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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641 추천 수 0 2008.10.19 13: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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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0:1-1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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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과 밖이 연일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인데 시끄럽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그런 소요가 사람과 세상의 생명을 살
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갈등이라면 당연히 견뎌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국제 정치 문제로부터 국내의 노동현장이나 부동산, 또는 교육과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러 저리 꼬여있는 이 많은 문제의 핵심에는 사람의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약간 엄격한 교육관을 갖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습니다. 공부 시간에 떠드는 학생들에게 일정한 체벌을 가하곤 했습니다. 40 명에 이르는 그 반 아이들은 이 선생님에 대한 평가가 가지각색입니다. 너무 심해서 학교에 다니기 싫다. 그렇게 해야 수업이 진행되니까 괜찮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기준들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매우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인도나 파키스탄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면서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소위 선진국 국민들보다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저는 비참한 생활 속에 빠져있으면서도 그것을 헤쳐나갈 용기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이 사는 숙명주의를 예찬하는 게 아닙니다. 또는 정신병자들처럼 파괴된 자기의 삶에서 만족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선진국이나 우리처럼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살면서도 행복지수가 낮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도 인간의 마음을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겠지만 사실 성서의 가르침도 삶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즉 삶의 능력과 행복은 어떤 객관적인 수준을 성취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서 이런 가르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늘 우리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깨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훨씬 예리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수확기를 맞아 아침 일찍 노동시장에 나가서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당시의 일당인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다시 노동시장에 나가보니까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들도 포도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후 다섯 시에 다시 노동시장에 나갔습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이 말을 들은 실직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7절). 포도원 주인은 이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습니다. 여섯 시에 하루 일을 끝내고 일당을 지불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치의 일당을 준다는 것은 자선사업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횡재를 만난 셈입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일한 사람은 속으로 최소한 두 데나리온은 받겠거니 하고 기대했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12절).
우리는 주인 앞에서 투덜거리면서 따지고 든 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불평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아홉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을 똑같이 대우한다면 당연히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억울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많은 보상을 해주든지 아니면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적게 주든지 해야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홉 시간이나 뙤약볕에서 포도를 따느라고 고생한 이 사람들의 불평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들의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결코 삶의 능력을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행복한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에는 우리의 삶을 훼손시키는 결정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능력과 그 보상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한 불평은 끊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남보다 좀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만 행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자기를 능력을 내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에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 흡족해 하지만, 받지 못하면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국 자기성취와 불평 사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렇듯 비교 우위론에 토대를 둔 삶이 오늘 현대인들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이 사회를 끌어가는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절대적인 삶이 훼손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취약합니다. 예컨대 대학교 선생님들의 연구와 봉사업적을 연봉에 연동시키는 이런 발상은 그것이 아무리 자본주의적 현실에 입각한 합리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유치한 일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사회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상대적인 평가에 의존시키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늘 한쪽에서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점수제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필요 없는 논쟁에 휩쓸리게 됩니다. 결국 인간적인 연대감은 실종되고 단지 상대적인 우월감만 지배하는 공동체로 남게 되겠지요.

정의가 무엇인가?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경제원리의 체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경제정의를 파손하는 행위이
다, 땀 흘린 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만이 이 사회의 정의를 일구어내는 지름길이다, 하고 말입니다. 저는 경제와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무조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원리가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만큼의 월급, 또는 일한 만큼의 연봉이라는 원칙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입니다. 무엇이 과연 능력인가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할 요소가 많긴 하지만 어쨌든지 실제로 육체적으로 노동하는 시간이 많거나 아니면 회사 관리에 뛰어나거나 상술이 뛰어나다거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회사에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주는 것을 우리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모든 회사들이 실적과 능력 위주의 임금체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그것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런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굴러가야 생산성과 경쟁력이 제고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할 거리가 없어서 하루 종일 빈둥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요? 이런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실제로 학력이 부족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외국인 노동자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겨우 한 시간 일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십분의 일 데나리온을 받아야만 정의로운 세상일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열 시간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열 데나리온을 각각 주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요?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바로 자기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잘못이냐, 라고 묻습니다. "내 후한 처사가 거슬린단 말이오?" 이 주인에게는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바로 정의였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하다가는 오래 가지 않아 부도가 나겠지요. 그러나 원칙은 이런 방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비록 생산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능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생존에 필요한 대우를 받아야 사람 사이의 연대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그런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인간적인 연대감 안에 있을 때 인간은 훨씬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차별이 있을까?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감안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는 종교적 업적에 만족하고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업신여기는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무언가 자기들에게 특별한 대가가 주어지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해서 율법을 지키고 모범을 보이려고 절치부심 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모든 종교의 밑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있을지 모릅니다.  요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자기들에게 특별한 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런 주장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위험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의 질서가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만약 등수에 따라서 차등 지급되는 이 땅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 나라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결코 절대적인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고방식은 프로이트가 분석하듯이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늘 그런 식으로 운영되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렇게 꾸려지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등도 없고 꼴찌도 없습니다. 굳이 이런 형식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일등입니다.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일컫는 '영광'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곧 모든 이들이 왕처럼 살아간다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서 무슨 보상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봐야 헛수고입니다.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상급이 적거나 죽을둥살둥 발버둥 쳤다고 해서 큰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포도원 주인처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킨다면 어쩌면 칼 마르크스의 생각이 이와 비슷합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받는다는 그 원리 말입니다. 원래 공산주의의 모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교회에 가져오면 그것으로 모두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물론 그런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 밑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도 그렇고, 많은 수도회가 그렇습니다. 그 이외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이런 공동체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간다는 원칙 아래서 공동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방식의 시스템이 현실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대로 이런 식으로 꾸려갈 수 있겠지만 이질적인 개인과 집단이 뒤섞여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런 식의 삶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현실 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을 변혁해나가는 단초라는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참된 의미에서 연대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비록 한 시간밖에 노동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처럼 모두가 더불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확보해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사회를 향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시각의 차이
이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그런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이 어떻게 불평 없는 삶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회가 구조적으로 개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의식이 명확하다면 그런 구조 문제를 꿰뚫고 어떤 세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깨달음, 이런 믿음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앞서 읽은 대로 투덜거리던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 받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람이 자기에게 시선을 돌린다면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주인과 계약한 대로 받을 것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하루 품삯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 집 식구들이 하루나 이틀을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일용할 양식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의 눈을 놓게 되면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는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훨씬 많은 행복의 조건을 가졌다고 해도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현실에서도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받을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착한 사람에게나 못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하루의 시간은 24시간으로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우리는 모두 세끼만 먹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네, 다섯 번을 먹거나 또는 두 번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개인들의 취향 문제이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섯 끼니를 먹는다거나 돈이 없다고 해서 두 끼니만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하면서 테니스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동시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시공간 안에서 사람은 오직 한 가지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똑같습니다. 다만 성격적인 차이, 좋은 가문에 태어나거나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차이, 등등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십니다. 만약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총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불평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것을 주셨다
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다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공연히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며칠 전 문득 우리의 삶이 사과를 먹는 것과 비교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과를 깨물어 먹지 않고 껍질을
혀로 핥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사과가 다른 사람의 사과보다 작은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씁니다. 이런 사람은 큰 사과를 얻기 위해서 또 열심히 노력합니다만 큰 사과를 소유하게 되어도 결국 껍질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과를 씹어먹기는 하지만 맛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먹고 배부르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맛을 음미하지 않고 쑤셔 넣기에 바쁩니다. 다른 사람의 사과까지 빼앗아 배부르게 먹지만 사과 맛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과를 맛있게 먹으려면 그 맛을 음미해야 합니다. 한 입을 깨물더라도 온 입안에 퍼지는 맛을, 그래서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경험이 있어야 사과를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설령 다른 사람이 큰 사과를 움켜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과 비교하면서 불평을 하면서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기에 충분한 한 데
나리온을, 즉 삶의 조건을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나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모두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우리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200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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