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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칭호의 배경과 의미

마가복음 이경숙............... 조회 수 1837 추천 수 0 2008.06.02 19: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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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27-30 
설교자 : 이경숙 교수 
참고 : 새길교회 
올해도 어김없이 강림절이 찾아 왔습니다. 강림절이란 교회력에서 크리스마스 전 4주일을 차례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Advent 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로 '오신다', '왕림하신다' 라는 뜻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속에 또 삶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까지 4주일을 남겨 놓고 외국에서는 교회와 가족과 친구들 모두 파티준비, 선물 고르기, 카드 보내기 등으로 아주 분주한 계절입니다.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너무 상업화하여 민망할 정도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서로서로 너무 바쁘고 또 24일에도 입시 업무가 치러지는 등의 일로 강림절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가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고 또 그분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기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감격해 하며 감사해 하는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강절을 맞이하여 크리스마스의 의미 곧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르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우선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시아흐' 에서 나온 '메시아'란 말의 헬라어 말입니다. 그리고 본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은 야훼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하여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칭호는 주로 왕이나 제사장을 칭하는 칭호로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붙여지는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기름 붓는' 의식은 주로 야훼의 이름으로 제사장에 의해 또는 예언자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미래의 왕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그를 성별하고 동시에 그에게 왕의 직무를 위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미래의 종말론적 통치자를 메시아로 직접 지칭한 적은 없습니다. 예언서에서는 미래에 통치할 인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야훼에 의해 임명되어 전권을 가지고 미래를 통치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보통 넓은 의미에서 야훼에 의해 파견된 통치자 즉 메시아로 칭해집니다. 이러한 이상적 통치자에 대한 기대는 구약성서에서 이사야 9장 1∼7절과 11장 1∼9절에 나타납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 . .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사 9 : 6∼7).

이렇게 이사야서 9장과 11장에 나타난 메시아는 미래에 이 세상에서 통치할 왕을 칭하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새 가지에서 나는 등 다윗 왕가와 관련은 있지만, 현재 다윗 왕권과는 단절을 겪어 새로운 전환을 가져 올 인물로 묘사됩니다. 메시아는 암흑 속에 살던 백성들에게 평화와 해방을 실현하고, 정의를 실현할 통치자이며, 야훼의 영을 부여받았고, 우주적 평화와 통일을 이룩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미가서 5장 2∼4절에도 메시아의 통치가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메시아는 전혀 새로운 평화의 왕으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며, 정치적으로 앗시리아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미가서에 나타난 메시아는 태초부터 예정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발전된 메시아 선재설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이렇게 왕으로 또 통치자로 나타날 메시아를 기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음은 잘 이해가 됩니다. 예수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분이시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을 앗시리아나 바빌론 등 구체적인 이방의 위험으로부터 해방할 분으로 여겨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스가랴서에 보면 메시아에 관한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스가랴서 9장에 보면 미래의 통치자 메시아는 여전히 왕으로 불리지만 그에게는 보통 왕에게 부여된 모든 특징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의 역할 즉 공의와 구원을 베풀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유(겸손)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 : 9∼10).

말은 보통 전쟁의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왕은 보통 말을 탑니다. 그러나 여기의 왕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탈 것입니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이고 또 구원을 베푸실 왕이지만 온유하셔서 (다른 사본에는 '겸손하셔서', 혹은 '자신을 낮추어서'로 되어 있다)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왕은 다른 곳에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자로 나타나는 반면, 여기서는 스스로가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메시아에 관한 표상은 구약성서에서 아주 특이하고 새롭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메시아 표상이 포로기 이후에 정치적 능력을 상실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자기이해가 영향을 주었든지 아니면 제2 이사야의 '고난의 종' 노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무기력하고 약한 메시아 상은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도 메시아의 활동범위는 '땅 끝'까지 확장됩니다.

한편 다니엘서에서는 새로운 미래의 통치자 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인자로 칭해지는데 종말 때에 이 세상을 통치할 인물입니다. 인자는 메시아와는 달리 마지막 종말의 때의 심판과 관련이 있는데, 그는 선재적 존재로서 천상에 계시다가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때 새 시대 의 거룩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새 시대를 통치하기 위하여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인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아들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가진 천상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미래의 정의로운 통치자로서 메시아와 쉽게 동일시되었습니다. 메시아-인자는 천상적인 존재로 종말시에 비로소 활동을 하며 의로운 백성들을 위로하며, 새 세상을 통치하고, 암흑 속에 살던 백성들에게 해방과 평화와 기쁨을 선사합니다.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약한 자들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정의의 존재입니다.

여태까지 구약성서에서 메시아 상이 어떻게 꾸준히 새롭게 재해석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들 중에 일부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면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구약의 메시아 상이 집중되어 나타내 보이신 분이 예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는 예수 자신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전에 생각하고 칭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0세기 초 까지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의식하고 제자들에게 이를 비밀로 하라고 명령한 것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이 바로 예수가 메시아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제자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명령한 증거가 되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 예수는 메시아를 구약에서와 같이 민족적이고 현세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정신화되고 내면화된 의미로 이해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1901년 Wrede라는 학자 이후 이러한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Wrede 이후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예수 당시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미래적 구원자로서 종말의 인물 인자를 칭하는 칭호와 동일시되었고, 이 인물의 선재적 성격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아-인자로 고백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경험이 예수의 메시아 칭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 사건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음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예수의 메시아 칭호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그의 사역에서 보고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본질보다는 그의 기능, 그의 존재보다는 그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그가 무엇을 행하였는가"에서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그리스도 됨을 오로지 그의 행위 즉 구원의 행위에서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병든 자들을 고치고, 약한 자를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함께 울고, 웃었으며, 여인들을 차별하지 않았고, 남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으며, 아이들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 신약성서는 이런 점에서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사렛 예수보다 더 위대한 메시아, 그보다 더 확고한 삶이나 그보다 더 위대한 모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교회는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존재론적으로 본질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양자론, 단성론, 성육신론, 가현설 등등이 그런 논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이러한 본질이나 존재론적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동력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철학적 사변에로 빠지게 하는 난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어떻게 재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해는 보통 우리의 자기 인식보다 더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도 미숙한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성숙의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숙한 예수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일어나는 IMF 사태 등 여러 가지 현상을 보면서 예수의 비판하는 정신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깨어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율법학자들에게 대항하였고 기존 종교 질서에 대하여 "No!"를 외쳤던 분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암기식 교육을 받은 사회의 지도층이 국가 경영에서 너무나 진부하고 안일하게 독창성 없이 권위에 순종만 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 순종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세상을 살은 국가의 공무원들과 권위주의에 빠진 독창성 없는 지도자의 결합이 이루어 낸 결과가 바로 IMF 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의 저항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예수가 순응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저항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지 않고 감수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로서 예언자적 직능을 수행하셨고, 고난의 종으로, 또 세상에 새로운 패라다임을 전하심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로고스, 선재적 존재, 영광과 존귀 등으로 묘사되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모습보다 훨씬 더 우리들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보는 창의적인 사고는 우리 사회를 평화와 화해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습과 전통의 틀을 깨고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보셨고 아울러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관계도 동등한 관계로 승화시키셨습니다.

부디 강림절 절기를 맞이하여 우리도 과감히 사고의 틀을 깨는 사고의 대전환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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