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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대한 예수코드: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1506 추천 수 0 2008.09.15 12:40:32
.........
성경본문 : 마5:9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8.13주일설교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소음 속에서 긴장하고 있습니다. 저 레바논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폭격 소리는 우리를 경악케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첫 기적이 일어났던 가나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미국의 중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수구 인사들이 짐짓 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치 3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레바논 사태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9.11사태로 재미를 본 니오콘들의 이같은 몸짓을 보며 세계가 더욱 불안정해 질 것 같아 불안합니다.

  한반도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평화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뒤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그러합니다. 남북장관회담의 파행, 남북간 인도주의 사업의 중단, UN상임이사회의 대북 제재결의안 등이 한반도를 불안정하게 하고 우리 민족을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남북사이만이 아니라, 북미 간, 북일 간에도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가 강화되면서 공포의 균형과 보복의 악순환이 새롭게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평화는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갈릴리 예수의 가르침을 타는 목마름으로 듣고 싶습니다. 예수의 산상가르침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혜를 얻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새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습니다. 나아가 그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성찰해보고 싶습니다. 평화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특히 그분의 육성 속에 담겨있는 깊은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우리의 활짝 열린 귀로 당신의 평화코드가 담긴 말씀을 직접 듣고 그 코드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갈릴리 예수께서 당시 불안과 절망으로 움츠러들었던 민초들에게 들려주신 주옥같은 산위의 말씀에 새삼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과연 산상수훈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핵심 속에 평화와 연관된 코드는 무엇이며 그것이 사랑과 정의와 같은 예수의 핵심적 메시지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역시 산상수훈의 백미는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기에 우리가 그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팔복의 깊은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몇 가지 주요 특징에 주목해 봅니다. 이런 특징은 오래된 신자일수록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첫째, 당시의 상황의 빛 아래서 보면, 팔복은 대단히 ‘불순’하고 ‘과격한’ 선동적인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변두리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는 도시화의 흐름이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구의 태반을 차지했던 농민들은 처참하게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날로 심화되었고 부자 지주들의 경제적 착취는 격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같은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로마의 권력은 식민지 반항을 무자비하게 다스리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극형은 정치적 반항을 잠재우는데 쓰여 졌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유대 땅의 오클로스(민중)들은 밖으로는 강대국의 정치?군사적 억압을, 안으로는 토착세력으로부터 수탈과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딱한 정황 속에서 주님은 지금 주리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억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6:20-26)을 보면, 예수의 선포가 얼마나 전복적인(subversive) 성격을 띠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함과 동시에 부자는 화를 입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지요. 기득권자들이 듣기에 지극히 거북하고 괴로운 과격한 메시지였습니다.

  둘째로, 마태복음의 팔복을 보면, 복 받는 사람의 종류는 여덟이지만, 복의 내용은 일곱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의 축복과 여덟 번째의 축복이 동일합니다. 바로<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축복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축복이 매우 값진 축복이기에, 그것을 두 번씩이나 강조한 것 같습니다. 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억압을 받는 밑바닥 인생이 그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께 절대의존하고 있다면 결국 이같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점에도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런데 셋째로 천국을 소유하는 이 축복 못지않게 큰 축복을 받는 사람이 또한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축복보다 근원적으로 더 값진 축복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알기위해 먼저 축복의 내용을 적어 봅시다(마태 5:2-20). 순서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천국의 주인됨
    ② 위로를 받음
    ③ 땅을 상속받음
    ④ 배부름
    ⑤ 긍휼히 여김을 받음
    ⑥ 하나님을 볼 수 있음
    ⑦ 하나님의 자녀가 됨
    ⑧ 천국의 주인됨 (첫 번째와 같음)

  위의 일곱 가지 축복에서 과연 어느 것이 가장 소중할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느 축복을 받게 되면 그 속에 여타 다른 축복들이 따라올 수 있을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로 받거나, 배불리 먹는 것이나 땅을 상속받는 것의 보람은 부수적인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축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두 가지 축복이 경합하게 되는 것 같군요. 천국의 주인이 되는 축복(①과 ⑧)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⑦)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 두 가치 중 역시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기쁨과 보람, 하나님이 친히 “나의 딸이요, 아들이다”라고 불러 주시는 것에 대한 기쁨과 보람이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제도에서는 아들이 되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며, 아버지 영향권 안에서 아들은 마땅히 주인노릇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덟 가지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갖게 되는 축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같은 축복을 받게 되나요. 주님은 일곱 번째 축복으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영어로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으로 번역했습니다. 어쨌든 이 축복이 가장 값진 행복을 보장해준다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일곱 가지 행복이 따라 올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평화의 가치를 크게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팔복 중에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바로 이 일곱 번째 축복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가르침을 얼마간 숨겨둔 듯 여겨집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예수의 코드(Jesus code)를 제대로 읽어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평화의 가치가 사랑과 정의의 가치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새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는 평화가 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로마의 평화체제(Pax Romana)하에 있었으나, 지금처럼 그때에도 팔레스타인 땅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로마평화는 오늘날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가 그렇듯이 한낱 지배이데올로기의 펄럭이는 깃발에 불과했습니다. 로마의 잔인한 억압, 곧 십자가 처형의 억압이 공포에 떨게 했지요. 국내적으로는 여우같이 간교한 헤롯왕의 지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지배했으므로, 종교지도층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이들은 독선과 위선, 탐욕과 차별로 백성을 무시하고 강압했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굶주렸고, 헐벗었습니다. 그들은 뿌리 뽑힌 몸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았으며, 질병과 절망에 시달리며 살아 왔습니다. 불평등과 부자유, 분쟁과 증오가 홍수처럼 민중을 덮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같은 민중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이같은 암울한 상황에서 주기도문의 뜻을 다시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억울하게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 보복의 칼날을 가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지요. 예수의 제자 중에도 로마제국주의 세력에 대해 결사항쟁하려는 열혈 젤롯당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에 단도를 품고 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로마세력이나 그 세력에 아부했던 유대인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당시 당국은 그들을 강도로 낙인찍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사람도 강도나 도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라 하겠습니다. 이같이 억압과 그것에 대한 저항, 처형과 그것에 대한 보복이 서로 맞물려 거칠게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뚜렷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강자의 무자비한 압승과 약자의 철저한 보복이 서로 상승 작용하여 피흘리기와 피흘림, 죽이기와 죽음의 저항이 거칠게 강화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새로운 대안의 가르침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위에서 주옥같으나 때로는 추상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말씀 속에서 그리고 그의 비유 속에서 우리는 그의 평화코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사랑에 대한 그의 명확한 메시지를 이해해야합니다. 그에게 사랑은 사사로운 개인의 낭만적인 달콤한 정서이거나 추상적인 도덕적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듯이, 사랑은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이웃으로 삼아 그에게 이웃 노릇을 하는 구체적 행동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다가가서 그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예수의 사랑입니다. 자기의 계획, 자기의 일상적 삶의 흐름, 자기 이해관계를 중단하거나 그것을 뛰어넘어, 그 이웃의 고통을 따뜻하게 실효성 있게 덜어주는 행동이 사랑이며, 그것은 바로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실천을 뜻합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두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를 비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건강한 자기의 존재와 소중한 자기의 자원을 비워서 상처받아 고통당하는 이웃을 온전케 해 주는 일에 활용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이 바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보증해주는 신용장이기도 하지요.

  자기를 비우는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요,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통해서만 투쟁 없이 평화를 이룩해 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피흘림 없이 정의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사랑은 나와 남, 나와 이웃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켜 줍니다. 이 새로운 관계를 평화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평화와 정의가 편만해질 때 구원의 상태가 펼쳐진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갈구했던 희년의 기쁨도 바로 이 평화와 정의의 기쁨이었고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만이 피해자 마음속에 깊숙이 잠겨있던 복수심과 증오심을 해체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힘 있는 쪽에서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러할 때 불평등과 억압과 악순환이 더욱 아름답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사랑만이 악순환의 꼬리를 끊어내어 마침내 평화와 정의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예수의 이러한 비전은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그의 첫 설교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누가 4:16-19). 이 첫 선포는 이사야 선지자의 꿈(이사야 61:2-3)을 바탕으로 나온 것인데,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이사야의 비전속에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선포되지만, 예수의 첫 설교에는 보복의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복수의 씨앗을 원천적으로 제거시켰습니다. 사랑의 힘으로만 악순환의 고리를 깨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참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 만들기(peace-making)와 평화 지키기(peace-keeping)간의 큰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정치지도자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군사력을 쌓아 나가야 한다고 그럴 듯 하게 주장 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논리나,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ica)의 논리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논리 모두가 평화유지를 소리 높여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해왔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궤변이요, 위선입니다. 마치 착하기 위해 악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공포의 균형만이 강화될 터이며, 폭력의 악순환이 더욱 거세질 뿐입니다. 지금 알카에다와 니오콘 사이가 그리하며, 회교 근본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사이가 그러하며, 북한의 강경군부와 남한의 수구 반공세력 사이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평화 만들기는 이같은 평화유지의 논리와는 차원이 확실하게 다릅니다. 예수의 평화 만들기는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는 힘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자기 비움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기 힘 채우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평화는 <자기 힘 빼기>라는 사랑 실천에서 나옵니다. 이 힘 빼기가 바로 예수의 대안적 처방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그의 이 같은 대안적 처방의 코드를 찾아봅시다. 먼저 자기 힘을 빼어, 남에게 힘을 주는 것을 자타실현(自他實現)이라는 말로 표현해 봅시다. 단순한 자아실현(自我實現)의 수준을 뛰어 넘어, 나와 남이 함께 서로 비워 서로 채워 줌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높은 성취 수준을 자타실현이라고 말해 봅시다. 예수님이 산위에서 설파하신 메시지 가운데에서 자타실현의 단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속옷을 탐내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갖게 하기, 5리 가자고 하면 10리 까지 가주기를 권장하셨던 예수께서는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 같은 결점 보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대들보 같은 큰 결점을 먼저 보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모두 자기 낮춤과 자기 비움의 실천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한걸음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요. 이것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자기 비움과 낮춤을 통해 악순환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어낼 수 있다는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원수 사랑하기는 평화 만들기의 확실한 논리요, 윤리요, 힘입니다. 그래서 자타실현이 아름답게 이뤄집니다. 이 말씀 속에 담겨있는 몇 가지 깊은 뜻을 평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서 평화 일꾼들은 원수 안에도 반드시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훌륭한 자질과 모습, 즉 장점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 원수는 자동적으로 악이다, 또는 악의 화신이라는 판단은 지극히 잘못된 판단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원수는 곧 악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예수의 자기 눈 속의 대들보 보기의 당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속에 사랑할만한 것들이 있음도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원수가 바로 악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인식이야말로 가장 反예수적 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원수의 단점이나 악한 점만을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네 속에 있는 더 큰 단점과 더 사악한 점을 똑똑히 보라”고 명령하시는 그 육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 영의 귀 있는 자는 꼭 들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원수의 장점 보기, 그것 칭찬해주기, 그 장점 벤치마크 하기를 실천할 때 그곳에 예수의 평화는 우리 속에서 오아시스의 깊은 샘물처럼 솟아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삭막하게 메마른 사막을 풍성히 적시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은 바로 예수의 눈이요, 영의 눈입니다. 영의 눈이 있어야 원수의 장점이 보이며, 예수의 눈으로 보아야 원수의 장점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 만들기의 결단이 이뤄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힘 빼기의 용기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원수의 아름다운 점을 칭찬해 주고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 칠 때, 폭력의 악순환 고리는 마침내 풀리게 됩니다. 악순환이 깨어지면, 선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평화의 진원지가 마련되어 그곳으로부터 평화의 큰 강물이 흘러내리게 될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원수의 장점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원수를 악으로 보아 박살내려는 사람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차별받고, 억압받으며, 마침내 비참하게 제거 당하기 쉽습니다. 그간의 역사현실이 그것을 증언해 줍니다. 아니 성서가 바로 그것을 증언해 줍니다. 예수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시달리셨습니다. 그들의 법정에 섰으며, 그곳에서 조롱당하셨습니다. 그들에 의해 골고다 길에서 고통당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폭도들이나 도적들이 당했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평화일꾼들은 오늘도 골고다 길 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저 중동지역에서, 그리고 세계 각 곳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자기 힘 빼기의 아픔이기에 값진 아픔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아픔은 나와 남을 동시에 평화에로 이르게 하는 자타실현의 아픔이지요. 이 아픔이 평화라는 자녀를 낳는 해산의 고통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고통은 언뜻 보기에는 패배자의 고통같이 보입니다. 마치 골고다의 예수가 처참한 패배자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골고다의 길은 결코 패배자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비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진리의 길이며, 마침내 부활의 승리로 안내하는 평화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악순환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힘의 폭발이 바로 예수 부활 사건입니다. 이것을 예수따르미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6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적십자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3천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앙숙으로 서로 미워하며 다퉈왔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하는 문제를 토의하는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세계 190개의 국가 대표들과 적십자연맹에 가입한 183개 적십자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토론했습니다.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습니다. 아랍 50여개 국가대표들은 아직도 이스라엘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리지 못한 탓에 이번 회의를 연기시키려 했습니다. 이 때 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머리에 떠올리며 두 적십자사의 연맹가입을 촉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본인은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과 헌신으로 이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보복의 악순환이 종식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연맹가입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를 강력히 촉구합니다. …”

  우여곡절 끝에 두 나라의 적십자사는 연맹에 가입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그곳으로부터 전쟁의 소음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울적해집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어졌던 곳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한순간에 장례식장으로 변화되는 듯한 환상을 보는 듯 합니다. 더구나 우리 조국의 현실 또한 평화와 더욱 멀어지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내 마음은 더욱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산위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 있다고 외치시며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육성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기독교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큰 교회 목회자들이 한반도 조국의 평화를 위하기보다 북한을 악으로 규탄하는 일에 그들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거침없이 부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저 갈릴리 지역 산위에서 울려 퍼졌던 예수님의 육성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한다면 평화 만들기에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부추기면서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육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정말 이 8.15주일에 하나님 자녀 되는 행복을 여러분들과 함께 온 몸, 온 마음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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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9 베드로전 종말론적인 삶 벧전4:1-11  정용섭 목사  2008-09-18 2059
1068 창세기 야곱의 하나님 체험 창28:10-22  정용섭 목사  2008-09-18 2193
1067 마가복음 생명을 얻는 길 막8:31-38  정용섭 목사  2008-09-18 1773
1066 요한복음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요3:1-8  정용섭 목사  2008-09-18 1675
1065 요한복음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요9:24-34  정용섭 목사  2008-09-18 1913
1064 갈라디아 자유로움의 세계로! 갈4:21-5:1  정용섭 목사  2008-09-18 1775
1063 예레미야 이스라엘의 고집 렘19:1-15  정용섭 목사  2008-09-18 1809
1062 고린도전 낡은 것과 새것 고후5:16-21  정용섭 목사  2008-09-18 1614
1061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마20:20-28  정용섭 목사  2008-09-18 1925
» 마태복음 평화에 대한 예수코드: 가장 큰 축복 마5:9  한완상 형제  2008-09-15 1506
1059 로마서 다석 유영모의 신앙 롬11:25-36  정양모 신부  2008-09-15 2646
1058 누가복음 하나님나라와 누룩 눅13:20-21  김기동 형제  2008-09-15 2153
1057 마가복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막16:14-20  박득훈 목사  2008-09-15 1647
1056 마태복음 느리게 살기 마25:34-40  류상태 목사  2008-09-15 1478
1055 요한복음 하나님의 DNA 요1:12-13  서중석 목사  2008-09-15 1679
1054 누가복음 진정한 승리 눅24:1-6  황종선 형제  2008-09-15 1321
1053 이사야 민족의 구원과 자속적 기독교 사53:4-6  이정배 목사  2008-09-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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