎을 수 있었을 터인데 오히려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실 만큼 바보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바보이십니다. 당대의 유력자들이 당신과 사귀고 싶어했건만 당신의 친구는 늘 하층민들이었고 잘해야 세리였으며 심지어 창녀와 문둥이까지 있었습니다. 골치 아프고 지저분한 그들의 삶을 통째로 떠맡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참으로 당신은 바보이십니다. 제자를 고르시되 어찌 그리 변변한 학력이나 가문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무지랭이들로만 두셨습니까? 그리고 그 한심한 십여명 제자들에게 이 세상 전도를 맡기시고 어쩌면 그리도 편안히 승천해 버리실 수 있으셨습니까?
참 바보 같으신 예수님.
그러나 영악하고 사악한 이 세상, 동족이 동족을 증오하고 서로가 서로를 삿대질하는 이 사랑 없는 세상에 나는 왜 그리 당신이 그리운 것입니까? 눈앞의 모든 영광을 밀쳐두고 승리를 외면하셨던 당신이 말입니다.

우리는 비참하고 가난하고, 바보스러운 몸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예수님 탄생으로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로 육화하셨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성탄절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곧 성탄절 질문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첫째,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뜻은 지극히 작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존엄하고 큰 존재로 내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처럼 존귀한 존재로 높이시기 위함이지요. 여기에 인간의 기본권리를 그토록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다음과 같이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유하셨으나 가난한 자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시려고 스스로를 가난한 자로 전락시키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무력해지신 까닭은 무력한 우리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위의 무력함은 우리를 참으로 강한 존재로 세우시기 위함이지요. 약한 자와 무력한 자, 병든 자와 나그네가 되신 것은 모두 이같은 하나님의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은 사악하여 같은 인간을 차별하고 능멸합니다. 가난하고 무력한 자를 차별하고 짓밟습니다. 온갖 닫힌 체제의 지도자는 그것이 히틀러든지 스탈린이든지 간에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막강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통의 육화를 하신 것입니다. 인권을 짓밟는 인간은 하나님을 짓밟게 됨으로써 스스로 어리석은 자임을 마침내 증명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이미 이같은 독재자들이 어떤 심판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에 누가 견디겠습니까?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으로 우리는 남의 인권을 존중하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차별하거나 짓밟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교훈은 바로 이같은 성육신의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히틀러는 수백만번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 속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바로 오늘의 베들레헴의 말구유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오늘도 이러한 작은 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 세력이 엄연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성령을 통해 얻어야 합니다.

올해 성탄절에는 믿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 지를 조용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 심판대에 선 염소가 아닌지를 스스로 살필 수 있는 믿음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염소라면 회개하여 곧 양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1997년 12월은 유난히 춥습니다. IMF의 찬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주위에 떨고 배고프고 나그네된 하나님, 옥에 갇힌 예수님이 자꾸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그 아픔이 당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뜨겁게 깨닫는 이번 강림절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면서 겪는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계절이 바로 12월입니다. 바보 예수의 그 아픔과 외로움을 성탄절을 앞두고 함께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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