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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두 양태

마가복음 길희성............... 조회 수 1744 추천 수 0 2008.04.11 19: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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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14-29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 실현하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이지만, 현실은 종종 이러한 희망이 꺾이도록 가혹하여서 믿음의 시련을 가져다줍니다. 시편 기자의 물음대로,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비단 무신론자들만 아니라 신앙인 스스로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있는 미래에 자신의 삶을 걸고 산다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실현되지도 않고 실현될 것 같지도 않은 꿈을 붙잡고 산다는 것, 보이지 않는 실재를 믿고 산다는 것이 때로는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헛된 희망을 깨끗이 버리고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믿음은 본질상 보이지 않는 실재를 향해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겨냥하고 헌신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약속에 따라 앞으로 실현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미래에 우리의 삶을 거는 행위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면 될 뿐이지 믿음의 용기나 결단은 필요 없습니다. 현실만으로는 문제가 안 풀리기에,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미래에 자신을 맡기고 험한 세상에서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부조리와 싸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하나님의 오랜 침묵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 기다림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들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험을 모두 합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분단 50년의 역사야말로 우리를 의심과 절망으로 이끌기 적합한 경험일 것입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풀릴듯 말듯 하면서도 계속해서 꼬이고 마는 남북관계는 정말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특히 죄 없는 수많은 북한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의 절망적인 기아상태를 듣는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오늘날, 그것도 풍요로운 동족을 지척에 두고서 집단적 굶주림이 웬말입니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아무도 의심 못하게 만천하에 드러내시지 않고 숨어 계시는걸까? 정말 계시기는 한 것인가? 왜 하나님은 나 여기 있노라 하고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의심 없이 그의 존재와 권능을 믿고 그를 찬양토록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보이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본질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인식적 거리와 장벽을 전제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강요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운 결단이나 믿음의 모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본질적으로 의심의 가능성을 그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아예 부인할 수 없이, 조금도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 가령 어린아이와 폭군 아버지와의 관계처럼 -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신앙을 매개로 해서만 만나지는 분이십니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볼 때는 죽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강력한 태양 빛을 우리가 직접 쳐다볼 수 없듯이, 하나님도 믿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굴절된 형태로만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의 여지없이 눈으로 대하는 것은 오직 종말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희미하게 보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이다". 지금은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희미하게 보나, 그 때는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이 직접 대면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의 장막 속에서 지상의 나그네로 거처하는 동안은 믿음의 모호성, 불확실성은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믿음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며, 믿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사요 축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연약한 믿음이나마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우리들 자신의 연약하고 불확실한 믿음의 모형을 복음서의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한 간질병 걸린 환자의 아버지와 예수와 제자들의 삼각 이야기입니다. 우선, 제자들의 곤혹스러운 모습에 눈을 돌려봅니다. 제자들과 군중들 사이에 큰 소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예수께서 묻습니다. 병을 고칠 수 없는 제자들과 군중들 사이에 한바탕 시비가 붙었던 모양입니다. 실화일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자들의 무능력한 수치스러운 모습을 초대교회가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병자를 고칠 수 없었는데 지금의 우리들이야 뭐 말할 것 있겠습니까? 너무 실망할 것 없습니다.
다음으로, 누구보다도 우리의 동정심과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사람은 간질병을 앓고 있는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인간적 신앙의 고뇌는 우리의 마음을 곧 사로잡습니다. 오늘날은 간질병도 어느 정도 제어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정말 난감한 병이었습니다. 한 번 발작을 일으키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소문을 듣고 군중들에 끼어서 간신히 예수를 대면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도 다급하고 절망적이니까,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서 그는 선뜻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하실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을 단 말로 예수께 간신히 말을 건네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예수를 만났던 그였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하는 예수의 질책을 받고서는 용기를 내서, 아니 그야말로 다급한 심정으로 "믿습니다"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신 없는 말을 엉겁결에 했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저의 믿음 없음(apistia) 혹은 믿지 못함을 도와주십시오"라는 솔직한 고백의 기도를 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인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래도 믿음 없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에게는 큰 믿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간청할만한 쥐꼬리만한 믿음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믿음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지 못하는 마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최소한의 믿음, 겸손한 믿음입니다.

나는 우리 신앙 생활이 이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한 고백의 동시적 반복 혹은 반복적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특히 다급하거나 위기를 당하면 자기도 모르게 "믿습니다"를 힘차게 외치다가, 어떤 때는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나지막하게 탄식하는 호소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생활입니다. 어떤 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것 같이 신앙 생활이 활기가 넘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신앙에 회의가 들고 맥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이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모순적 태도가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의 신앙을 놓고서 믿음의 두 가지 양태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고백 가운데 하나만을 하는 신앙과 둘 다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는 믿습니다만을 말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믿습니다와 동시에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뛰어든 철없는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이라면, 다른 하나는 믿음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믿음 없이는 살 수 없기에 매달리는 최소한의 믿음, 겸손한 믿음입니다. 둘 다 문제점은 있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은 힘은 있지만 자칫하면 맹목적인 신앙 혹은 광신과 독선으로 치닫기 쉬운 반면, 겸손하고 낮은 믿음은 솔직하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소극적 신앙, 패배주의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자세는 믿습니다와 믿지 못함을 동시에 고백하는 겸손한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심을 모르는 단순 소박한 믿음은 어쩌면 베드로의 신앙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의 신앙과 같아 나중에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한 신앙으로 쉽게 변할 수 있습니다. 혹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가겠노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가지 않았던 큰아들의 믿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겸손한 믿음, 최소한의 믿음은 늘 주님을 배반하면서도 그를 떠날 수 없는 믿음,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도 갈 수밖에 없는 믿음입니다. 늘 부족한 줄 알기에 도움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겸손한 믿음이 우리 한국 교회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새길교회와 낙산교회 두 교회가 합동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친교를 나누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두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신도 교회? 목사님이 없는 혹은 없어도 되는 교회? 교단이 없는 초교파적 교회?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두 교회 다 일관성을 유지하지는 못했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목사를 안 둔다는 것이 무슨 교회의 원칙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신앙의 유형 혹은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의심하고 고민하는 교회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겸손한 신앙의 교회라는 점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아닐까하는 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어렵고 곤혹스럽게 느껴지며 그렇다고 포기도 못하는 교회, 그리하여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간구 없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교회가 아닌가 합니다. 믿음 좋다고 큰소리 치는 교회는 결코 아닙니다. 말끝마다 "주여 주여"를 외치고 목사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믿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화답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의심하고 주저하고 고민하고 비틀거리는 교회입니다. 제자들처럼 자신의 무능을 의식하고 곤혹스러워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간질병 든 아이의 아버지처럼 얼떨결에 믿는다고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탄하며 호소할 수밖에 없는 솔직한 인간적 신앙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습니다"라는 고백보다는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의 기도가 더 절실하고 어울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때, 우리 인생의 어느 답답하고 클클했던 시절, 아니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를 만나서 얼떨결에, 아니 철이 없이 "믿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에 덜컥 붙잡혀 버린 자들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 생각할수록 점점 더 이 믿음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도망치자니 도망도 못 가겠고, 도망쳐 봤자 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솔직히 "나의 믿지 못함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저하고 회의하고 수줍어하는 조용한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사로잡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교회가 이 두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은총에 의해 스스로도 놀라는 일들을 가끔씩 체험하는 교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의 결론대로, 이러한 믿음의 기적과 권능은 오직 기도의 힘 외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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