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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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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창원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는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에 부딪칠 때면, 문제를 이해하고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해결방법을 찾게 됩니다.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또 지혜를 짜면서 획기적인 모색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새삼 놀라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상식적이며 가장 원칙적인데 있다는 것을 긴 과정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증거 하신 핵심적인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매우 짧고 압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 복된 소식은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선포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성요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잡힌 후라고 하는 시간적 전제이고, 둘째는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공간적 전제입니다. 민중신학과 최근의 사회정치 신학은 갈릴리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날카롭게 부각시켜 예수의 복음을 '갈릴리의 복음'으로 이름지을 수 있도록 복음의 갈릴리적 내용과 성격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를 만나려면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셨던 것도 깊은 지정학적인 공간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초점을 시간적 요소에 두면서 복음선포의 전체적 구성요소를 해석학적으로 살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 이사야 6장 이하에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적 증언의 전제도 '히스기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해서 시간적 요소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잡힌 후'라는 '그날 후'(the day after)는 신앙적으로 복음선포의 구성적 전제라는 것입니다. '그날 후'라고 한 것은 커다랗게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경험을 한 다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도 민족공동체에서 역사적 큰 경험을 하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북한은 굶주려 죽고, 남한은 온통 썩어서 죽는다고 할까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던 내일과 장래의 창조적 희망을 진정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과정인 '그날 후'라는 시간적인 사건의 경험을 분명하게 정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경험을 성서적 제시에 따라 3가지 점에서 정리하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의 역사적 경험을 철저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의미를 중요시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삶과 역사를 구성해 나갑니다. 경험은 모든 인식과 지식의 원천적 자료입니다. 경험과 경험에 대한 기억적, 실존적 인식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만큼 개인과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어떤 경험 이전과 이후를 우리는 분간하고 나눌 수 있는 만큼의 실존적 질적 변화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총체적 현실은 이 시점의 역사적 경험의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 심도 있고 깊이 있게 다루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물러나서는 내일도 어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약속과 창조도 오늘의 역사 경험적 현실 가운데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묻지 않는 질문은 대답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모순처럼 느끼고 표현하는 역사적 경험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정치제도, 의식구조, 삶의 형태, 가치체계 등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스스로를 진단해 나가는 역사적 경험의 실체를 경험하는 능력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내일의 기쁜 소식을 예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새시대적 전환과 획기적 비약의 요청적 현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구분은 하나의 특정가치를 중심으로 연대기적 구별과 관계없이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인식방법입니다. '때가 가까웠다'는 카이로스의 시간관은 긴장과 역사적 격동 가운데서 타이밍을 중시하는 질적 시간관입니다. 역사인식에 있어서 의도적인 선택과 의도적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것이 쉽게 이해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결정적으로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의 기쁜 소식은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생명보전의 내용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 시대 정신이 요청하는 당위성은 역사적 경험의 인식에서 그 방향을 제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시되는 방향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밀고 나갈 것인가, 현실 이해에 머물러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차원입니다.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셋째, 의식과 동기와 정신으로 표현되는 영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낡은 시대와 새 시대를 가로 질로 심판과 구별을 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껍질을 벗어버리는 성숙의 과정에 대한 대단한 각오 없이는 새 길은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기초도 역시 활동주체인 인간들의 동기나 의식의 새로운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신적 개혁이 없이는 경제적 성장도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은 과거에 얼마나 효율적이었는가와 관계없이 이제는 더 이상 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다하더라도 우리 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혼을 역사적 맥락으로 바꿔 재해석해 본다면 다시 뛰어보겠다는 동기요, 그래도 움직여 보겠다는 생명의 충동이요, 정신의 발현일 것입니다.
'그날 후'는 우리 인간의 한계적 총체적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난 역사적 사건과 경험의 요약적 표현입니다. '이후'를 진정으로 대망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려면, 이 시대적 인식을 새롭게, 분명하게, 철저하게 하는 시간적 절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지만 이 시간적 전제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귀에만 들려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새 시대를 향해가면서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와중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낙관도 비관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적 경험과 의미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뜻에 비추어 신앙적 이해와 결단을 촉구 받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와 정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재는 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향해 가는 심판이며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증거 하신 핵심적인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매우 짧고 압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 복된 소식은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선포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성요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잡힌 후라고 하는 시간적 전제이고, 둘째는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공간적 전제입니다. 민중신학과 최근의 사회정치 신학은 갈릴리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날카롭게 부각시켜 예수의 복음을 '갈릴리의 복음'으로 이름지을 수 있도록 복음의 갈릴리적 내용과 성격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를 만나려면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셨던 것도 깊은 지정학적인 공간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초점을 시간적 요소에 두면서 복음선포의 전체적 구성요소를 해석학적으로 살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 이사야 6장 이하에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적 증언의 전제도 '히스기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해서 시간적 요소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잡힌 후'라는 '그날 후'(the day after)는 신앙적으로 복음선포의 구성적 전제라는 것입니다. '그날 후'라고 한 것은 커다랗게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경험을 한 다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도 민족공동체에서 역사적 큰 경험을 하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북한은 굶주려 죽고, 남한은 온통 썩어서 죽는다고 할까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던 내일과 장래의 창조적 희망을 진정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과정인 '그날 후'라는 시간적인 사건의 경험을 분명하게 정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경험을 성서적 제시에 따라 3가지 점에서 정리하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의 역사적 경험을 철저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의미를 중요시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삶과 역사를 구성해 나갑니다. 경험은 모든 인식과 지식의 원천적 자료입니다. 경험과 경험에 대한 기억적, 실존적 인식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만큼 개인과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어떤 경험 이전과 이후를 우리는 분간하고 나눌 수 있는 만큼의 실존적 질적 변화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총체적 현실은 이 시점의 역사적 경험의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 심도 있고 깊이 있게 다루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물러나서는 내일도 어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약속과 창조도 오늘의 역사 경험적 현실 가운데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묻지 않는 질문은 대답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모순처럼 느끼고 표현하는 역사적 경험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정치제도, 의식구조, 삶의 형태, 가치체계 등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스스로를 진단해 나가는 역사적 경험의 실체를 경험하는 능력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내일의 기쁜 소식을 예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새시대적 전환과 획기적 비약의 요청적 현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구분은 하나의 특정가치를 중심으로 연대기적 구별과 관계없이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인식방법입니다. '때가 가까웠다'는 카이로스의 시간관은 긴장과 역사적 격동 가운데서 타이밍을 중시하는 질적 시간관입니다. 역사인식에 있어서 의도적인 선택과 의도적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것이 쉽게 이해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결정적으로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의 기쁜 소식은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생명보전의 내용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 시대 정신이 요청하는 당위성은 역사적 경험의 인식에서 그 방향을 제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시되는 방향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밀고 나갈 것인가, 현실 이해에 머물러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차원입니다.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셋째, 의식과 동기와 정신으로 표현되는 영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낡은 시대와 새 시대를 가로 질로 심판과 구별을 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껍질을 벗어버리는 성숙의 과정에 대한 대단한 각오 없이는 새 길은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기초도 역시 활동주체인 인간들의 동기나 의식의 새로운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신적 개혁이 없이는 경제적 성장도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은 과거에 얼마나 효율적이었는가와 관계없이 이제는 더 이상 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다하더라도 우리 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혼을 역사적 맥락으로 바꿔 재해석해 본다면 다시 뛰어보겠다는 동기요, 그래도 움직여 보겠다는 생명의 충동이요, 정신의 발현일 것입니다.
'그날 후'는 우리 인간의 한계적 총체적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난 역사적 사건과 경험의 요약적 표현입니다. '이후'를 진정으로 대망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려면, 이 시대적 인식을 새롭게, 분명하게, 철저하게 하는 시간적 절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지만 이 시간적 전제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귀에만 들려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새 시대를 향해가면서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와중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낙관도 비관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적 경험과 의미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뜻에 비추어 신앙적 이해와 결단을 촉구 받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와 정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재는 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향해 가는 심판이며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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