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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

마태복음 차옥숭............... 조회 수 1486 추천 수 0 2008.10.15 23: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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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16-18 23 
설교자 : 차옥숭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7.3.11주일설교 
사순 3주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최근에 제가 접한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절망과 희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겨울에 일본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1597년 2월 5일 니시자카 언덕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복음의 가르침을 증명하면서 성스러운 최후를 맞았던 26성인들의 기념관을 돌아보다가 기념관 안에 그 당시 처참한 처형장면들을 그려놓은 그림들 중 한 그림이 비통하리만치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한 어머니가 세 아이들과 함께 화형 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두 아이가 묶여져 울부짖고 있고, 한 아이는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데, 발밑에서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참한 그 장면에 가슴이 마구 아파오면서 “아, 나는 너무 쉽고 편안하게 믿고 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무엇이 그 어머니로 하여금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데리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기념관 옆에 있는,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앉아서 지워지지 않는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자식들과 함께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일 텐데…, 어떤 희망을 갖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문득 카타콤에서 한 어머니가 사자의 밥이 되기 직전에 공포에 떠는 아들을 꼭 끌어안으면서 “아가야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으면 우리는 밝은 하느님 나라에 가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어떻게 가장 강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기념관에서 보았던 그 어머니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속삭이면서 그런 희망을 가지고 죽어갔을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았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미쉬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메일로 온 “전태일 통신”에서 읽은 사건입니다. 아미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카스터에 있는데, 현대과학과 물질문명을 철저히 거부하고 옛날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연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며 사는 기독교의 대안 공동체입니다.

작년 10월 2일 이 마을의 학교에서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찰스 로버츠(32살)라는 트럭 운전사가 교실에 침입해 11명의 여학생을 쏴서 결국 5명을 숨지게 하고 스스로 자살해버렸습니다. 단순한 삶을 통해 예수님에게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아미쉬 마을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이었고, 너무나도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저에게 뭉클한 감동과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은 사건 당시 교실에 침입한 찰스가 선생님과 남자 아이들을 내보내고 여자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할 때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서서 다른 아이들을 살리려고 “나를 먼저 쏘라”고 말하고 그 아이가 희생되고, 다음으로 나이 많은 아이도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또 하나는 그 끔직한 일이 있었던 날 저녁, 희생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총을 쏘고 자살한 찰스의 미망인과 아이 셋이 사는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버지가 저지른 끔직한 일 때문에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는 비탄한 처지에 빠져 있을 미망인과 아이들을 위로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요? 내 아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절망감과 슬픔과 분노에 아무 생각도 못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며칠 후 찰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 반 이상이 아미쉬 희생자 가족들이었으며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미쉬 공동체는 지역 은행에다 찰스의 남겨진 가족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만드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슴 벅찬 이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을 하면서도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을까 하고 자문을 해 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두 이야기 속에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절망스러운 사건과 동시에 희생자들이 보여준 예수를 따르는 자의 참 자세를 보면서 커다란 희망을 봅니다.

이 두 사건을 떠올리면서 오늘 성경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서 18절은 헤롯왕의 유아살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으나 별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들은 헤롯왕에게 들려서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를 묻게 되고, 헤롯왕은 백성들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아 자세히 알아보고 그리스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나도 아기에게 가서 경배하게 하라”고 동방박사들에게 말하지요. 박사들이 베들레헴을 향해 갈 때, 문득 사라졌던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 있는 곳으로 박사들을 인도하였고, 박사들은 예물을 바치고 경배하고 난 후에 꿈의 계시로 헤롯왕에게 들리지 않고 바로 동방으로 돌아가버립니다. 또한 요셉도 꿈을 통해 아기가 위험하니 이집트로 피하라는 말을 듣고 피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위험에서 벗어나지만,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게 된 헤롯은 분노하여 베들레헴과 인근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입니다. 이에 마태복음 저자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라헬은 야곱의 두 번째 부인인데 이스라엘의 시조모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주변 여러 민족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의 직접 조상은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라헬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이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자녀들의 죽음에 대한 부모들의 비통함과 대비시켜놓은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의 태어남과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 그리고 그 부모들의 고통!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성이 다 붕괴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을 아이들을 잃고 통곡하는 어머니들과 대비시켜놓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을 찾을 수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의 부재, 신의 일식입니다. 구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는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녀’란 말은 히브리어로 젊은 여인을 뜻합니다.

이사야가 처한 상황도 희망이 없는 절망입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대적해서 연합하면서 유다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루에 대항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유다는 연합군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 때의 정황을 7장 2절에 보면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처럼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상항에서,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시작과 희망을 본 것입니다.

고통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죄를 깨우쳐 주시고 온전히 당신에게로 되돌아오게 하시는 하느님”을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신앙은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는 부재의 상황에서,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하느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나라가 언젠가 이루어질 거라는, 하느님의 나라와 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자기들의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사건을 현재적 경험으로 체험하고 고백하는 바로 그 믿음,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비전과 확신이 죽음과 공포를 이겨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처형을 당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저가 하느님을 신뢰하니 하느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 것이다. 그가 평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처절한 절망만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에 있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제일 후대에 쓰여진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마태와 마가복음서에는 단지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이 사라지고, 아니 하느님이 숨어버린, 신 부재의 상황을 처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다 떠났고, 하느님도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이 처절한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가신 그분의 모습 속에서 왜 우리는 희망을 보고 구원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아우슈비츠 그 학살의 지옥에서 신앙인들은 하느님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저기 가스실에서 우리와 함께 죽임당하고 계신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면서 절망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 너머를 보는 것이고,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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