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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지우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288 추천 수 0 2008.09.02 17: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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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23-25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5.12. 4 주일설교 
제목: 스스로를 지우시는 하나님
본문: 마태복음 16:23~25, 요한복음 14:1~6
설교: 한완상 형제  (새길교회 2005.12. 4 주일설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 14장 6절)
이 메시지는 가장 깨닫기 힘든 성서의 말씀이다.
가장 오해 많이 받고, 가장 오해 많이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가장 독선적인 선언 같으면서도 또한 가장 감동적인 울림이기도 하다. 종교적 포용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편협하고 독선적인 종교선언으로 들리기도 하며 극단적인 종교 배타주의를 부추기는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교회 복음의 배타적 특권을 확신하는 신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확신과 감동의 파장으로 울릴 것이다. 여하튼 기독교 안팎에서 이 메시지는 뜨거운 찬성과 맹렬한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체주의적 체제와 문화가 20세기와 더불어 점점 사라지고, 다양성과 포용의 문화가 착실하게 자리 잡으려고 하는 21세기에 예수의 이 말씀은 언뜻 생각하기엔 그 적합성(relevance)을 상실한 언어로 인식되기 쉽다. 흑백 문화와 사고는 가고, 무지개 문화가 오고 있는 이 시대,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마침, 종교다원주의와 포용주의가 힘차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한국기독교 안에서 이 말씀의 올곧은 이해가 더욱 촉구된다. 그런가 하면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이라는 말씀을 교회 밖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확신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 상황에서 이 말씀을 올곧게 인식하는 것, 올곧게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지만 그만큼 적절한 것 같다. 특히, 예수 탄생을 기리는 이 계절에 예수의 본질에 관계되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은 뜻 깊은 성탄절맞이 행위라 아니 할 수 없다. 나 자신 이 말씀이 어렸을 때는 확신의 기쁜 소식으로 가슴에 다가 왔다. 그러다가 한때는 이것이 하나의 종교적 스캔들로, 곧 종교적 독선으로 인해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말씀을 새롭게 감동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그런가!

첫째, 예수님은 길이기에 그러하다. 길이 없는 곳에 인간 삶은 고되고, 고달프고, 불안하고 위험하기 마련이다. 길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 삶이 평온해지고, 예측 가능해지고 안정된다. 특히 빛이 없이 사방이 어두컴컴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방향을 잃고 헤매일 때도 그러하다. 길이 있다함은 그 곳에 빛이 있다 함과 같다. 내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둠 속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 일로 브라질에 간적이 있다.
에퀴토스라는 곳으로 가서 아마존의 밀림지대를 잠시 둘러보았다. 정글에 한 시간 가량 들어가 보았는데, 대낮인데 빛이 우거진 숲에 차단되어 어둑어둑 했을 뿐만 아니라,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옛날 군사독재시대, 반체제인사들을 고공에서 아마존 밀림지역으로 떨어뜨렸다는 소문이 문득 생각났다. 길 없는 아마존 숲은 떨어지는 사람들에겐 바로 죽음으로 향한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길이 선명해야 질서도 가능해진다. 그러기에 길은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도(道)이기도 하다. 그 길에 따라 살아가는 한 그곳에는 질서 있는 희망의 삶이 펼쳐지게 된다.

그런데 내가 “나는 길이다”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새삼 감동하는 까닭은 길이 도시의 선(線)처럼 교통질서와 생명의 안전을 담보해 주기 때문만 아니다. ‘내가 길이다’라는 예수님의 고백은 나를 길처럼 밟고 가라는 뜻이 소중하게 담겨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밟을수록 더욱 길다워 진다. 밟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다. 단단한 길일수록, 안정된 길일수록, 반듯한 길일수록 그것은 그만큼 많이 밟혔기 때문이다. 앞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밟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그 길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평안을 동시에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많이 밟도록 초청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밟힘으로써 인간들에게 참 희망과 질서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이 곧 값진 은총이다.

밟히는 아픔은 일종의 용서의 아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는 조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빠라고 불렀던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를 핍박했던 사람이 비록 용서를 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는 일,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이요, 부자연스러운 일이요, 어떻게 보면 옳지 못한(unjust)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유대인이 히틀러를 용서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일이요, 히틀러의 반(反) 인륜적 범죄를 용인하는 옳지 못한 짓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지독하게 밟히는 아픔이라 하겠다. 그런데 바로 그 아픔을 길 되신 예수께서는 스스로 껴안으시고 겪으셨다. 그래서 “나는 길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같은 선언 속에는 전지전능한 신이기에 모두 무릎 꿇고 무조건 경배하라는 독선적 명령과 강요는 전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오히려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밑바닥 길처럼 되기를 결단하신 우리 아빠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우리 어머니들의 이마에 깊이 팬 주름살도 자식들에 의해 오랫동안 밟힌 사랑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나는 진리다”라고 예수는 선포했다.
진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탐욕과 독선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다.
지배와 억압으로 이끄는 길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힘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장 32절)의 선언이 바로 그 힘이다.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예수의 선포는 인간의 탐욕과 독선, 그리고 오만이라는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선포다. 독선, 오만, 탐욕의 죄는 세속역사에서는 독재와 전체주의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종교역사에서는 배타주의적 확신에서 잘 나타난다.

“진리는 오직 하나다”라는 맹신과 확신과 광신은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때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제약하고 말살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런데 종교적 전체주의는 세속적 전체주의 보다 더 잔인하고 더 위선적이며, 더 위험하다. 마녀사냥, 종교재판 등 지난날 기독교가 저질렀던 온갖 범죄를 생각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나는 진리다”란 외침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약속한 예수의 해방 선언이다. 예수님 자신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받았던 사탄의 시험은 곧 탐욕과 지배와 독선의 유혹이기도 했다. 주님은 그것을 물리치심으로 참 자유와 해방을 얻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같은 진리의 자유가 넘쳐흐르는 시간이다. 그리고 마당이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길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 또한 이 같은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라는 권고요 초청이다. 악에서 구해주소서라는 주기도문도 경제적 탐욕과 정치적 억압과 종교적 탐욕의 현실적 죄 사슬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 표현이다.

헌데 현실 세계에서는 죄의 권세는 항상 이 같은 진리의 자유를 누리려는 사람들을 핍박한다. 진리자체이신 예수님의 삶은 그러기에 죄의 권세에 의해 시달리고, 배척당하고, 억압당하셨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시기까지 하셨다. 빌라도는 세속권세의 주역으로 피고인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빌라도의 심문에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라고 대답했을 때 자기 눈앞에 서계신 진리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진리는 그 자유케 하는 힘 때문에 자유를 제약하려는 권세에 의해 핍박당하게 된다. 핍박하는 권세는 진리를 억압하고 압살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빌라도처럼. 이것이 인간역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을 통해서 진리의 힘, 곧 자유케 하는 힘이 놀랍게 폭발한다는 사실을 권세자들은 더더욱 잘 모르고 있다.

부활은 바로 이 자유케하는 진리의 자기 폭발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진리 되시는 예수님은 종교적 배타주의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말살하려는 모든 “신성한” 움직임을 주도하신 분이 결코 아니다. 특히 하나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펼쳐지는 종교적 독선주의를 결단코 복음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든 광신주의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시다. 자유케하는 진리로 인해 고난과 죽음을 겪으시나, 마침내 부활로 폭발하는 자유의 힘이시다.

셋째로,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여기 생명은 육체의 생명만을 뜻하는 것 아니다. 풀이나 풀의 꽃과 같은 육체의 생명도 참으로 소중하다. 그것도 하나님 영광을 드리는 소중한 매체이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은 장독 위에 잠시 머물러 있는 먼지와 같기도 하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은 육체의 삶으로는 다 담아 낼 수 없는 더 소중한 존재의 삶이 있다는 선포이다. 그렇다고 육체의 생명, 곧 시간의 생명 넘어 영의 존재가 있다는 단순한 선언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일은 값진 일이다. 시간 속에서 영원에 잇대어 살 뿐 아니라, 시간 넘어 주님과 함께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의 삶에 메어있는 “지금의 나”를 부인해야 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내속에 항상 나를 움직이는 죄의 힘, 탐욕과 독선과 오만의 힘을 이겨내야 함을 역설하셨다. “자기부인(自己否認)”과 “십자가 지기”가 그래서 영생과 관련해 소중한 메시지가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길 곧 고난의 길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였을 때, 성급한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예수를 말렸던 적이 있다. 예수와 함께 하는 길은 영광의 길, 권세의 길, 명예의 길, 축복의 길일 터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고 말씀하느냐는 투로 예수를 간했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얼굴에서 얼핏, 광야의 사탄의 모습을 보신 것 같다. 그래서 자기 우두머리 제자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격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장 24절)
여기 예수님은 “자기부정”과 “십자가 지기”를 강조하셨다. 같은 뜻의 말을 두 번 하신 것과 같다. 그만큼 이 뜻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자기 비움과 같다. 자기 비움은 끊임없이 자기 속에서 충동하는 탐욕과 독선의 힘을 비워내는 일이다. 십자가 지기는 자기 지움을 뜻한다. 영어로 cross out 은 지워 없앤다는 뜻을 지닌다. 십자가 지라는 것은 자기 탐욕과 독선을 지워 없애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예수따르미의 기본이다. 예수께서 친히 걸어가신 길이 이러할 진대,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를 지워 보려는 모든 노력을 단지 그것이 기독교 교회 테두리 밖에서 이뤄진다는 이유로 정죄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종교적 독선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이기주의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예수따르기에는 언뜻 보기에 자기 패배 같은 모습이 있다. 온갖 탐욕의 경쟁에서 스스로 지기를 자청하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예수따르미의 상징으로서 십자가(†)보다, 두 번 지우는 결단의 상징인 × 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실제로 십자가 질 때 생기는 십자가의 모습도 × 에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고 새로운 기독교 상징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얼마 전 한 신문사 기자와의 면담에서 나의 건강 비결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건강하지는 않지만 경쟁에서 지는 기쁨을 끊임없이 맛보려고 애쓴다고 했었다. 그런데 짐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다고 고백했었다. 그 기자는 놀라는 듯 했다. 나는 우리 둘째 딸이 초등학교 때 너무 열심히 밤 늦게까지 숙제하는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서 “꼴찌해라, 꼴찌해라”라고 격려한 적이 있다. 그 까닭의 바닥에는 예수님께서 멋지게 꼴찌하셨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외롭고 괴로운 꼴지의 길, 바로 그것이 골고다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꼴찌가 부활로 폭발하리라는 것을 누가 그 때 믿었겠는가! 스스로 철저히 비우는 삶, 그것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삶이요, 그것이 바로 참 생명의 힘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죽게 한 권세자들과 그 대리인들을 용서하셨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잔인하게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어도 조건없이 용서하는 사랑의 힘을 보여 주셨다. 자기를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참 생명이신데, 자기 생각과 교리, 자기 종파와 종교가 다르다고 차별하고, 핍박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과연 참 생명의 종교인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배타적 복음주의 기치 아래(십자가 아닌),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경멸하고 차별하고 핍박한다면, 어찌 그것이 예수의 길이겠는가. 참 생명의 힘이겠는가. 그러기에 참 생명은 자기를 비우고 지워 남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독하게 밟히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힘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물어봐야 할 시간이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들을 짓밟으면서 크리스천이라고 자랑하며 살아온 것 아닌지, 스스로가 즐겁게 밟히면서 사셨던 예수님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고 있는지.

과연 우리는 나의 생각과 신앙과 다르다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남의 자유를 제한하려 하지 않았는지, 죄악의 마력에서 자유케 하시려 했던 예수님께서 죄악의 권세에 의해 친히 고난 받으셨던 그 깊은 뜻을 과연 우리는 제대로 알고 주님을 올곧게 따르고 있는지.

시간 속에서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은 자기를 지우고 자기를 비우는 십자가지기의 구체적 삶에서 잉태되고 성장한다는 진리를 과연 깨닫고 있는지.

특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를 비워 비로소 남에게 진리와 생명으로 채워준다는 말씀임을 올곧게 깨닫고 있는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을 교리로 굳혀 놓고, 이 교리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위협하는 이야말로 십자가 지고 가시는 예수에게 또 하나의 심각한 시련과 시험의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일임을 깨닫고 있는지.

교리의 찬란한 옷을 입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중심에 굳게 모시는 순간, 그곳에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시는 예수로 인해 그야말로 공허한 공간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이 요한복음의 말씀은 교리의 감옥에 가둬두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메시지임을 정말 깨닫고 있는지. 이것은 배타적 복음주의의 옥좨는 메시지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감동을 주는 해방의 메시지임을 깨닫고 있는지.

길고 어두운 기독교 교회사의 모습, 종교적 배타주의로 점철된 그 무서운 역사의 광경을 되돌아보며,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름”을 정죄하는 기독교의 독선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참 뜻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곧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게 될 터인데, 정말 아기 예수의 오심을 진심으로 반긴다면, 친히 길이 되시어 즐겁게 밟히시고, 진리 되시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생명 되시기에 자기를 비워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참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지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번 성탄절에 또 다시 뜨겁게 확인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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