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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실천

마태복음 정하영............... 조회 수 1807 추천 수 0 2008.06.06 20: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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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24-27 
설교자 : 정하영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4,50년 전만 해도 교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리거나 잃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집단 따돌림을 당한 나머지 고향을 떠나야 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는 오늘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일은 쉽고 간편한 일이 되었습니다. 동네마다 교회가 있고, 친절한 안내자가 있어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이 입문 단계에서부터 쉽기만 하고 보니 신앙을 선택할 때의 고민이나 진지함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별다른 긴장감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힘들여 얻지도 않고,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장기간 지속되는 신앙생활은 점차 습관화되고 나태와 타락의 길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자기 행위에 대해 끊임없는 성찰과 진지한 반성이 결여될 때, 개인이나 사회는 안일에 젖게 되고 마침내는 타락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나라 종교의 역사에서 되풀이되어 온 현상이기도 합니다. 삼국시대 초기에 이 땅에 들어온 불교는 참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포교사는 신분을 숨기고 포교활동을 했으며, 적지 않은 순교자를 낸 다음에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에 걸쳐 국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는 사이에 불교는 극도의 부패와 타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교는 뜻 있는 지식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백성들과도 멀어졌으며, 마침내는 그들의 든든한 보호자로 여겼던 국가 권력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불교는 나라에 해가 되는 사악한 집단으로 단죄되어 가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찰은 폐허가 되었고, 높은 신분을 누렸던 승려들은 조선조 5백년 동안 백정이나 무당과 함께 극히 천한 계급으로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타락한 불교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진 유교 역시 불교와 똑같은 길을 걸었고, 그 결과도 불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아 국정을 쇄신할 때, 공자의 위패를 모셔 놓은 서원은 타락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대부분이 철폐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습니다. 선비나 유생은 자랑스럽고 존경받는 이름이 아니라, 못나고 못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각인(刻印)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 성찰이 없이 안일한 자세로 일관해 온 종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앞에 놓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교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소중하게 받아들였던 불교와 유교였지만, 그것이 잘못된 길을 걸었을 때, 한 순간에 가차없이 내던져버렸던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라 해서 예외를 두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겨우 200여년, 또는 100여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러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뜻 있는 지식인들은 벌써부터 교회의 행태에 대해서 예언자적 비판과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와 아울러 한 편에서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다각도의 시도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 새길교회를 창립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회가 또 다시 기존 종교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우리 자신과 이 민족을 구원하는 크나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신앙인들의 진지한 성찰과 용기 있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은 교회력(敎會曆)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는 '사순절'입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의 영광이 올 수 있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이 어떻게 이 땅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온 것처럼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든든한 자리를 잡게 될 것인지 묵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와 짧은 기간 안에 민족복음화의 기틀을 놓을 수 있게 된 데는 신앙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시기마다 개별적으로 감내한 희생과 헌신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조망해 볼 때 크게 세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고, 그 때마다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봅니다. 첫째는 초창기 교회의 순교 행위였고, 둘째는 개화기에서 일제하로 이어지는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이었으며, 셋째는 군사독재 시절에 치렀던 저항운동이었다고 봅니다. 이들 세 가지 활동은 언뜻 보면 극히 정치적 활동 같지만 실상은 가장 신앙적인 행위였고, 말보다는 실천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행위였다고 봅니다.
200여년 전 천주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나라는 주자학적 통치방식 때문에 사회가 경직되고 인간성이 말살되던 위급한 시기였습니다. 신분적 차별, 남녀간의 차별, 당파적 투쟁 등으로 민족은 갈래갈래 찢어졌고, 그런 사이에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되었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교는 질식 상태에 있던 인간성의 회복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고 있던 지식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접하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 결과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각성을 주창하며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학문과 이론으로서 그것을 다루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어느 순교자의 신앙고백'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남의 집 종으로서 주인을 따라 천주교를 믿다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를 배교(背敎)시키려고 온갖 고문을 가하고, 갖은 말로 회유를 했지만 그는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배교할 것을 권하는 친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예수를 믿고부터 나는 비로소 내가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같이 높기만 하던 주인 어른은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나를 형제라고 부르며,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이제 나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예수를 버리고 다시 살아나간다 해도 나는 또 다시 전과 같이 짐승이나 다름없이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이렇게 행복한 상태로 죽기를 원합니다. 게다가 죽은 뒤에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니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입니까?

저는 이 고백을 읽고 이것은 비단 이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었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도 일찍이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어떤 계층을 막론하고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임금도 자유롭지 못했고, 양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주도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계층이 하천민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양반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줍니다. 초창기의 순교자들은 교회나 학교, 또는 병원을 세우는 등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꽁꽁 언 이 땅을 녹여 복음의 씨앗을 뿌릴 터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개화기와 일제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백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교육사업, 의료사업, 미신 타파 운동, 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활동은 이 땅에서 인류 구원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압니다. 이 시기에 보여준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헌신은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 시기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민족 앞에 내세우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신앙은 박정희 시대와 그 이후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절에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표출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종교적 양심에 따라 고난의 길을 기꺼이 찾아 나섰던 분들이 계시는 줄 압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게도 그리스도 신앙이 외경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감동을 주는 것은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독재에 대한 저항이 치열했던 6,70년대에 뜻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젊어지고 쇄신된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비록 약화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크게 세 차례의 고난을 거치는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가장 복음에 충실했고, 생명력이 충만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신교와 구교의 벽도 허물고, 화해와 협력의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초창기의 신앙의 기틀을 놓는 일을 천주교가 담당했다면 계몽과 독립운동은 개신교가 주도했으며, 독재와의 투쟁은 신구교가 하나 되어 수행했습니다. 이들 세 가지 활동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핵심은 하나였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인간성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용감하게 실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는 과거와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신분제도가 사라졌고,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며, 정치적 독재체제도 무너졌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억압과 장애는 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1957년부터 이 나라에 와서 선교사업을 하시면서, 강원도 황지에서 예수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성공회의 대천덕 신부님은 한국 교회에 대해 이렇게 충고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핍박당하는 것 있습니까? 없죠? 돈도 많고 세력도 많습니다. 국회의원 중 30%가 기독교인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책임이 아주 많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공의(公儀) 문제를 취급하고 토지법도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토지법을 취급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없어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하나님의 법대로 나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은 핍박받던 옛날에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핍박도 없을 뿐 아니라 세력을 잡은 지금은 달라야 합니다.

밖으로부터의 핍박과 시련이 사라진 지금, 우리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민족적 사명을 망각하고 개인적 기복행위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의 신앙을 좀먹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온갖 현상들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주위를 옥죄어오고 있습니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팽창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성을 말살시키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날마다 듣고 보는 사건들이 하나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서 싸워야 할 대상들입니다. 과거처럼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방위로 침투해 오는 대상을 상대할 일이 난감합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우리가 싸우고 물리쳐야 할 상대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 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집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려하는 모든 것들이 교회 안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비대해지고 있는 교회 조직, 세속을 능가하는 물신 숭배 사조, 진지성을 잃어 가는 교회 행사 등은 가히 우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기간의 힘든 투쟁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현하고자 노력해 왔으면서도, 정작 모범이 되어야 할 교회 안에서는 신분제에 못지 않은 계급화가 강화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헤쳐나갈 길이 쉽게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길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날 그토록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거대한 조직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의 믿음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실천이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업적과 성과를 가지고 오늘을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으며, 그것은 집단으로써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활을 통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의 깨어있는 신앙과 일상에서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지식과 실천이 반비례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가 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만 생명력을 가진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계신 새길교회의 가족 여러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이 사회의 거울이 되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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