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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악을 어떻게 사랑하나?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878 추천 수 0 2008.05.30 1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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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8-39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1. 시작하면서

냉전의 외딴섬 한반도에 사는 크리스천들도 북한을 미워 해온지 어언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과연 이 증오심이 성서적일까요? 최근 강릉과 속초에서 생긴 북한 잠수정과 무장간첩침투사건으로 국민들 중에는 햇볕론적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있는데 크리스천들 중에도 비난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연 그것이 성서적입니까? 온갖 종류의 적 또는 원수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 와 사도 바울의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의 명령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원수는 초전박살을 내야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란 말입니까? 창궐하는 악을 어떻게 착함으로 이겨낼 수 있단 말입니까? 너무 낭만적이고 안일한 처방이 아닌가요? 사사로운 개인의 삶에서도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걸핏하면 무장간첩들을 침투시키는 북한을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지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허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냉전의 대결장인 한반도에 사는 믿는 이들은 이 곤혹스러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성서의 뜻을 헤아려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2. 먼저 원수와 악에 대한 분명치 않은 점부터 밝혀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결코 악(惡)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원수는 곧 악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싶어합니다. 자기는 선(善)한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을 원수로 규정하게되면 그 원수는 곧 악이라는 독선적 판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함정이요, 미혹입니다. 하기야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증오하기 쉽고, 증오해야만 초전박살의 의지가 나옵니다.
나는 어린 초등학교 시절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미국과 영국을 악마의 나라로 색칠했음을 기억합니다. 처칠과 루스벨트를 악귀로 그렸던 그림도 기억납니다. 그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려야 할 악마로 묘사했었습니다. 정말 일본은 善이요, 미국과 영국은 악마였던가요?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엄숙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도 악이 존재하는가 하면 상대방 속에도 善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만일 우리에게만 선이 있고 상대방에는 악만이 존재한다면 예수님께서 원수사랑을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곧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 오히려 원수를 이기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 원수나 모두 악할 수 있는 동시에 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악은 악을 선호하고 선은 선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이 원수 속에 있는 악과 다투면서도 역설적으로 적대적 공생관계(敵對的 共生關係)를 이룩합니다. 이를테면, 북한의 강경 냉전세력이 무장간첩을 남쪽으로 침투시키면, 남의 강경 냉전세력은 그것을 빌미로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시킵니다. 즉 각기 그들의 기득 이권을 보호·강화시킵니다. 우리는 北風工作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선을 키워, 내 속에 있는 악과 상대방 속에 있는 악을 이겨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 속에 있는 선을 키워 그들 스스로 악을 제어케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3. 그러면 원수사랑의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나의 원수는 항상 강하고 항상 위협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나는 즐거워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를 성서는 극복하도록 요청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딱한 사정에 빠지게 될 때, 믿는 이들은 어렵겠지만 마땅히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명령은 원수를 단순히 도와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명령은 곧 도움 받는 원수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원수로부터 도움을 받게되는 사람은 그 도움이 지니는 뜻밖의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밖의 도움으로 기존의 상투적 인식은 흔들리게 됩니다. 흔들린다함은 곧 그 속에 있는 선한 부분이 힘을 얻게 되어 도와주는 원수의 선한 행위를 강화시켜준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彼我關係가 개선됩니다. 선의 순환이 이뤄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변화요, 감동적인 변화입니다. 옛날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아들로 삼았었습니다. 그 공산당원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원수 속에 존재하는 악기(惡氣)의 힘은 빠지게 됩니다. 나아가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자기를 인식하면서 자기의 상대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합니다.
5년 전 나는 이인모 노인을 북송했던 일로 인해 보수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공격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아니 오늘까지도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월간 조선'에 실린 북한 장교의 귀순면담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장교가 남으로 귀순하게 된 것은 남쪽정부가 이인모 노인을 무조건 북송한 사실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체제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인데(아마도 그러한 반체제 인사는 북에서도 총살감일 터인데), 남에서는 그런 사람을 조건 달지 않고 대승적 입장에서 보내준 것을 감동으로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효력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원수사랑의 명령은 어려운 처지에 원수가 빠질수록, 그를 도움으로써 그 속의 선을 증폭시키고, 그 속의 악을 부끄럽게 하여 피차간 모두 좋게 변화되라는 명령입니다. 특히 원수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행위를 성서는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원래 숯불을 머리 위에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하게 하는 이집트의 고문행위였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행위를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합니다. 허나 로마서(12:20-21)가 시사하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뜻밖의 도움을 받게 된 원수는 그의 얼어붙어서 고장나 있는 양심을 비로소 작동시키게 된다는 점입니다. 양심의 작동으로 수치심을 뜨겁게 뜨겁게 느끼게 되는데 마치 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 놓은 것 같은 강렬한 뜨거움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윤리적 힘입니다. 일찍 맹자도 "수치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라고 갈파했고 그것을 義의 근본으로 보았습니다. 동물은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사람만이 부끄러워할 줄 압니다. 그것은 그가 양심(또는 초자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끄러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수치심을 통해 자기 속의 악을 이겨내고 상대방과 관계개선 하면서, 선 순환을 도모합니다.
원수 사랑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원수 증오의 효과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원수를 증오할수록, 원수 속의 악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며, 내 속의 악도 더욱 악랄하게 됩니다. 악만이 승리하고, 선한 것들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공멸과 패패(敗敗)의 비참한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이 같은 비극을 이겨내는 가장 정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뜻은 당시 율법주의적 발상과는 아주 대조되었습니다. 〈이는 이〉, 〈눈은 눈〉이라고 하는 구약적 징벌상호주의는 모두를 눈 없고 이빨 빠진 병신 만들기를 조장하는 부정적 힘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처방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으로 이 어리석음을 초극하셨습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는 문제를 원수 사랑문제와 더불어 생각해봅시다.

만일 나의 상대방이 원수가 아니라 악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상대방이 총체적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역사 속에 그러한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까? 하기야 히틀러 나치를 총체적 악으로 봐도 지나침은 없겠습니다. 이런 경우 총체적인 악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악과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그 악을 보고 제3자로서 방관해서도 안 됩니다. 구경이나 방관은 악을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수 사랑의 명령보다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명령이 더 절박하고 더 정당하며, 더 적합합니다.
그런데 그 총체적 악이 그 악마적 힘으로 우리를 압살하려할 때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리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연약할 때 어떻게 그 악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막강했던 로마의 권력과 또한 강력했던 토착 율법주의 세력 앞에서 느끼셨던 당신의 실존적 문제기도 했습니다. 열심당은 무력은 무력으로 대응하기를 바랐습니다. 주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가르침과 고치심의 삶 속에서 우리가 거듭거듭 확인하는 것은 폭력 곧 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진리입니다. 설령 그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칼의 악함이 마침내 억울하고 착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보복의 힘이 아니라, 부활의 힘이었습니다. 보복은 죽이는 힘이지만, 부활은 모두를 살리는 힘입니다.
부활 이전에 예수님을 비방했던 제자들은 "그 허무한 죽음" 사건 앞에서 베드로처럼 부끄러워 울기도 했고, 가롯유다처럼 부끄러워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순하디 순한 어린양의 죽음이 로마 군인 백부장으로 하여금 "진실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부활 사건 이후에는 그렇게 연약하고, 비굴하고, 비겁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떳떳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에 용기 있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이나 토착율법주의자들의 강력한 율법의 힘도 예수님 사랑의 힘, 즉 악에 의해 죽임 당하더라도 그 악에 의해 굴복 당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사랑의 힘 앞에 힘없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를 통해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이 사랑과 부활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폭발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 터진 것이 바로 부활사건이라 하겠습니다.

5. 이제 우리는 이 같은 원수 사랑의 명령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명령을 햇볕론적 대북 대응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제기 했듯이 냉전의 고도 한반도에서 믿는 이들이 과연 도발적인 북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5 : 38의 어법대로, 이때까지는 우리가 북한에 대해 〈이는 이〉, 〈눈은 눈〉으로 대응했습니다. 적대적 상호주의의 관점에서 대결해왔습니다. 그간 증오와 대립은 격화되었습니다. 지난 50년간 같은 겨레인데 서로 병신 만드는 일에 열을 올려왔습니다. 이제 이 같은 냉전대결은 지금 한반도 이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21세기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정보화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발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 새로운 발상은 새로운 실천을 요청합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을 돌려대라고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이 경우 나를 때리는 상대방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오른쪽 뺨을 맞으면 덜 아픕니다. 나의 왼쪽 뺨을 상대방이 오른손으로 때리므로 더 아픕니다. 이 말은 때리는 사람의 머리 위에 더 뜨거운 숯불을 얹어 놓는 효과를 뜻하기도 합니다. 당당하게 얻어맞는 피해자에 대해 가혹한 가해자는 훗날 더 부끄러워 하게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맞는 사람이 참으로 더 강하지 않으면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없다는 점입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강제로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1950년 남침을 했습니다. 그 후 줄곤 온갖 침투공작을 통해 남쪽을 괴롭혀왔습니다. 그러니까 남쪽의 오른 뺨을 계속 때려온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이는 이〉, 〈눈은 눈〉의 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 충동을 이겨내야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보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왼뺨을 대어주는 참 용기, 바로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남침했으나, 우리는 소를 보낸다"
"너희는 무장간첩을 보내나, 우리는 옥수수 씨앗을 보낸다"
"너희는 끊임없이 욕설하나, 우리는 비료를 보낸다"

라는 의지로 계속 왼뺨대기를 한다면, 마침내 北과 南은 함께 번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햇볕론은 왼뺨대기 정책이요, 이것은 北의 낡은 냉전문화와 구조뿐만 아니라 南의 음습한 냉전 관행과 사고도 변화시켜, 마침내 온 겨레가 함께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입니다. 이 길만이 한반도에 주님의 평화를 저 한강물처럼, 저 대동강물처럼 흐르게 할 것입니다.

6. 맺으며

우리가 누구와 원수를 맺어 대결할 때,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저들을 악한 세력이라고 단정할 만큼 우리가 선합니까? 이것은 크리스천의 물음입니다. 원수 속에서도 선이 있고, 우리 속에도 악이 있을 때, 원수의 악을 부끄럽게 하려면, 우리의 선으로 그 원수를 적극 도와야 합니다. 특히 그 원수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을 때 더욱 도와야 합니다. 오늘 北녘 동포는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절하게 주리고 애타게 목마르며 불쌍하게 헐벗고 있습니다. 우리 南의 크리스천들이 지금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北도 南도 모두 성서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남북 사이에 큰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총체적인 악일 때는 이 갖는 용기와 어엿함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무력에만 의존하는 강경 안보정책의 취약점을 드러내주는 말씀입니다. 北에는 2,300만의 우리 겨레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착하기도 하고 때론 악하기도 합니다. 우리만이 선하다는 독선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어려운 지경에서 고통 당하는 북녘 겨레를 사랑으로 도와주는 일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가 올곧은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더 좋은 차원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햇볕론을 더 아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사랑의 햇볕으로 마침내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아들과 딸이 되고 그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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