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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마태복음 윤진수............... 조회 수 1606 추천 수 0 2008.09.29 1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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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9:3-9 
설교자 : 윤진수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6.11.5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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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22일에 대법원은 원래 여자였는데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의 호적 기재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꿀 수 있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많은 관심을 끌었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습니다. 그 며칠 후 어느 신문사에서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신문에 글을 써 줄 수 없겠는가 하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지난 10월 22일 말씀증거를 했던 한인섭 형제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근무하고 있는데, 한인섭 형제의 전공은 형법이지만 제 전공은 민법이고, 가족법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화를 건 기자에게, 참 쓰고 싶기는 한데, 마침 제가 성적을 다 처리하지 못해서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대학의 민법 교수님을 대신 추천해 드렸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가 지난 학기에 담당했던 학생은 학부 과정만 250명 정도 되어서 학기말이 되면 성적 처리가 보통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가 추천했던 교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그 신문에 글을 쓰셨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도 그 결정을 지지하고, 글을 쓰고 싶기는 했지만, 교회에서 성전환을 반대하기 때문에 쓰지 못하고 또 다른 분을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원래 추천했던 분은 독실한 신자이십니다. 그 교수님이 추천한 또 다른 분도 제가 아는 분이기 때문에 그 분에게도 여쭤 보았더니 마찬가지 이유로 역시 고사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성전환을 허용하는 것이 성경에 어긋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대법원이 성전환 재판을 하기 전에 전문가를 불러서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을 들었는데, 목사 한 분이 나가셔서 성전환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훼손을 가져온다고 하는 반대의견을 개진한 바 있습니다. 즉 성경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3)”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태어날 때의 성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창조주의 뜻과 섭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도 그와 같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성전환이라는 것은 옛날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의학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문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성전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써 있을 리는 없습니다. 또 제가 알기에는 위 재판을 한 대법원의 대법관 13분 중에는 대법원장님을 비롯하여 교회 장로님들도 여러 분 계신데, 성전환 자체를 허용할 수 있다는 데에는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었습니다. 성전환을 허용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처럼 성전환을 원하는 사람들은 소위 성적 동일성 장애라는 증상, 즉 자신은 남자인데 여자라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로 자신은 여자인데 남자라고 생각하는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이고, 그 치료법은 성전환 수술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환을 허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에 따라서는 앞에서 인용한 창세기의 말씀을 성전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가족 문제나 사회 윤리 문제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것은 언제나 지켜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가족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중세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가족 문제에 관한 법은 세속의 법원이 규율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법정이 관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가톨릭의 교리에 따라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성공회가 탄생한 것도 알고 보면 가족법 문제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의 헨리 8세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출신의 캐더린 왕비와 헤어지고 앤 볼레인이라는 자신의 시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교황청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자, 헨리 8세는 캐더린 왕비가 전에 자신의 형수였기 때문이 캐더린과의 혼인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해 버렸습니다. 로마 교황이 이를 이유로 헨리 8세를 파문하자 헨리 8세는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여 영국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성공회를 세운 것입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가족 문제에 관하여는 이를 교리의 일부로 삼고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것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도와 같이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결혼하는 사람의 종교가 기독교인가, 이슬람교인가, 힌두교인가에 따라 그들에게 적용되는 가족법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일단 결혼을 한 다음에 개종을 하면 어떤 법이 적용되는가에 관하여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기독교인인 남자가 결혼한 다음에 개종을 하면 부인을 여럿 둘 수 있는지, 그렇게 되면 원래 본부인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나 많은 종교가 가족 문제에 관하여 이를 교리의 일부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언급할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기독교와 가족 관계에 관하여 문제되고 있는 다른 것들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동성애의 문제입니다. 서구에서는 1980년대 말 이후로 동성애자의 결합도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같이 취급하거나 그에 준하여 보호를 하고 있는 나라가 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하여는 기독교계나 기타 보수적인 사람들의 반대가 많았습니다. 이 동성애의 문제는 성경에 이를 반대하는 근거가 뚜렷합니다. 구약 레위기 20장 13절에는 동성애자는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고, 신약에서도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27절에서 동성애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동성혼인의 허용 주장에 대하여 근본주의적인 기독교도인 부시 대통령은 동성 혼인을 금지하기 위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혼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까지 이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성경 말씀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혼을 허용하여서는 안 되고, 동성애를 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에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지키지 않으려면 그 이유는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이혼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예수님 이전의 이혼법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이혼법은 남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처를 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신명기 24장 1절에 의하면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약자인 아내는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이혼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고, 말라기 2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혼하지 말라고 한 것도 여성이 일방적으로 이혼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신 말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전혀 이혼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음행, 즉 요사이의 법률용어로는 부정한 행위가 있으면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가톨릭은 이혼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 루터에 이르러 이혼의 금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여 이혼을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는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고,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이혼하지 않게 돕고, 그래도 안 되는 사람은 이혼하게 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며, 또 이혼한 사람이 받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혼을 정죄하면서 이혼한 사람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비난하여 이혼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동성애는 어떤가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과연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에 의하면 과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구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성애를 윤리적으로 금지하였지만, 오늘날은 인구 증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애를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또 현대 철학과 윤리학의 추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자기가 좋아서 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용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용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도 이러한 태도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 오늘날에도 그대로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대 상황이 달라지면 이전에 지켜왔던 윤리 규범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여 그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사형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 성경을 근거로 하여 사형폐지에 반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구약 시대에는 사형이 광범위하게 행하여졌고, 많은 경우에 죄를 범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형폐지에 반대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보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사형 폐지를 주장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가부장적인 질서를 옹호하고,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관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남녀의 불평등을 고수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보기에 창피한 노릇입니다. 오히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면(갈라디아서 3장 28절) 당연히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없어야 되겠지요.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데,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삼아서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기독교가 좀더 유연해져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 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완화될 것입니다.

이것과는 다소 다른 문제는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성전환의 문제도 그렇게 볼 수 있고, 지난번에 류상태 형제님이 말씀증거 가운데 다루신 제사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물론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전혀 말이 안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사 자체라기보다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렇게 본다면 조상을 추모하는 형식인 제사를 우상숭배로 몰아붙일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이를 옹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 전쟁을 부추기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가?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 지킬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하지 않는 것, 지킬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들어 보아야 하는데, 신학의 문외한인 저로서는 제대로 답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제일 으뜸가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지켜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러한 계명들은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 계명들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예수따르미라고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러한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 증거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결국 성경 말씀 가운데 변해야 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말씀 증거를 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신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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