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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태복음 최만자............... 조회 수 1603 추천 수 0 2008.06.15 08: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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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8-42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저는 최근에 여성들 간에 서로 다른 두 태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한 재일교포 여성의 생의 이야기에서 나타났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 있는 한 여자대학교 일학년 학생들한테서 본 것이었습니다. 재일교포 여성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그 여성은 재일동포 2세로서 부모가 일제시대 때 징용되어 일본에서 살게되었는데,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마늘 할머니'라는 조롱의 별명을 들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자랐답니다. 그러다 결혼하여서 아이 둘을 낳고 살았는데 자기 나이 28세에 남편이 병으로 죽고 말았답니다. 혼자 힘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아이들을 성장시키며 살았는데, 한 일본 남성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게 되었고, 오랜 생각 끝에 서로 의지하며 살리라 생각하고 재혼을 하였는데, 그 일본 남성은 아이가 셋이나 있는 홀아비였다고 합니다. 그 남자의 부인은 자기 막내아들이 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아 그만 자살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한 홀아비 가정과 외로운 과부의 가정이 합하여져서 서로 의지하여 위로하며 살게 되었는데, 그러나 운명은 이 여인을 행복하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새 남편과 1년여 동안 살고 그만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 기막힌 운명 앞에 아득한 마음을 추스리면서 그가 생각해낸 생존 방법은 자신의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나겠다는 것이었답니다. 새 남편의 아이들은 복지시설이나 그 친족에게 떠 넘겨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려는 그 때 뜻밖에도 자기의 아들이(당시 고등학생 정도의 연령) 어머니에게 새 아버지의 아이들을 버리지 말고 함께 살자고 간청하였답니다. 저들이 너무 가여우니까 버리지 말고 어렵더라도 함께 돌보며 살아보자고 하며 자신이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드리겠다고 하더랍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의 갸륵한 간청에 자신이 치러야 할 숱한 어려움을 예견하면서도 감히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서 결국 다섯 아이들을 모두 싸안고 살게 되었답니다. 살면서 겪은 고초는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살아 온 결과 지금 자기 아들은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으며, 한국 며느리까지 보았고, 이지매를 당하며 자기 어머니의 죽음까지 당했던 슬픔의 아들은 일본에서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이 여인의 인생사에서 우리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고난을 통한 승리의 삶에 고개 숙이며 찬양을 아낄 수 없게 됩니다.
두번째는 200여명의 여대생들에게 자신들의 어머니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토론케 한 결과에서 나타났습니다. 8개 그룹으로 나뉘었던 토론 모두에서 어머니의 삶은 희생과 인내와 고통의 것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불합리성이 너무 많다고 보며 자신들은 결코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상반된 두 여성의 부류를 보면서 전통적으로 의미가 있고 보람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희생, 사랑, 인내, 그리고 남을 위한 고통들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의미 없고 오히려 자신을 성취해 나가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하며 고난을 참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고한 선이며 우리가 이루어 나가야 할 윤리적 행위의 목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자를 위한 희생과 사랑이 삶의 나아갈 길이라 하겠습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은혜를 입은 존재들입니다. 한 온전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수 많은 돌봄, 애정, 사랑의 손길과 영혼의 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인간이 자립능력이 생길 때까지 생존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어머니 혹은 그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비교하여 볼 때 인간은 자립능력 형성의 기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존재라고 합니다. 동물들은 낳자말자 혼자서 걷고 젖을 찾아 먹고 그리고 곧 빠르게 먹을거리의 해결과 혼자 살아가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3-4세 되도록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고 먹이고 입히는데다가, 커서도 대학까지의 뒷바라지에 결혼 후에도 소위 A.S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되기까지는 그 배후에 희생과 헌신의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어머니나 어머니 같은 역할자가 감당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존재케 했고 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게 한 희생과 헌신의 덕목들이 이제는 자기성취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로 판단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이혼율이 높아졌고 더욱이 IMF 이후에 가출하는 어머니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분명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여성들의 갈등이 커진 것 같습니다.
이런 갈등현상에 대해 여성문제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소리들이 커지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남긴 것이 결국 가정의 해체요 파괴적인 것 밖에 없다는 비난과 그래서 "여성들이여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설들이 대두되고도 있습니다. 사랑과 헌신의 가치 퇴색이 여성들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비난받으면서 다시 여성들을 가정의 영역에 한정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남성들에게서는 물론 여성들 가운데서도 외쳐지고 있습니다. "자아를 찾기는 뭘 찾아. 별로 잘나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자식이나 잘 키워 훌륭하게 만들어야지"라고 자아를 찾겠다고 나서는 평범한 여성들을 비난합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을 다시 고전적으로 복구시켜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은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솔직하게 갈등의 요인을 찾고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한가지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점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곧 사랑이나 희생, 인내, 복종과 같은 덕목들이 실상은 어느 한 성이나 힘이 약한 자들에게 지워진 짐이었습니다. 모성과 가정의 부정적 측면들을 은폐하고 오히려 신화화하면서 그 안에 여성들의 희생, 복종, 인내를 강요한 측면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오랜 동안 모성이나 가족을 신화화해 온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 그것은 우리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저미며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는 이름이다' 라고 우리 대부분은 어머니를 위대하고 아름다운 인간상으로 찬양합니다. 그 찬양은 대부분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절대적 희생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모습은 대지나 고향으로 은유 됩니다. 모성은 존재의 근원, 삶의 조건 등 끝없이 주고 끝없이 수용하는 특성으로 대지와 동일시합니다. 고향으로 은유 됨은 마음이 포근해지고 착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태어난 곳, 생명의 시작, 존재의 뿌리, 회귀의 종착지, 비인간적 사회에서 겪는 갈등과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불안을 완화, 해소시켜서 위안과 휴식을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인간구원의 종교적인 역할을 하는 곳을 인간은 필요로 하며 그 역할을 전적으로 어머니인 여성에게서 구하는 것이 가부장 사회의 관습이며 규범입니다. 어떤 악한도 돌아갈 권리가 있는 곳으로 어머니는 부도덕자, 사형수 아들까지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인간구원의 성스러운 역할의 담당자입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인간의 이상향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되는 숭고한 사랑의 근원으로 표현되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머니에 대한 신화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 60년대 말 70년대 초반으로 서구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성에 대한 성취적, 긍정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신화화하였던 것을 다른 각도 곧 여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어머니 노릇에 숨겨진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들이 지금까지 터부시되어 왔음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여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고, 그 체계를 의식적으로 강화시키고, 그 구조를 유지시키게 하는 모든 기제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성신화는 가족신화와 함께 강화되는데 가족(가정)은 안전하고 부드러우며 편안하고 갈등이 없고 사랑이 담긴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과 달리 사회 곧 공적 영역은 갈등과 경쟁과 불안으로 가득 찬 곳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의 이상화의 책임은 어머니인 여성의 몫이 됩니다. 어머니는 평화와 화목과 안식과 휴식과 사랑을 유지시키고 만들어 내는 책임존재입니다. 어머니는 가족의 이상을 자기의 것으로 동일시시키고 자신의 이상은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모성은 고향이요 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삶의 모습이 이 신화와는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는 임금노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가정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매맞는 아내, 아동학대, 노인학대 등)도 우리의 상상을 넘을 정도로 많고, 이혼의 증대 등 가정신화의 기준에 맞는 정상가족이 적고 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화된 가족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이 짊어지는 점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이 책임 때문에 취업여성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동시에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이혼율의 증대에 대한 비난 역시 여성에게로 쏟아지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그러한 생활양식에 만족하지 않을 경우 그 원인을 여성들의 개인성향 탓으로 돌리고 그런 여성들은 비난을 받습니다.
여성이 대지로 비유된 것도 이데올로기적 은유입니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인간대 인간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대지 대 인간, 즉 어머니 대 남성으로 있도록 기대되는 것은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 가치가 형성되며, 존경받는 어머니가 됨으로서 마침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아버지 됨과 무관하게 인간으로 규정되는데 반해 여성은 어머니의 굴절을 통해서만 존재하도록 규범화하며 여성의 본질을 개념화합니다. 일반 어머니들이 자녀양육과 생계까지 떠맡으며 고통에 못 이겨 자살을 기도하거나 또는 종교에 심취되거나, 말없는 태도로 일관하거나, 정신 질환으로 시달리기까지 하는 구체적 삶을 간과하고 오히려 미화함으로써 어머니들의 헌신을 더욱 강요합니다.
고향의 포용성이라는 점도 사실은 자녀자신의 에너지를 자기변혁을 시도하는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게 하며, 주체적 인간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게 하고,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미분화를 지속시키게 합니다. 부도덕한 자식을 받아들이는 모성은 숭고한 모성애로 간주되지만, 무비판적 핏줄의식에서 악에 관대한 것은 비이성적 태도로 간주하여 상반된 윤리를 어머니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향은유는 현실적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환상적인 세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세계인 어머니를 환상세계인 고향에 대치시킬 때 억압은 가려지고 미화됩니다.
모성이데올로기의 또 하나의 문제는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지내는 것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은폐하는 데 있습니다. 부모역할은 이상적인 것으로 미화되며, 어린아이 역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측면만 부각시킬 뿐 그들이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점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부들은 고립감과 속박감을 느끼고 자기 일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성 이데올로기는 어머니와 자녀의 경험을 가족이라는 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여성을 고립화,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아동양육의 사회화를 이념적으로 방해합니다. 기혼여성의 취업률 상승과 자녀양육의 질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는데도 사회정책이 미미한 것은 모성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딜렘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는 이 일상적 사건이 여성에게는 무거운 짐과 억압이 됨을 인식하면서, 그렇다고 아이 낳는 일을 선택하였을 때 그 임무를 회피할 수도 없는 삶의 현실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성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또 그 모성을 사는 방법에도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성서 두 본문은 예수가 오셔서 전통적 질서들을 깨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질서를 제시하면서 오는 갈등과 분쟁의 역사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5:38∼42절은 5장부터 7장에 걸쳐 나오는 산상설교의 한 부분으로서 예수께서 철저히 낡은 질서들을 극복하시려고 새 윤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낡은 전통 질서와의 대결이 명백하게 제시됩니다. 5:21∼40절에 걸쳐 나오는 여섯 개의 반대명제들 곧 "...옛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형식으로 살인과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사랑에 대하여 옛 전통과 새 질서를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그 가운데 보복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구약의 윤리는 무자비하며 야만적이고, 예수의 윤리는 자비롭고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표현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약의 정신은 보복을 최소화하고 피 흘림의 경쟁을 막자는 데 있었습니다. 이 법들은 그 당시 부족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적용되던 법입니다. 보복법의 정신은 당시의 무지막지한 보복행위의 최소화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 그 법 정신은 퇴색되고 오히려 무자비한 보복의 근거가 되는 모순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대체로 보복은 돈으로 계산되기는 했지만 받은 만큼 보복하는 비인간적 상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어떤 경우에든 폭력의 부당성을 표명하고 비인간적 보복사상을 넘어설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유다 전승에는 "누가 너를 죽이려 하거든 그를 앞질러 가서 그를 죽여라" 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의 포기에 관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보복은 절대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적 정당성을 결코 논쟁하지 말라는 것이며, 자발적 협력을 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박해 당함에 참아야 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고려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예수에게서는 율법을 더 철저화하여 인간관계의 근원적 해결을 보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미움의 금지로, 간음은 음욕자체의 금지로, 요구와 책임에는 자발적 협력으로, 우호에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마태 5:17절에서는 이 모든 반명제의 전제를 밝히고 있습니다. 곧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를 폐하러 온 것 아니고 완성하려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율법 파괴자로 보는 무리가 있음을 연상케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예민하게 반박하는 모습 같습니다).
그러므로 5장은 율법의 철저한 윤리화를 요구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보는 것이 새 질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여성의 문제 곧 희생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갈등 문제도 단순하게 여성들이 그러한 가치들을 폐기시킨다고 단순화하여 비난하기보다는 문제의 근본을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즉 문제를 보는 관점의 전환방법을 예수로부터 시사 받게 됩니다. 오늘 여성들의 희생, 사랑 등의 가치에 도전함은 그것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함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두번째 본문 10장 34∼39절은 제자로서의 따름의 전제와 약속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 9:35∼38절에 제자 파송의 동기가 나오고 10:1∼4절에는 열두 제자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7∼42절에는 제자로서 따름의 전제와 약속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인내나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결단을 위하여 불화하고 나누고 거부하는 파괴의 태도를 극대화합니다. 이는 유대인에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유대인은 주의 날에 하나님이 역사를 파기할 때 가족을 가를 것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유대적 이해는 갈등이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와는 달리 예수는 하나님 나라 임재가 바로 갈등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차이를 가집니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갈등이요 평화가 아니라 칼이라는 표현은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는 바로 이점에서 새로운 역사가 갈등 없이 평탄하게 오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또 랍비들의 제자들이 스승을 골라서 찾아가는 것과 달리 제자들을 친히 부르고 자기를 따르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따름이 본문에 나타나듯이 종래의 직업을 포기하고 가정을 떠나는 것을 강경하게 요구합니다. 10:37절에는 가족과의 단절, 결별을 요구합니다. "부모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여 가족과의 단호한 결별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10:38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을 요구하는데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이 철저한 포기의 요구는 누가복음 14:33절에도 병행되고 있습니다. 직업의 포기, 가족을 떠남, 소유의 포기, 내일 일을 미리 돌보지 말 것(누가 12:22-32) 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가족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가족의 갈등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내용은 묵시문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물론 그러한 요소가 있다하더라도 가족의 문제가 중심적임에 대해 그간 주의를 기우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버리는 사람은 남성이라고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를 따라 다니고(아마 가정을 포기한 여성들도 많았다고 봅니다) 예수를 섬겼습니다(누가 8:1-3등). 바울 서신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외되고 주변화 되었던 여성들이나 부유한 여성들이 예수를 따르고 섬겼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성들이 계속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가족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다고 볼 수 있으며, 예수께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사건으로 보았다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족을 떠나는 일은 자기보호가 확보된 혈연관계를 떠나는 것이고, 애정적 가부장적 가족질서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거리이며 동시에 사회적 보장과 장래생활을 보장해줄 자녀를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거룩한 유산인 토지 등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혈족도, 부모도, 자녀도, 토지도, 이 모두가 버릴 수도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버릴 필요마저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버리는 자체에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바야흐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만사가 이제 달라지고, 하나님 나라는 종래의 것들을 물리치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의 새 가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가정에 역설적으로 다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종래 모든 유대관계들을 예수와의 생활공동체 관계에서 대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생활공동체는 예수와 더불어 제자들이 이루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 새로운 사건이 올 때는 갈등의 과정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낡은 질서와 새 질서의 갈등 사이에서 불확실하고 위험해 보이는 새 질서를 선택하는 것은 용기가 오히려 필요한 일입니다. 두 질서 사이에서의 선택, 하나의 포기와 다른 것의 선택문제를 요구받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새 사건의 출현은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습니다. 도전에의 거부자와 응답자로, 예수는 사실 선택에 대면해 있습니다. 그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새 질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는 완전히 새로운 가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새 가족구성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새 가정은 혈연을 초월하고 애정적으로 집착하는 관계를 초월합니다. 마가복음에 예수가 자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온 것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라고 한 것도 바로 새 가정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혈연과 애정적 집착을 넘어선 가족의 새로운 형성 때문에 이전의 가정들이 갈라지고 나뉘어 진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로 인하여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2∼53절에는 "한 가정에 다섯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하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하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며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이스라엘 가정들이 갈라지는 현상을 여실히 보이고 있습니다. 곳곳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 혈족과 갈등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오랜 가족과 씨족들을 통틀어서 예수의 새 가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예수는 철저하게 대조사회를 제시합니다. 새 가정의 모습은 첫째 지배질서의 거부입니다. 마가복음 10:35-45절을 보면 그는 지배구조라고 부르는 현 윤리적 사회의 질서와 반대되는 질서를 자기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 안에는 지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상호관계가 이루어 질 것을 요구합니다.
둘째로는 가부장적 아버지 가족이 종식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의 참조는 재미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포기가 강조되고 있음에 비해 마가복음에는 포기에 대한 보상의 내용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에 보면,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 치고 그 대가를 백배로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지금 현세에서는 박해도 당하지만 집들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와 토지를 받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자기들이 버린 모든 것을 제자들은 백배로 되돌려 얻게 된다고 합니다. 즉 모든 것을 버리라 한 것은 새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곧 새 가정을 얻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보상 항목에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학자들이 논란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기록자의 실수일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의 아버지의 중요성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됩니다. 예수가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라고 한 것을 기억할 때 예수 공동체 안에는 물론 아버지들도 속하여 있었지만 땅위의 누구를 압바라고 부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압바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 가운데는 아버지의 부재는 바로 가부장적 지배질서의 종식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의 애정에 의하여 지탱되던 가부장적 가족은 없어지고 하나님이 애정적 아버지가 되는 새 가족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새 가정은 과거 혈연적, 애정적 가부장제 가족관계(Pater familias)를 완전히 넘어서는 가정입니다. 혈연, 지연 등 인간적 지배관계가 없어지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고 평등한 공동체의 새 가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새 질서의 세계가 올 때 전통은 철저히 근본적 정신이 되 찾아지거나 새로운 질서를 위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특히 예수의 새 가정은 혈연을 넘어서며, 애정적 집착관계를 넘어서서 평등하며, 주변적 구성원들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두에 오늘의 여성들의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갈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서 본문을 비추어 보면 갈등하는 여성들의 태도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도전에 응답하는 몸부림이며 새 질서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통합적 모성 이해이며, 이 통합적 모성은 제일 먼저 생물학적 모성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또한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출산과 육아의 경험이 여성을 갑자기 모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초도로우는 모성성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길러지고 학습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성의 생물학적 측면, 즉 임신, 출산을 계기로 이루어지는 어머니와 자녀간의 유대와 애착이라는 측면과 거기서 오는 긍정적 요소들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조심스러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임신과 출산에 의한 유대와 애착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무시할 필요성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모성에 대하여 문제를 가지는 것은 그 생물학적 측면만 강조한 나머지 모성을 절대시하거나 모성에 내포된 현실적 긴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비 생물학적 측면이 부각되고 그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제 모성이 가지는 가치들 곧 돌봄이나 배려, 희생, 사랑 등의 특성들을 모성의 신화를 벗긴다고 해서 이런 가치들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남성과 여성이 공유하면서 건강하게 다듬어 나가야 함을 말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들로 인하여 모성에 얽매였던 제도적 장치들을 개혁하여 이 모성의 본질들을 훼손함이 없이 인류가 함께 공존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도적 모성의 얽매임을 벗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생물학적 모성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임을 다시 지적하게 됩니다. 생물학적 모성이 가지는 내 새끼 중심적이며 가족 이기적인 부정적 결과들에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모성에의 집착은 가부장적 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한 짐이었습니다. 전통적 모성의 관념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가부장적 모성을 넘어선 변화된 어머니들이 주체적으로 모성의 개혁에 참여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왜곡된 사랑으로 키울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양육의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양육은 이제 가족이 공유해 나가야 할 것이며 핵가족 사회에서 이 일은 보다 확대된 가족간의 연대나 사회적 책임(탁아소와 탁노소의 확대 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공동 육아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모성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비난으로서가 아니라 대안의 제시를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예수시대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출현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을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이루어 내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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