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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하나

마태복음 한인섭............... 조회 수 1971 추천 수 0 2008.06.20 12: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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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5:34-40 
설교자 : 한인섭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저는 이번 여름방학에 전국의 교도소를 돌았습니다.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복역중인 수형자들을 면담하고 설문지를 돌리고 교도관들에게 질문을 구했습니다. 저의 관심은 무기형이란 앞이 내다보이지 않은 절망 가운데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적응하고 또 문제를 일으키는가, 그리고 그들이 한참 뒤에 사회에 복귀할 때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무기 수형자(남자.여자)를 만나면서 학문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으로 제가 가졌던 선입관 중 거의 대부분이 잘못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이웃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이 저절로 의문으로 떠올랐고,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들이 여럿 떠올랐습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몇 구절을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재음미 해보고자 합니다.

무기수들은 거의 살인한 사람들입니다. 살인, 강도살인 등의 행위를 저질렀고,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흉악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물론 같이 동행한 대학원생들도 무기수들을 면접한다고 할 때 일말의 두려움이 솔직히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에게도 그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들과 같이 생활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느냐고요. 그들은 무기수의 대부분은 우발범이며, 다수는 초범이어서, 소수가 문제수로 떠오르지만 그 기본 심성은 보통 재소자와 다름이 없거나 오히려 괜찮은 편이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무기수의 시간대별 적응과정도 어떤 패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처음 2-3년 간은 그냥 절망감에서, 혹은 시설 내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이 보내고 3-5년 정도면 대단히 큰 심리적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에는 사회적 접촉도 거의 끊기고, 가족적 유대도 파괴되며, 긴 기간을 교도소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시간의 중압감이 현실화되면서 가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다 5년 정도를 살다보면 그 살아온 기간이 아깝고 또 앞으로 잘 견디면 10여년 뒤 출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적응하게 됩니다. 10년 정도에 이르면 무기수의 상당수는 옥중에서 모범수로서 시설 내에서 적응하고 소내 운영에 적극 협력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은 물론 (가)석방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오래 교도소에 살아도 자유의 희망을 놓치는 재소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고, 소소한 언쟁부터 큰 분쟁까지 생겨날 수 있지만, 무기수의 대부분은 다른 수형자보다 훨씬 잘 참습니다. 무기수의 범죄가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소내에서 분쟁이 생겨도 '10초만 참자', 내가 이 곳으로 온게 단 10초를 못참아서 그랬다고 반성하면서, 꾹 눌러 참습니다. 교정사고 건수 면에서 무기수는 단기수보다 훨씬 적습니다. 적어도 5년 정도 경과한 이후의 무기수에게 교정 사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열심히 살다보면 대략 15년-18년 정도 후에는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십몇년 뒤의 그 희망을 위해 그들이 참고 참으며, 적응하고 각종 자격증을 따고 상점을 따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자유의 귀중함을 느꼈고, 그 자유의 향유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신에 대한 인내가 필요함을 재삼 느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에는 사랑의 요소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앞에 나오는 내용이 "오래 참고, 온유하며"라고 쓰고 있습니다. 참는다, 온유하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한다는 것이며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인데, 거기에 더하여 적어도 타인을 해치지 않는 공동체 생활에서 최소한의 덕목이 참을 것, 온유할 것임을 저는 느꼈습니다.

십여년 전에 발생한 **호텔 방화사건을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 범인은 사형을 면하고 지금도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아인 데다 14살 때 전신화상을 입었습니다. 얼굴만 봐도 외면할 '괴물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이중삼중으로 냉대 받았고, 그것은 다시 사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반응되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와서도 그는 전혀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14년간 전국 교도소에서 각종 사고, 인질극을 벌였고, 그러다 보니 전국 교도소를 전전했습니다. 그에게 사회는 의미 없는 것이었고, "인생을 일부러 망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14년째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당시 교도소의 "총반장"에 해당하는 다른 무기수가 그를 만나자마자 "손을 꽉 잡아주었습니다". 얼굴만 봐도 누구나 외면부터 하는 이 죄인을 만나자마자 주저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은 그에게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상담하다, 지금은 원예반장으로 교도소내의 꽃과 나무를 가꾸고 있습니다. 그의 희망은 출소 후 화원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사실 무기수의 얼굴 중에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외면하고픈 본능이 생기는 모습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재소자와 만나면서 먼저 시선을 정면으로 하면서 손을 꽉 잡았습니다. 한 사람의 따뜻한 손길과 눈길-그것만으로 가장 흉악범이자 문제수를 바꾸는 데 충분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저는 요한복음 9:1-3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된 불행한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그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범한 것도 그 부모가 죄를 범한 탓도 아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려 함이다." 그러면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이 물리적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이미 눈을 뜬 것과 다름없는 은총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마치 심봉사가 죽은 줄만 알았던 심청의 음성을 듣고, 이미 눈을 뜬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날 때부터 절망과 저주와 소외의 삶을 살아야 했던 한 불행한 인간에게, 그 불행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잔학한 행동 속에 깃들어 있는 불행한 삶을 떠올리면서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준 것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같은 질임을,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사람을 '눈뜨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많은 범죄자는 실제로나 정서적으로 파괴된 가정의 산물입니다. 15살 때까지 가정과 사회의 피해자, 소외자가 이후 가정과 사회에 복수하는 것이 범죄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많은 무기수(살인자)들도 전체적으로 보면 불행한 가정과 사회적 냉대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무기징역(혹은 장기징역)은 또 다른 가정파괴의 원인이 됩니다. 장기형을 살다보면 가족을 포함한 가까운 사람들과 단절됩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살인범죄 자체가 대개 가정과 연관된 것이기에 범죄를 통해 가정이 이미 파괴됩니다. 그들이 범죄하기까지, 그리고 범죄한 이후 모두 가정적 애정의 단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교정당국은 자매결연 제도를 통해 가정적 따뜻함을 연결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상당한 성과도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17년(?)동안 복역하고 있는 한 모범수를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만난 어떤 무기수보다도 그의 표정과 말투는 선량했고 밝았습니다. 온 몸에 밝은 기가 가득 전달되어 왔다고나 할까요. 그는 고아 출신으로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무기형을 살면서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학사고시도 통과했습니다. 안에서는 다른 재소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비슷한 조건의 동료들이 누리고 있는 특혜들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모범재소자들은 최근 5박6일의 귀휴를 다녀올 수 있었지만(그 귀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요), 그는 귀휴할 가정이 없기에 귀휴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이란 게 사실은 엄청난 특혜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에게 가정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평생의 장애처럼 작용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쳐 왔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대학원생들과 함께 우리가 한번 그 사람을 귀휴하도록 도와줄까 의논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5박6일 동안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5박6일 숙식비를 대는 것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귀휴의 취지에 맞게끔 거처와 직장을 알선하고, (있다면) 친척들을 만나고 하는 일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생각하니 잠시 아득해졌습니다.
더욱이 그를 우리 집안으로 끌어들여 같이 식사하고 또 재우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조금도 경계심 없이 편안하게 그를 환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니 좀더 아득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장발장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을 읽었던 장발장 말입니다. 장발장도 19년 간이나 복역했던 장기수이고, 출소했을 때도 그 범죄성이 변함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 제가 만난 무기수들보다 훨씬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아걸고 경계의 눈초리를 거둡니다. 미리엘 주교는 아무 조건없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환대해 들입니다. 한밤중에 장발장은 은식기를 훔쳐가다가 경관에게 붙잡혀 다시 미리엘 주교 앞에 끌려옵니다. 이 은혜도 모르는 패륜적 범죄자에게 돌아갈 곳은 당연히 교도소일 것입니다. 그의 완악함을 꺽은 것은 '왜 선물한 은촛대는 함께 가져가지 않았소'라는 미리엘 주교의 감싸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 뒤 장발장은 암담한 생각과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 소리없는 선행으로 일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읽으면서 우리는 주민들을 비난했고, 그들이 범죄자의 원만한 사회정착(사회복귀)을 막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미리엘 주교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말입니다. 그러나 막상 내 문제가 되자말자, 과연 우리가 그 주민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미리엘 주교는 거의 기적같이 어려운 일을 한 것이 아닌가 느끼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봅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은 매우 간단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절친한 친구나 가족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아마 장발장이 그 전형적 예이겠지요. 제가 본 무기수들도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것(가령 가족적 유대, 지식, 재산, 사회적 연대)을 거의 갖지 못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임을 느낍니다. 그들 중 많이도 아닌 "하나"에게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시간에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비유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지극하셔서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범죄를 연구하는 저는 조금 다르게도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양은 언제 황야의 이리로 변할지 모릅니다. 사랑과 선을 먹고 살아가지 못하면 양이 이리로 변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출한 청소년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범죄자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번 탈선의 궤도에 올라타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가끔 예감하면서도 그 궤도에서 이탈하기란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넓습니다. 넓은 길은 여럿이 많이 다니는 길이기에 또 외롭지도 않습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선배, 동료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고, 후배들이 자신이 낸 길을 따라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가는 대로 별 생각없이 가다보면 마침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다 같이 빠지면 집단각성이라도 생겨날 텐데, 구렁텅이에 빠질 때는 나 혼자 빠집니다. 그리고 남은 나를 내치고 또 넓은 길로 걸어갑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개인적으로 구렁텅이에 빠질 것입니다.

청소년범죄자만 그런 게 아니고 화이트칼라 범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남과 마찬가지로 접대를 받았고 돈을 받았습니다. 일단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돈을 받기는 쉬워도 안받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만 안받기로 결단하면 족하지 않고, 자기가 안 받는 것이 조직과 주변에 큰 불편을 불러일으키고 평판도 나빠집니다. 그런 분위기에 젖다보면 남이 다 간 넓은 길은 참으로 가기 편한데, 남이 가려고 하지 않아 길도 잘 나 있지 않은 좁은 길을 혼자 걷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좁은 길을 넓히려는 노력과 지원이 없이는, 좁은 길을 걷고자 결심하다가 결국 좌절하여 넓은 길(남이 하는대로 하는 것)을 선택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때문에 어떤 단계에 접어든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다른 길"이 있음을 일깨우고, 그 "다른 길"로 유도하는 관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언젠가 박창원 형제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부 못하고 집안형편이 안좋은 중고생을 뽑아 장학금을 주는 데가 있다고, 그 장학생 후보를 찾는다고 말입니다. 언 듯 보면 참으로 엉뚱한 이야깁니다. 장학금은 무언가 탁월함을 보이는 이들을 위해 예비된 것인데, 아무 장점도 없는 이들에게 장학금이라니요. 그러나 집안형편도 안 좋은데 공부도 못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가정과 학교로부터 천덕꾸러기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칭찬은커녕 온갖 모욕과 인격 모욕적 언행을 받아왔고, 혹은 그보다 더한 무관심의 징벌을 받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런 모욕과 무관심이 내면에 축적되면 그것은 범죄적 반응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을 것입니다. 그가 범죄자로 돌변하면 남이 한평생 쌓아온 안온한 가정이나 개인의 신체와 생명까지 빼앗는 일까지 생깁니다. 우수한 학생은 우수함 자체로 이미 사회적 포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수하다고 해야 대체로 장차 자신과 그 가족의 앞가림하는 정도(그것도 대단한 것이지만)에 그칩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자신은 물론 남의 행복까지 망치고, 그 피해는 훨씬 큽니다. 따라서 문제소년→범죄소년→성인으로 악화되기를 막는 길은 사회적 유대와 관심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격려하고 관심을 갖는 방법으로 장학금 제도를 만든 것,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배려일 것이고 하나님 사업에 합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행하는 크고 작은 봉사사업의 방향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격려하고 보살피는 방향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선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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