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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1401 추천 수 0 2008.12.06 21: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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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7-10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11.4주일설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초대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며 자랑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땅에 속한 것, 인간의 나라만 생각하며 산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국 복음의 의미,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자유와 기쁨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땅에 것만 알고 세속적 질서와 가치에 얽매어 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가치, 거기서 오는 자유와 기쁨을 알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최고의 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 자녀로서 사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고, 몸소 그런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에는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 6:31-34) 믿음이 적은 자들,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을 먼저 구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우선적으로 구하여야 한다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우리가 모임마다 드리는 기도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리스어 원문이나 영어 번역에 들어 있는 단어 하나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즉 당신의 나라, “thy kingdom”이라는 말의 “당신”이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기가 꺼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말 당신은 제 삼자를 지칭할 때는 존칭이지만, 이인칭 대명사로서는 부부간의 호칭으로 제일 많이 사용되며, 흔히 상대방을 낮추어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쟎아.”라고 다툴 때가 그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너” 혹은 “그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마땅한 존칭어 이인칭 대명사가 없어서 그냥 생략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최근에 교단들이 연합해서 다시 번역한 주기도문에는 그래서 이인칭 소유격 대명사 대신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해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이런 식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뜻으로 보면 맞지만 원문의 단어를 바꾼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이것저것 다 마땅치 않을 바에는, 아버지 대신 “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나 생각해 봅니다. “님”은 아름다운 순수 우리말이며 삼인칭도 되고 이인칭 호칭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 어떨까요?

여하튼, 이인칭 호칭을 빼고 그냥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한 편의상의 문제 이상의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님의 나라”라는 것을 명확히 해 두면 우리가 구하는 것이 “나의 나라”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뜻이 더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밥 먹듯이 드리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는 알게 모르게 “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중심이 되는 나라, 나의 아성을 쌓고 나의 영광을 추구하며 나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나의 제국을 구축하는 일에 온 노력과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를 보면 하나님을 나의 왕국, 나의 제국을 건설하고 나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동원해서 나의 소원을 성취하려 드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말 지독히도 욕심 많은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이고, 하나님은 객으로, 그리고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실로 불경함과 불신앙의 극치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그러기는커녕 먼저 나의 소원, 나의 욕망을 잔뜩 나열하고 들어달라고 외치기 일쑤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며,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는 말만 생각하면서 마구잡이로 하느님께 나의 속된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매달려 조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타이르기도 하고 소원을 안 들어주신다고 원망하는가 하면 협박조로 하나님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분명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자기 뜻을 앞세워서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뜻을 굽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이며,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 자기 아성을 쌓아 자기의 안전을 구하려는 끊임없는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마음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인생의 정도이며 신앙의 핵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유혹이 원죄처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보겠다, 무언가 성취해보겠다, 무언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무언가 보여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모든 노력이 다 부질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자기를 놓지 못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치장하고 자기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하고 자기 뜻과 목적을 관철하려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기 뜻을 이룬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출세’했다, ‘성공’했다고 하면서 축하해 주기도 하고 시기하고 헐뜯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권력욕을 포장하여 남을 위한다고, 사회를 위한다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 합니다.

어네스트 벡커(Ernest Becker)라는 사람은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결국 자기가 죽어서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 무의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유한성과 거기서 오는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성취해서 자기를 위해 아성을 쌓고 제국을 건설해서 유한한 자기를 무한히 확대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무한한 욕망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려는 마음이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욕구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해지고자 하는 종교적 욕구,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갈망인지 모릅니다.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모래 위에 지은 집, 경건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 등을 통해서 이렇게 스스로 영원해지려는 우리들의 모든 세속적 노력이나 종교적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식이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을 전적으로 믿고 살듯이 아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입니다. 신앙이란 내가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상으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아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감사하는 행위이며, “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동산에서 그냥 뛰어 놀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우리 인생의 비극은 아등바등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태도, 자기의 아성을 쌓고 제국을 이루려는 교만과 아집, 스스로 자신의 안전(security)을 도모하려는 마음,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마음, 자신의 의와 옳음을 주장하고 정당화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 안쓰럽고 불쌍한 모습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얼마나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한지를 모르고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인생의 비극, 인간 역사의 악순환이 그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우리 인생의 참다운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포기하고 던져버릴 때, 우리의 참된 자유와 행복, 참된 생명 곧 영생이 주어진다는 단순한 진리가 곧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아니 죽은 것이 곧 사는 길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가르침입니다.

개인들만 이렇게 자기 아성을 쌓고 자기 왕국을 구축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단이나 단체들도 자기 영역을 쌓으려 하고 민족이나 국가들도 끊임없이 자기 확장을 통해 자기 제국을 건설하려 끝없이 다툽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이며 이것이 인류 역사입니다. 서로 옳다고 다투며 서로 정의를 주장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악마화하지요. 언제나 자기가 하는 것은 옳고 남이 하는 것은 그르다고 트집 잡고 비난합니다. 자기 나라는 전 세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핵무기를 잔뜩 쌓아놓고 약소국들을 위협하면서 다른 나라가 아무리 평화적 목적이라 주장해도 핵 발전 시설조차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게 압박합니다. 저는 정말 이란이 핵무기 야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또 하나의 커다란 전쟁의 암운이 서서히 드리어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심지어 종교도,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기독교도 이러한 인간의 탐욕과 자기 과시, 자기 확장, 자기 정당화의 유혹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입으로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기도하지만 마음이나 행위는 교회마다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당이나 교육관을 짓는 것으로 부족해서 기도원을 짓고 묘지를 구입하여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왕국을 건설하면서 신도들을 유혹하고 묶어 둡니다. 목사는 수천, 수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대기업 총수 부럽지 않게 제왕처럼 군림합니다. 자기가 곧 하나님인 양 말입니다. 신도들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이 힘들어지자 지교회라 하여 여기저기 영토 확장과 식민지 건설을 합니다. 국내가 힘들어지자 선교라는 이름으로 해외에도 지점망을 둡니다. 초대형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반주로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며 온갖 디지털 매체를 동원하여 거창한 예배를 드리지만, 이것이 진정 “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의 표현인지 아니면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의 발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기 하여라.”는 예언자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 한국의 대형 교회들을 향한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아모스 5:21-24).

사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고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는 순간, 그리고 그 후 국가종교가 되는 순간 이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는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은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은 순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대신 힘과 권력으로 기독교 제국―이른바 Christendom―을 건설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십자군전쟁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 소외 받는 자들의 위로요 희망이었던 교회는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괴롭히고, 무서운 이단척결과 마녀사냥을 일삼았으며,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을 핍박하면서 세상에 군림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변질과 타락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곧장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증언하면서 세상적 질서와 가치를 거슬러 행동하셨기 때문에 당시 정치권력이나 종교적 권위의 미음을 샀으며, 자기를 추종하던 몇 안 되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홀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과 함께 승리의 주님으로 선포되는 순간 제자들은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하나님 대신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형이상학적 사변을 전개하면서 교리논쟁을 일삼다가 공의회를 개최하고 황제의 공권력에 의해 이른바 정통교리라는 것이 확립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예수가 전개했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교회가 은연중 하나님나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다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지상의 예수의 모습은 잊혀져가기 시작했고 부활승천하신 천상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가 끝내 오지 않자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이 땅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로 변형되었고 교회는 이 천국 행 티켓 발매 사업을 독점하면서 무서운 권력기구로 변신했습니다. “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겸손한 자들의 기도는 말 뿐이거나 아예 사라지고 기독교는 철저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에 군림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예수를 따라 살려는 마음은 소수 수도자들이나 탁발승들의 몫이 되어버렸고 주교들과 사제들,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의 통치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반 신도들은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의 일반적 모습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지금까지 수백 년간 뜻있고 생각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기독교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아예 기독교를 떠나버렸지만, 교회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전통의 권위와 신비를 앞세워 무지한 신도들을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텅텅 빈 서구 교회가 말해 주듯이, 이런 전통적 기독교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나라나 몇몇 남미 국가들 그리고 아프리카 후진국들에서만 번창할 뿐 진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을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예수님 자신의 메시지를 배반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으로 이해했지, 결코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이루어는 천상의 세계, 우리가 사후에나 가는 세계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사후의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차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 이 현실 세계였습니다. 억압과 착취가 그치지 않고 억울한 자들의 피와 눈물이 그치지 않는 비참한 현실 세계,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과 평화가 철저히 외면되고 거짓과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이 그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반역은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팔아먹은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천국을 쉽게 하늘에다 팔아먹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 같은 대 신학자들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천상의 천국 장사를 하면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였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벌이신 하나님나라 운동은 온 데 간 데 없고 교회만 번성하여 기독교 제국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천국 행 티켓 발매를 독점한 기독교는 하느님나라를 사실상 독점하였습니다. 기독 이외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천국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의 영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가르쳤지 사람의 아들(인자)인 자기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유대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둘째,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느님나라는 자비로우신 아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지하는 세계이지, 제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하며 살다가도 예수를 믿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천국 영생을 차지하는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화평케 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차지하는 세계,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힘쓰는 자들이 차지하는 세계이지, 교회라는 제도에 몸을 담았다고 무조건 참여가 보장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겸손히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차지하는 세계이지 말끝마다 예수 이름을 들먹이며 “주여 주여” 외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철저히 하나님나라 중심의 선교였습니다. 하나님나라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고 현실화시키는 선교였지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선교나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 민족이나 문화, 그리고 종교의 장벽마저도 초월하는 문자 그대로 열린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조건 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 없는 세계입니다.

지난번 샘물교회가 일으켰던 아프가니스탄 선교 문제의 핵심에는 다른 모든 문제에 앞서서 선교가 무엇이냐는 선교신학의 근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샘물교회 이야기는 벌써 식상한 감이 있지만, 특정한 교회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새길교회의 선교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거론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의 선교가 하나님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예수 중심의 선교(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선교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나라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교회 중심의 선교, 기독교 중심의 전통적인 선교관에 있습니다. 그러한 선교신학을 가지고 있는 한 지난번과 똑 같은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오만과 독선, 기독교 제국주의는 계속될 것입니다. 샘물교회는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샘물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계, 나아가서 세계의 보수적 기독교 전체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도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의 선교관이나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한 배타주의적 신앙과 신학을 가지고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기총 같은 기독교 단체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태의 와중에서도 이렇다 할 성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엉거주춤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툭하면 친미 데모를 조직하여 거리로 뛰쳐나오던 기독교 단체들이 어째서 온 나라를 벌집 쑤시듯 쑤셔놓고 온 국민의 걱정을 사도록 만든 문제, 그것도 정작 당사자인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 그토록 속수무책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이른바 보수적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교회이든 지극히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개인들이든― 대다수는 아직도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는 한 똑같은 사태가 앞으로도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태가 발생하니까 샘물교회 측은 자기들의 활동이 선교가 아니라 순수한 봉사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요. 예수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 생각을 바탕에 깔고서, 봉사는 선교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요. 그러자 납치되었던 신도들이 무사귀환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봉사가 아니라 선교였다고 말을 바꾸고 본색을 드러내면서 사회를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목사님은 당연히 순교자로 칭송 받지요. 실로 생각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행위가 아닙니까?

이 모든 문제는 선교와 봉사를 별개의 행위로 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교에서는 절대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가분적이고 봉사가 곧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세워주는 일, 비인간화된 사람들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도록 세워주고 도와주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선교였습니다. 이 선교에는 교회 안과 밖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이 선교는 기독교인들만의 독점사업일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가 말해주듯이, 세계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든, 작은 자들을 예수님처럼 섬기며 억울하고 힘없는 자들이 일어서도록 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선교사들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교는 결코 사람들을 기독교인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개종해서 기독교인 숫자를 늘리고 기독교 왕국, 기독교 세상을 만드는 일이 정말 하느님이 바라는 일이고 예수께서 원하셨던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언제 그런 선교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기독교 이름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중세처럼 기독교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현 교황님도 아직 이런 시각을 가지고 계셔서 가끔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영토라는 시각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것은 평화를 만드는 일을 당부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배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선교는 그렇지 않아도 분열된 인류 공동체에 더욱 더 갈등과 대립만 조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복음화, 온 세계의 복음화는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스럽지도 않습니다.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온 세계에 기독교 종교 하나만 군림하는 획일적인 세계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계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애당초 왜 인종과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허락하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신앙이란 지금까지 내가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돌이키는 회개, 메타노이아(metanoia)에서 시작합니다. 신앙이란 이제부터는 나를 중심으로 살던 삶, 나의 왕국을 구축하려 했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나라로의 초대장을 받아들고서 지금까지 살았던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을 뉘우치고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중심적 삶,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는 “’my kingdom come” 하면서 나의 제국을 쌓아 올리려고 바동거리며 살아왔지만 이제 이러한 삶이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 집착을 놓아버리고 “thy kingdom come”, 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기도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이 전환이 과감하고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자유로울 것이며 모든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 진정한 기쁨이 여기서 온다는 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 자체가 선교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별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한국이든 외국이든―에서 그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 자체가 선교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는 곳마다 하나님나라를 사건화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가치와 자유를 보여주는 삶 자체가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자유로운 삶, 힘들지만 기쁘게 사는 삶 자체가 선교입니다. 예수를 따라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느 한 순간도 선교와 봉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본질적 질문과 성찰을 해야 합니다. 타락한 신앙인, 불순하고 왜곡된 신앙인이 되지 않게 위해서는 항시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인가? 도대체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위함이며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저는 오늘 아침 이에 대한 저의 이해 한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 한 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에는 순수한 신앙과 순수하지 못한 잡된 신앙 두 종류가 있습니다. “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순수한 하나님 중심적 신앙입니다. 잡된 신앙은 이 신앙을 왜곡해서 말로는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실제 삶으로는 “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신앙입니다. 그것은 사실 신앙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이란 어휘상의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들먹이며 말끝마다 주님을 부르고 예수 이름을 들먹이면서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욕망을 성취하고 채우는 수단이라면 이것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순수성과 불순함의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삶의 매 순간마다 내가 진정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지, 나의 행위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제국을 건설하려 애쓰고 있는지 부단히 성찰해야 합니다. 순수한 신앙이란 매 순간 불순한 신앙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비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하나에 순수한 신앙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고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만 사랑하는 신앙이 너무나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모든 선, 모든 축복의 근원, 아니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것저것”들을 사랑하고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곤 합니다. 이런 사랑은 사실 우리 인간들끼리의 사랑에서도 통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데 나를 통해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나를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겠습니까? 중세 신학자요 영성의 대가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는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젖소나 양초 같이 취급하는 사람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젖을 얻고 나면 필요 없는 젖소 같은 하나님, 어두운 데서 물건을 찾고 나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양초 같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란 말은 “오직 하나님만”이라는 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잡된 신앙은 하느님 더하기 다른 무엇, 혹은 하느님을 통해 다른 무엇을 사랑하고 구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나님 “플러스 알파”를 구하는 마음인데, 이것이 주가 되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마는 것이지요. 엑카르트는 하나님만을 구하면 하느님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도 얻지만, 하나님 더하기 다른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얻지 못하고 다른 것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해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야말로 선 그 자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 같은 대 사상가들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오랜 전통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선(good, bonum) 그 자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은 좋음 그 자체로서, 모든 좋은 것, 모든 크고 작은 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선 자체이신 하느님을 놓아두고 이런 저런 선을 구하거나 하나님 더하기 이런저런 선을 구하는 잡된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인줄 알고 섬기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의 참다운 선, 참다운 행복은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좋은 것을 해 주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래부터 자기 존재의 뿌리인 하나님,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미워하는 사람, 즉 좋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욕망은 나무들이 해를 향해 자라듯이 자연히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 그 자체인 하나님을 좋아하고 구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진리와 덕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돈, 권력, 명예, 쾌락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며, 실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모든 선의 근원인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악을 행하는 사람도―가령 살인 같은 악행이라도― 그것을 행하는 순간만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한 선이라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선이 아닌 것, 좋지 않은 것을 행하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엇이 진정한 선인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이런저런 선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살기도 하며, 심지어 악을 선으로 착각하고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은 선 그 자체이신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고백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쉴 때까지는 평안을 모릅니다.” 선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기까지는 우리에게 참된 선, 참된 행복, 참된 평안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욕망의 구조가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우리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잡된 신앙이 아니고 순수한 신앙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게임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을 모두 얻든지, 아니면 자기를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수단으로 사용하다가 자기도 잃고 세상도 잃고 하나님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삶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그만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는가 봅니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사랑할 것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저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서도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죽음을 스스로 선취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산다는 진리, 죽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생명이 가능하다는 진리, 아니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는 사즉생의 진리야말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정한 하나님 신앙, 진정한 하나님 사랑의 길이며 진정한 행복과 구원의 길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날마다 죽으면서 님만을 기다리며 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신앙생활이고 순수한 하나님 사랑입니다.

만물이 마지막 남은 불을 태우고 서둘러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새길의 형제자매들 한 분 한 분이 “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기도하면서 우리 존재의 뿌리인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마음껏 가지시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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