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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4:17,23 |
|---|---|
| 설교자 : | 오강남 형제 |
| 참고 : |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새길교회 2007.5.20주일설교 |
성서 본문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시니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 마태복음 4:17, 23.
인사
다시 한국에 나와서 이렇게 새길교회 형제자매님들을 만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여러분과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을 뵙고 말씀 증거를 했습니다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제가 제 심중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들 중 가장 중요한 기별이라 여겨집니다. 사실 이 기별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기별이며 동시에 그 분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외치신 기별입니다. 사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저 개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기별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서 한 결 같이 강조하는 기본 가르침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기별이란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다중적 의미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가 늘상 드는 예화 하나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500집이나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호주는 지금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 하는 단계로 올라갑니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사랑과 우의를 나누고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예화에서 우리는 산타 이야기 하나를 두고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주의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새길교회 형제자매님들은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뜻을 넘어서서 더 깊은 뜻을 아시려고 노력하고, 또 많은 경우 이미 그 깊은 뜻을 간파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이 말씀의 표피적, 문자적 차원의 뜻을 넘어서는 심층적, 영적 차원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거나 글로 발표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설교로 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일반 교인들에게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는 예외적이기에 말씀 드립니다. 혹시 제 말씀증거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한 귀로 들으시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절대 여러분에게 강요하거나 여러분을 억지로 설득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문장에서 이 ‘회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보통 회개라고 하면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의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pentance’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conversion’으로 하는 것이 원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을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혹은 “정신 차려라 천국이란 여기 있느니라”라는 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좀 더 깊이 하여,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의식의 바뀜을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transformation’(변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신국’과 똑같은 뜻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썼을 뿐입니다. 하늘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같은 뜻이지만 어느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더 좋지 않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고 하면 저 하늘 어디에 떠있을 지리적, 물질적 나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그런 지리적 개념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 ‘나라’ 혹은 ‘왕국’의 본래 말인 말쿠스(히브리어)나 바실레이아(그리스어)에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는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영어로도 the Kingdom of God보다는 sovereignty of God, reign of God, rule of God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표피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하나님나라, 혹은 천국은 하늘 어디에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믿어서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산타 이야기에서 문자적인 뜻보다 깊은 뜻을 알아볼 수도 있듯,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의 더욱 깊은 뜻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고 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하늘 어디 떠 있다가 이리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라 봅니다. 영어로 ‘God within’입니다.
‘가까이 왔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그것을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그의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등 ‘언제’의 문제로 논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납니다.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닿는 거리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먼저’라는 것을 보면 예수따르미로서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당연히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성경의 기본 진리에 따라, 또 무수한 믿음의 용사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증언에 따라, 세계 여러 종교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바에 따라,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부분, 내 속에 들어있는 신적인 요소, 내 속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라 봅니다.
그런데 더욱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나의 바탕, 나의 근원이란 뜻에서 결국 나의 ‘참나’이기도 합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나님이다. 내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찾는 것은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나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제나’가 죽고 나의 참된 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폴 틸리히의 말, 하나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뜻 깊은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참나를 찾는 길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바탕으로서의 신적 요소, 혹은 내재적 하나님, 곧 참나를 찾는 길을 학생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얼마간의 무리와 오해의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몸이 하나가 아니고 몸은 ‘나’라고 하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소유자, 주인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나인가?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주인이 아니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더 근본적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아닌 그 근본 주인, 그 소유자,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참나,’ 혹은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 ‘내 속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설명해 봅니다.
물론 이런 이론적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깊은 기도 혹은 명상을 해보라고도 합니다. 깊은 기도나 명상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가만히 보면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그 또 하나의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관찰자를 의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기에 이쯤에서 일단 이렇게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고, 이 또 하나의 ‘나’는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나와 다른 ‘나’가 아닌가, 이 ‘나’가 하나님의 일부이든가 아직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그만큼 더 가까운 ‘나’, 혹은 내 속에서 하나님과 맞닿은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참나를 찾으면
이렇게 참나 혹은 내 속의 하느님을 찾으면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열매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저는 그것이 바로 ‘자유’와 ‘사랑’이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의 진정한 나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진리를 깨우치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떳떳함과 늠름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내 맘속에 있는 하나님 믿으란 말이다. 새삼스레 믿으란 말 아니 하여도 계신 하나님이지만, 그 절대자가 바로 이 나의 속에 있는 줄을 알 때, 그것을 확신할 때 우리 생명은 힘 있게 피어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좀 더 실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움츠러지고 주눅 든 삶이 될 수도 있고, 늠름하고 당당한 자유인의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라는 것을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경우, 내 얼굴이나 몸이 잘 생겼다고 여겨지면 우쭐대고 잘 못생겼다고 생각하면 주눅이 듭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을 나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명예 등 사회적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우, 내가 그런 면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지면 육체적 결함이나 잘생기고 못생김 같은 데 구애받지 않고 그만큼 떳떳해집니다. 사회 지도자나 혁명가의 경우 자기가 장애자냐 아니냐 하는 것에 그렇게 구애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론 스스로 사회적으로 지질이 못났다고 생각하면 쭈그러집니다. 좀 더 나아가 ‘나’라는 것을 나의 마음이니 영혼이라는 것과 동일시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어도 그것 때문에 기죽지 않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참나’ 혹은 내 속에 임재한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거기에서 나의 참된 정체성을 찾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세상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속에 뿐만 아니라 남의 속에도 똑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때 자연히 그와 동질성을 느끼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동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태도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신 ‘천국 복음’이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내 속의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국 그의 중심 가르치심에 따라 내 속의 하나님, 내 속의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유명한 책 ??예언자??에서 “훌륭한 일이란 여러분의 큰 나를 사모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 중에 이렇게 참나를 사모하고 그것을 발견하므로 참된 의미를 찾는 분이 많으셨으면 하는 바램을 품으면서 제 말씀증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하나님, 저희는 하나님을 찾아 너무나도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속에, 저희 존재의 바탕에 계시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탕자가 “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서 아버지를 다시 발견한 것처럼, 저희도 저희의 속을 다시 들여다봄으로 당신을 뵙기 원하옵니다. 이제 진정으로 당신을 찾고 당신을 만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참으로 자유인으로, 참으로 의연하고 당당한 참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서로를 진성으로 사랑하면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당신이 우리 속에 계심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옵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시니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 마태복음 4:17, 23.
인사
다시 한국에 나와서 이렇게 새길교회 형제자매님들을 만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여러분과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을 뵙고 말씀 증거를 했습니다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제가 제 심중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들 중 가장 중요한 기별이라 여겨집니다. 사실 이 기별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기별이며 동시에 그 분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외치신 기별입니다. 사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저 개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기별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서 한 결 같이 강조하는 기본 가르침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기별이란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다중적 의미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가 늘상 드는 예화 하나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500집이나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호주는 지금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 하는 단계로 올라갑니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사랑과 우의를 나누고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예화에서 우리는 산타 이야기 하나를 두고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주의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새길교회 형제자매님들은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뜻을 넘어서서 더 깊은 뜻을 아시려고 노력하고, 또 많은 경우 이미 그 깊은 뜻을 간파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이 말씀의 표피적, 문자적 차원의 뜻을 넘어서는 심층적, 영적 차원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거나 글로 발표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설교로 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일반 교인들에게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는 예외적이기에 말씀 드립니다. 혹시 제 말씀증거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한 귀로 들으시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절대 여러분에게 강요하거나 여러분을 억지로 설득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문장에서 이 ‘회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보통 회개라고 하면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의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pentance’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conversion’으로 하는 것이 원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을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혹은 “정신 차려라 천국이란 여기 있느니라”라는 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좀 더 깊이 하여,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의식의 바뀜을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transformation’(변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신국’과 똑같은 뜻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썼을 뿐입니다. 하늘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같은 뜻이지만 어느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더 좋지 않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고 하면 저 하늘 어디에 떠있을 지리적, 물질적 나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그런 지리적 개념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 ‘나라’ 혹은 ‘왕국’의 본래 말인 말쿠스(히브리어)나 바실레이아(그리스어)에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는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영어로도 the Kingdom of God보다는 sovereignty of God, reign of God, rule of God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표피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하나님나라, 혹은 천국은 하늘 어디에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믿어서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산타 이야기에서 문자적인 뜻보다 깊은 뜻을 알아볼 수도 있듯,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의 더욱 깊은 뜻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고 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하늘 어디 떠 있다가 이리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라 봅니다. 영어로 ‘God within’입니다.
‘가까이 왔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그것을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그의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등 ‘언제’의 문제로 논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납니다.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닿는 거리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먼저’라는 것을 보면 예수따르미로서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당연히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성경의 기본 진리에 따라, 또 무수한 믿음의 용사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증언에 따라, 세계 여러 종교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바에 따라,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부분, 내 속에 들어있는 신적인 요소, 내 속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라 봅니다.
그런데 더욱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나의 바탕, 나의 근원이란 뜻에서 결국 나의 ‘참나’이기도 합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나님이다. 내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찾는 것은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나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제나’가 죽고 나의 참된 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폴 틸리히의 말, 하나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뜻 깊은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참나를 찾는 길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바탕으로서의 신적 요소, 혹은 내재적 하나님, 곧 참나를 찾는 길을 학생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얼마간의 무리와 오해의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몸이 하나가 아니고 몸은 ‘나’라고 하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소유자, 주인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나인가?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주인이 아니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더 근본적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아닌 그 근본 주인, 그 소유자,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참나,’ 혹은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 ‘내 속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설명해 봅니다.
물론 이런 이론적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깊은 기도 혹은 명상을 해보라고도 합니다. 깊은 기도나 명상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가만히 보면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그 또 하나의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관찰자를 의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기에 이쯤에서 일단 이렇게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고, 이 또 하나의 ‘나’는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나와 다른 ‘나’가 아닌가, 이 ‘나’가 하나님의 일부이든가 아직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그만큼 더 가까운 ‘나’, 혹은 내 속에서 하나님과 맞닿은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참나를 찾으면
이렇게 참나 혹은 내 속의 하느님을 찾으면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열매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저는 그것이 바로 ‘자유’와 ‘사랑’이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의 진정한 나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진리를 깨우치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떳떳함과 늠름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내 맘속에 있는 하나님 믿으란 말이다. 새삼스레 믿으란 말 아니 하여도 계신 하나님이지만, 그 절대자가 바로 이 나의 속에 있는 줄을 알 때, 그것을 확신할 때 우리 생명은 힘 있게 피어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좀 더 실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움츠러지고 주눅 든 삶이 될 수도 있고, 늠름하고 당당한 자유인의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라는 것을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경우, 내 얼굴이나 몸이 잘 생겼다고 여겨지면 우쭐대고 잘 못생겼다고 생각하면 주눅이 듭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을 나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명예 등 사회적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우, 내가 그런 면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지면 육체적 결함이나 잘생기고 못생김 같은 데 구애받지 않고 그만큼 떳떳해집니다. 사회 지도자나 혁명가의 경우 자기가 장애자냐 아니냐 하는 것에 그렇게 구애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론 스스로 사회적으로 지질이 못났다고 생각하면 쭈그러집니다. 좀 더 나아가 ‘나’라는 것을 나의 마음이니 영혼이라는 것과 동일시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어도 그것 때문에 기죽지 않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참나’ 혹은 내 속에 임재한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거기에서 나의 참된 정체성을 찾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세상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속에 뿐만 아니라 남의 속에도 똑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때 자연히 그와 동질성을 느끼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동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태도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신 ‘천국 복음’이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내 속의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국 그의 중심 가르치심에 따라 내 속의 하나님, 내 속의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유명한 책 ??예언자??에서 “훌륭한 일이란 여러분의 큰 나를 사모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 중에 이렇게 참나를 사모하고 그것을 발견하므로 참된 의미를 찾는 분이 많으셨으면 하는 바램을 품으면서 제 말씀증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하나님, 저희는 하나님을 찾아 너무나도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속에, 저희 존재의 바탕에 계시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탕자가 “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서 아버지를 다시 발견한 것처럼, 저희도 저희의 속을 다시 들여다봄으로 당신을 뵙기 원하옵니다. 이제 진정으로 당신을 찾고 당신을 만나 당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참으로 자유인으로, 참으로 의연하고 당당한 참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서로를 진성으로 사랑하면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당신이 우리 속에 계심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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