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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31 추천 수 0 2008.09.18 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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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0:20-2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8.3 설교 

슬픈 모성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종의 에피소드로부터 시작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앞세우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자녀들에게 대한 관심은 남자보다 여자가 강한 것 같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도 제베대오는 등장하지 않고 대신 그의 아내가 예수님에 와서 무엇을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신 예수님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그녀의 이러한 요구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모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굳이 요즘의 일상적인 일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선거가 있기 바로 전에 거의 당선이 확실한 후보자에게 가서 대통령이 되면 자기 자식을 국무총리에 앉혀달라는 청탁과 비슷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을 예수님 다음의 자리에 오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걸 보면 그녀의 꿈은 야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체면도 생각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모하기도 하고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요구는 개인적인 욕망, 그 이상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서면"이라는 그녀의 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 그녀는 그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묵시사상적인 차원에서 메시야가 명실상부하게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와서 유대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건설하게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요구에는 유대민족 전체가 표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유대민족이 세계에서 으뜸이 되는 미래가 그 묵시사상의 주제였습니다.

서로 다른 '잔'

이 여자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이긴 했지만 예수님은 상대방이 무안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화의 흐름을 약간 옆으로 끌고 가면서 간접적으로 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 여자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22절). 주님의 나라가 오면 한 자리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앞서서 '잔'을 마셔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의미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26:39).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신 잔은 예수님이 가능한대로 감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고난,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찰에 의한 것이거나 우연한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순종한 사람에게 임하게 된, 그야말로 무죄한 자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대뜸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제자들의 대답이 동문서답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23절). 앞서의 잔과 여기서의 잔은 다릅니다. 앞서의 잔은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마실 수 없으면서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잔은 "내 잔"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잔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이것은 "내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 잔은 그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담보해주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인간 구원을 위한 그분의 몫이며, 우리가 마셔야 할 예수님의 주시는 잔은 우리에게 임하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결국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가고 싶다는 자신들의, 또는 치맛바람이 강한 어머니의 욕망에 치우쳐서 좌우분간도 못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들은 높은 지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전혀 분간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는 일은 늘 우리에게서 일어납니다. 다른 세상의 일들은 접어두고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독선적인 신앙에 치우치게 되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그런 과오가 적지 않습니다. 큰 것만 보도라도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 그리고 해외선교에서 벌어지는 본토인들에게 대한 착취가 그것입니다. 사실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미국은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의 모든 것을 종교와 군사력에 의지해서 지배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을 신앙으로 위장했을 뿐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어쩌면 인간의 원죄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온갖 종교적 이념과 윤리로 합리화하는 것 말입니다. 이는 곧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마실 수 있다"고 떵떵거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전권

예수님은 철없이 떠드는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고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슬쩍 비껴서 말씀하시면서, 어머니의 요청을 이렇게 완곡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23절). 이 말을 듣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이 실망했는지, 그들의 어머니가 민망하게 여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그 두 명의 제자들에게 화를 냈다는 걸 보면 상당히 언짢은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예수님의 이 진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예정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정론자들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을 이중적으로 예정해놓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중 예정론은 그것 자체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선 이미 이중적으로 예정되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나 선교적 책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결국 달라질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숙명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이중예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됩니다. 몇몇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결정해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진술은 그런 예정론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의하면 잘난 사람으로부터 차례대로 오른편과 왼편에 앉고, 그 뒤를 이어 차례대로 자리에 앉지만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모든 위계질서가 그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전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개의 신자들은 다른 생명의 질서, 그런 통치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럽의 철학 역사에서 존재가 망각되었다고 보는 하이덱거의 사유방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망각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추구하는 세상의 질서를 강화시켜나가려고만 합니다. 오늘 교회의 모든 관심 사항들이 그런 것 아닐까요? 고등학생들의 수능시험을 위해서 특별 예배를 드린다거나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부흥회를 하는 일들이 모두 세상의 통치방식에 충실한 것 아닐까요? 자식들이 출세하면 부모들이 신앙생활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추켜세웁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 자체가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예상하는 세상의 통치질서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눈감고 있다는 사태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섬기는 삶이 가능한가?

이 문제를 예수님은 '권위적인 삶과 섬김의 삶'을 대조하면서 아주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풀어주십니다. 삼 년 가까이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하는 차원에 머물러서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질서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좀더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세상의 통치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25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이런 체제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똑같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정치와 경제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누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도 전에 인간은 이런 권력을 추구하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확보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또 다시 무슨 무슨 '게이트'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모든 사회문제도 결국은 남을 내리누를 수 있는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상의 통치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26,27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그런 통치방식과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방식의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시된 '섬기는 삶'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어느 정도 섬긴다는 생각으로 생활합니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교회청소나 식사당번을 앞장서서 한다거나, 사회시설을 방문해서 봉사하기도 합니다. 모두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섬기는 자세를 꾸준히 지켜낼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옳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섬기는 삶이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섬기는 삶을 외치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실제로는 종처럼 섬기며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실제로도 섬기는 삶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마다 장로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이름 없이 봉사하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신자들의 위계질서가 여럿으로 나누어진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겠지요. 또한 경우에 따라서 일단 그런 섬김의 모습이 가능합니다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섬기는 그런 삶의 한 복판에서도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섬김의 삶을 이용해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선사업을 대표한다는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 사건을 보면서 인간이 섬기며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선사업의 전설적인 인물인 오웅진 신부도 역시 사심 없이 그런 일을 하기 힘들었다는 걸 보면 섬김이 불가능한 이유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인격 문제이기보다는 인간본질과 연관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윤리의 토대와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가 추상적인 토대에서 시작하고
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십계명에 나오는 그런 명제들을 기독교 윤리의 원칙으로 삼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허위의식에 빠집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가르침은 옳긴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못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인간은 늘 남의 것을 탐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탐내지 말라'는 이런 말은 기껏해야 '공자님 왈'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별로 실현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말씀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이상주의자이십니까?

선취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권력이 통치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인해서 전혀 다른 통치가 이 세상에 돌입되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28절). 이미 임박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으로 그 힘을 행사합니다. 비록 이 땅의 질서는 권력으로 누르는 것이지만 이것은 참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 전까지 인간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작동되는 힘에 불과합니다. 결국 권력 중심적인 이 세상의 질서는 섬김이 중심적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의해서 해체될 것입니다. 지금 그쪽을 향해서 가는 중이지만 아직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선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비록 세상의 통치 안에서 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식과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권력 중심이 아니라 실제로 섬김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섬김이 중심으로 운영되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당겨진 그런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중에 으뜸이 될 것을 생각해서 지금 섬기며 살라거나, 고통스럽지만 기독교인은 마땅히 섬기며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 행동의 근원은 그의 존재에 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선취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만 있다면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우리의 인식과 신앙 세계에 앞당겨져서 들어온 그 하나님 나라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종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불완전한 모습들이 남아있지만 말입니다.      <200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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