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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엔 예수의 웃음이

마태복음 조태연 목사............... 조회 수 1794 추천 수 0 2008.06.25 10: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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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26-30 
설교자 : 조태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1. 말씀의 준거, 신학의 전거

아포리즘과 비유 등 예수의 가르침은, 물씬 느끼도록 그 분의 체취와 육성을 가득 담고 있다. 예수의 아포리즘은, 세상의 너무나 뻔한 진리(관습적 지혜)를 비웃듯, 도발하며 생(生)을 되묻게 한다.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신화'를 뒤엎고 세계를 부숨으로써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회적 통념을 깨버린다. 대안적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아포리즘과 비유 등 당신의 가르침에서 예수는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사람의 아들(人子)을 자처하지 않는다. 더욱이, 죄없이 그러나 인생들의 죄를 위해 대신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로 우리들 가운데 화려하게 현현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기막힌 시상(詩想)을 가진 이야기꾼이며 이야기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세계를 부수는' 비범한 통찰이 가득하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상징)를 자극함으로써 그 나라의 참여자가 되도록 청중을 연루시킨다. 예수는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다스림)를 이루는 '이야기 신학자'이다.
예수는 무엇을 이야기하였는가? 그의 이야기는 당대의 명사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그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내노라 하는 사상가나 교사들과 많이 달랐다. 하늘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선지자)처럼 "나 야훼가 말하느니라, 너희는 ...하라"고 하지 않았다. 거룩한 율법을 제정한 자들처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구약성서나 권위 있는 선생들의 의견을 인용함으로써 당신이 가르치는 말씀의 어떤 권위를 보장받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외적 권위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은 권위 있는 교사들은 모두 신적 권위에 호소하였으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는 올바른 믿음이나 건전한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다. 토라를 가르치는 율법 교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더욱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이나 출애굽 사건 등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구원사'라 부른다)를 들먹이지도 않았다. 성전이나 율법 혹은 전통이나 회당 등 이른바 유대인들의 거대담론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예수의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였다면, 그것은 성전이나 율법 혹은 구원사와 같이 '성스러운'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흔하디흔한 '자연'의 미물들이었다. 이들을 거론함으로써 그 나라의 화두(話頭)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1) 예수의 짤막한 가르침들 즉 경구로 말하자면 이렇다: 크리스챤의 실존을 말하기 위하여 산 위에 있는 마을(도시)을 말하고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을 이야기한다(마 5:14-15).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깨우치고자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여준다(마 6:26-29). 심지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조차 인생의 스승이 될 수 있다(마 6:30). 진실된 예언자와 거짓된 예언자를 분별하려면 엉겅퀴와 포도 그리고 나무와 열매를 보는 것이 좋다(마 7:16-17 = 눅 6:43-44). (2) 예수의 '비유'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쩌면 길이나 돌밭 등 여러 곳에 뿌려진 씨와 같다(막 4:3-9; 도마 9). 아니, 하나님의 나라는 어쩌면 겨자씨 한 알과 같다(눅 13:18-20; 마 13:31-32; 막 4:30-32; 도마 20). 아니아니, 그 나라는 어쩌면 농부의 예상과는 달리 스스로 자라나는 씨와 같다(막 4:26-29). 예수는 오히려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예수의 신학은 자연신학이다. 예수 말씀의 권위는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무엇을 볼 때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라는 초대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언어는 결코 '거룩한'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자연물 뿐 아니라 뭇 인생들의 경험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1) 예수의 경구들을 살펴보라: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는 일(마 5:39-42),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마 7:3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일에 대한 인간의 상상(마 19:24), 하루살이는 걸러내며 약대는 삼키는 어리석은 자들(마 23:24),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는 일(마 23:12 = 눅 14:11).... 예수의 이러한 말씀들은 거룩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는 너무나 '세속적인' 일들이었다. (2) 예수의 비유들도 마찬가지였다. 양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목자의 일은 흐뭇하기만 하다(눅 15:4-7). 밀가루와 누룩으로 빵을 만드는 아낙네는 얼마나 정겨운가?(마 13:33). 밭을 갈다 보화를 발견한 아저씨의 경우는 얼마나 행운이었나? 괜찮은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했으나 거리의 부랑아들이 차지했다는 것은, 죽 쒀서 개 준 꼴이 아닌가?(눅 14:16-24 = 마 22:2-14). 실직의 순간에 문서를 변조하고 위기를 넘긴 청지기는 얼마나 교활하였나?(눅 16:1-8). 죽음의 위기에서 혐오스런 사마리아인의 그 가증스런 도움을 거절치 못한 한 유대인의 일화는 듣기에도 끔찍스럽다(눅 10:30-35). 예수는 오히려 인생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예수의 신학은 인생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야기 신학'이다. 예수 말씀의 권위는 인생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인생을 볼 때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라는 초대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신학적 전거는 그러므로 비밀스런 이상도 아니었고 천사를 통한 계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묵시나 계시를 통해 오질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있는 신학의 소재란, 당시 모든 이들에게 익숙한 평범한 일들 뿐이었다. 그것은 AD 1세기 팔레스틴의 시골 환경이며 농경 생활이었고 자연이며 그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평균적 인간들의 일상적인 경험들이었다. 어쩌면 방랑의 생활 가운데 예수가 경험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신학적 전거는 결코 '초월적'이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자연과 인간의 일상사에 대한 관찰을 통해 왔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이야기 신학은 곧 '자연 신학'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이렇게 성(聖)의 궤적을 이탈하여 속(俗)의 지평에 속한 일들이었다. 어떤 것은 정겹고 어떤 것은 꼴사나우며 또 어떤 것은 섬뜩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만 설명되었다. 그것은 땅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승으로부터 조금도 비끼질 않았다. 그렇게 영적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초월적이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내세적이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오직 사실적이었고 오직 실제적이었으며, 그 나라는 인간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전에서 장터로 꺼내왔고 그 나라의 진리를 회당에서 저작거리로 옮겨왔다.

3. 비범한, 너무나 비범한

예수는 분명 성전보다는 장터를 좋아했고 하늘보다는 땅을 말했으며 '초현실'보다는 '현실'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분명 리얼리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생동감 있고 현장감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가 그 안에 살아가며 모두가 수용한 '세계'였다. 그러나 예수의 비범성도 여기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돌발성도 여기에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말하자. 여느 사람들 같으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로부터 먼지만 휘날릴 뿐 험하고도 위태로운 여행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평범한 여행을 통하여 이웃으로 가는 길, 인간의 인간됨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궁극적 실재 곧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관심과 선입견 그리고 옹졸함의 강을 건너도록 손짓하는 것이다.
비유든 아포리즘이든 예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상상력 넘치고 기지가 뛰어나며 통찰력을 가득 내포하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예외 없이 '예상치 않은 전환'을 통하여 '기대의 구조'를 이탈하고 마침내 '세계'의 심층 구조를 부수었다. 이를테면, 의롭고 정결한 자의 전형인 바리새인이 의롭지 못하다고 심판 받고 그 대신 이미 추방된 자가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이교도이자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이 착할 수 있고 비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인가?(눅 10:30-3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던 고급 수입목재인 백향목이 아니라 잡초 같은 겨자 나물이란 말인가?(눅 13:18-20; 마 13:31-32; 막 4:30-32; 도마 20). 더욱이 우주의 중심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올곧게 뻗은 백향목 같은 메시아 왕국이 아니라, 황야의 아무 곳이나 하찮게 널부러진 나물 같이 작고 초라한 세상이 어찌 하나님의 나라란 말인가? 교활함의 극치이며 정녕 음모와 배반이 다스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면, 이것은 어떠한 나라인가?(눅 16:1-8). 예수는 이렇게 '가치의 반전,' '신화 뒤집기,' 혹은 '세계 전복'의 경험과 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청중에게 도달하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상상하고 또 구연하였던 이야기들이야말로 보편성 속에 있는 특이질이며, 평범성을 가장한 비범성이고, 일상으로 나타나는 일탈이었다 할 것이다.
예수가 일종의 인습타파적 가르침으로써 새로운 지혜를 가르쳤다면, 그의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이었다 할 수 있다. 예수는 부자가 화를 당하며 가난한 자가 복된 자인 세상을 지향하였다(눅 6:20,23). 그는 첫째가 꼴찌 되며 꼴찌가 첫째 되는 세상을 추구하였다(막 9:35).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반대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는 세상이기도 하다(눅 14;11; 18:14). 인습타파적 지혜에 기초하여 예수의 꿈꿔온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었다면, 그 세상은 일종의 '대안적 세상'이었다 할 수 있다.
예수의 웃음도, 그 분의 재치도, 그 가르침의 역설과 충격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봄'(관찰)이 너무나 현세적이었고 현실적이었던 만큼, 그의 표현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생생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는 너무나 은유적이었고 상징적이었기로, 그의 손가락은 어김없이 현실에서의 일상적 경험을 넘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일상을 말하였으나 실상은 축제를 일컬음이었고, 세속을 말하였으나 알고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뜻함이었다. 여기 예수의 언어에는 심한 과장이 있고 큰 역설이 있으며 숱한 놀람과 충격이 있다. 어떤 이는 예수의 뚱딴지같은 말에 '실없는' 웃음을 짓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니, 어떤 이는 예수의 말이 자신의 기대를 완전히 비껴갔을 때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이는 깊은 깨달음 뒤에 혼자만이 알 수 있는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을 것이다.

4. 예수의 웃음

예수의 언어나 화두가 세속적이었지만 그의 신학과 사상이 비범하였다면, 그의 '세속성'과 '비범성' 사이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웃음과 해학이 아니었고 낭만과 낙관이 아니었을까? 낭만이든 낙관이든 웃음이든 해학이든, 역시 자연의 하찮은 미물을 나이브하게 그러나 맑은 눈으로 관찰할 때, 또한 숨을 죽이고서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숨결을 코 끝에 감지할 때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의 아포리즘도 그의 비유도, 모두가 이에 다름 아니다. 세속으로부터 비범으로의 비상은 그렇게 예수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러하듯, 격언과 세상의 지혜가 주는 것은 근심 뿐이다. 사회적으로는 인간을 계급화하고 심리적으로는 우리를 소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강한 자는 잘 나가는 엘리뜨가 되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이내 위축되거나 비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지혜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내 예민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의 불안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내는 사람들,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고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 안절부절 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나 혈통(가족)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음식, 옷, 수명, 그리고 내일에 대한 염려야말로 그 전형이었다.
그러나 공중의 새를 보고, 들에 핀 백합화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그 하찮은 들풀을 보라. 아니면 이 작은 것들의 그 아름다운 자태와 그 해맑은 목소리에 담긴 예수의 말씀을 들으라. 인간들은 실로 우주적 관대함으로 가득 찬 실재에 눈 뜰 수 있는가? 무엇을 염려하는가? 왜 근심하는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6-30 = 눅 12:24-28).

모두가 자연에서 얻은 시적인 이미지들이다. 예수가 바라본 자연 세계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세계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주의 깊게 바라봄으로써 그 속에 드러난 신적 특성의 빛을 보라 요청한다. 존재의 현실은 우주적 관용과 넘쳐흐르는 생명의 광휘(光輝)로 특징지어져 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의 광휘가 스며있다. 자연은 넉넉하게 보살펴주는 우주적 관대함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진실로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시며,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분이시다(마 5:45)! 그 분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많은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눅 12:6-7 = 마 10:29-31). 많은 비유들과 경구들에서 예수의 하나님은 심판자 또는 충족시켜야 할 요구조건을 내걸거나 격언과 세상의 지혜를 정당화시켜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분은 친절하고 자비로운 존재로 보도록 권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자연계와 그 일부인 인간 경험을 소재로 하였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광휘가 스민 것이 어찌 자연계 뿐이랴? 하나님의 은혜와 우주적 관대함은 자연계 뿐 아니라 인간계에서도 드러났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인간관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의 비유들을 보면, 하루가 끝날 무렵 문 닫는 시간에 농장에 나타난 품꾼들에게도 주인은 온전한 하루 품삯을 지불한다(마 20:1-15). 방황하던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하해와 같은 사랑과 은혜를 입는다(눅 15:11-32). 예수는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써, 그 열려진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을 부르신다. 기실, 예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였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 이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차별적 경계선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비교, 눅 6:35).

5. 예수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예수 살기

세계 전복의 기획으로서의 예수 가르침의 특이질과 비범성 그리고 정신적/관행적 일탈은 필경 그의 비범한 '삶의 경험'에서 왔을 것이다. 그 경험이란, 정착하며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행을 자처하여 방랑하면서 살아가던 그 어떤 것이었다. 그의 방랑이 그에게 언제나 환영과 환대만을 보장했을까? 예수라고 어찌 배신과 배척을 모르고 살았을까? 때로는 환영할 사람도 심지어 배척할 사람도 없는 먼 길을 걸을 때가 있진 않았을까? 그가 아무리 환영과 후대(厚待)를 받았을지언정, 그는 야생 조류나 들짐승만도 못한 존재이기 일쑤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7-58; 마 8:19-20; 도마 86). 그의 이러한 삶이 그를 더욱 사회적으로 실패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고립시키지는 않았을까? 예수 삶과 사상은 버림받음과 실패의 쓰라린 사회적 경험 속에 잉태한 씨앗이며 그 열매라 할까? 그러나 그 열매는 달았고, 그의 가르침은 낭만과 낙관으로 가득찼다. 들풀(잡초)보다도 더 강인하고 백합꽃보다도 더 자신 있으며 하늘의 새보다도 더 해맑은 목소리로 나타났다(마 6:26-30 = 눅 12:24-28).
예수에게 영성이란 피안의 세계에 있는 초인적/초월적 존재를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전과 토라(율법) 그리고 민족과 구원을 논하는 거창한 이야기(거대담론)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흔하디흔한 배타적 그리스도론(그리스도 담론) 하나 없고 그가 주도하는 구원사 한 쪽 없다. 영성과 신학함이란 지금 내 곁에 있어 나를 연루시킨 그 문제들을 풀어나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기획이었다. 영성이란 또 신학함이란, 그래서 내 곁에 있는 자연과 나의 일상사 그리고 평범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자연의 평범성과 인간의 일상성 속에 있고 우리들 환경의 복판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평범한 사건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인간의 모든 인위적/작위적/문화적 노력(culture)은 오히려 자연(nature)을 거스릴 뿐이고 하나님을 거역할 따름이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사건도 예수 자신의 인격이나 사역에 관련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가 종결되며 이 세계가 증발한 후 갑작스레 임하는 묵시종말론적 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초월이 아니라 현실(내재)를, 그리고 영(靈)이 아니라 육(肉)과 자연을 이야기하였다.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말이다. 역사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존중하며 과정 곧 인과관계를 중시하였다.
예수에게 신학과 영성이란 '자연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수의 이야기 신학은 오늘날 산업화와 현대화가 몰고 온 자본주의 문화 속에 있는 우리에게 적쟎은 충격과 메시지를 남겼다. 경쟁과 동료 상해 그리고 심지어 그 알량한 자본을 얻기 위해 살부(殺父)와 살식(殺息)을 마다하지 않는 이 각박한 현실에 처한 뜻모를 '자본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어떠한 존재인가?
우리들 신학도 그리고 신앙인들은 그의 음성을 되뇌이며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더욱이, 우리네 인생들의 살아가는 가슴 풋풋한 사연들도 언필칭 신학의 '거룩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들 인생의 진한 경험도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머무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연을 소재로 하는 영성과 신학, 그래서 영성도 신학도 가장 자연스러워지며 신앙인도 신학자도 가장 자연스러워지는 그런 영성은 가능할까? 그런 신학은 가능할까? 그런 영성 그런 신학함 때문에 또 그런 선포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교인도 그리고 모든 인간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실패의 경험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역사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비관보다는 낙관이 넘칠 수 있을까? 단조로움과 무료함 그리고 고독 속에서도 병들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 삶의 일상성 속에 그리고 이 자연과 환경 속에 이뤄감을 느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건을 품는 환경이 되도록 우리들 삶과 이 자연은 그렇게 순결하고 맑아질 수 있을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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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마태복음 수성(守城)인가, 공성(攻城)인가? 마16:18-19  김창락 목사  2008-09-04 1364
110 마태복음 왜 사느냐고 물으면 마16:24-26  류상태 목사  2008-09-04 1679
109 마태복음 휘장은 찢어져 있는가? 마27:50-52  한세희 형제  2008-09-04 1443
108 마태복음 스스로를 지우시는 하나님 마16:23-25  한완상 형제  2008-09-02 1288
107 마태복음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한국교인들 마6:24  한완상 형제  2008-06-25 1704
» 마태복음 하늘과 땅엔 예수의 웃음이 마6:26-30  조태현 목사  2008-06-25 1794
105 마태복음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마25:34-40  한인섭 목사  2008-06-20 1973
104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103 마태복음 말씀과 실천 마7:24-27  정하영 목사  2008-06-06 1807
102 마태복음 죄짓게 한 자에게 화가 있다 마5:20-26  최영실 교수  2008-06-06 1655
101 마태복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11:28-30  서중석 목사  2008-06-06 7863
100 마태복음 크리스마스의 기분과 예수가족의 아픔 마1:18-25  한완상 형제  2008-06-06 1948
99 마태복음 저주받은 도시들 마11:20-24  박광현 목사  2008-06-0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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