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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7: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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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배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1999년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2000년 이후의 미래 삶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가 인간에게 전대미문의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처럼 미래를 기다리고 그것을 신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희망을 갖고 희망 속에 살 수 있도록 하는 미래라는 시간적 지평이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더욱이 제3천년기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성이 인간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며 들뜨게 합니다. 아마도 IMF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한국민족에게 있어 3천년시대는 분명 희망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만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은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종래의 생활방식, 사고형태, 습관적 의식이 근본적으로 되물어지지 않은 채 미래를 바란다는 것은, 예컨대 과학기술을 신뢰하고 경제호황을 바라며 장밋빛 Utopia를 꿈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말씀은 평범하게 진리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불에 던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미래, 참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을 근본적으로 되묻는 가운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되돌아보고 삽니까? 교수라는 틀 속에서, 고위공직자라는 테두리 안에서, 의사로서 또는 일반 직장인의 범주 속에서, 가정주부로서, 총칭하여 일상의 틀 속에 갇혀 마치 38년 된 병자처럼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요한복음(누가복음 10장 이하 참고) 3장에는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선생의 위치에 있었고 지식과 재산 그리고 명예 모두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고 자기 스스로도 삶의 당위성을 일깨우는 율법에 대한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도 허했습니다. 성서에는 그가 깊은 고민을 가졌다고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신분, 위치, 남들이 바라보는 시각 등등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거짓으로 삶을 버텨왔던 것 같습니다. 이런 유대인의 관리가 급기야 한밤중,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와 삶의 근본을 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영생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자기 자신이 다시 태어나기를 간구했겠습니까? 성서에는 '영생', '거듭남' 등등의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되묻고자 하는, 곧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제의 근원을 피하기 위하여 자꾸만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터에 그는 모진 결심 하에 자신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절규가 가끔씩 나 자신의 이야기로 읽혀지고 있을 즈음 한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의 최근 상담기록을 적어 놓은 것으로 '성공한 노교수의 한 맺힌 고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습니다. 환갑이 넘어 정년 퇴직을 앞둔 비교적 명성 있는 한 교수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따뜻한 성품에 실력까지 갖춘 그는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최근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잘못 살았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잘 컸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처지인데 무슨 행복에 겨운 소리인가? 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되질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한 맺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현대인,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노이로제를 슈드 비(Should be) 콤플렉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교수, 목사 체면에, 선생이 이래서야, 남자는 모름지기 등등 사회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집단적 사고가 생활 곳곳에 깔려 있음으로 해서 그곳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노교수는 '나는 자식을 키울 때도, 며느리를 맞을 때도, 심지어 내 취미생활을 할 때조차도 내가 교수, 덕망 있는 교수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인,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당위를 많이 강요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소리만 모두 다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들을뿐더러 그 말씀이 최고의 학자, 목사들에 의해 해석되어 전달됩니다. 더욱 좋고 화려한 소리들이 난무한 가운데 우리는 늘 더 좋은 소리를 찾게 되고 마치 아편과도 같이 더 큰 강도로 다가오는 자극적 소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통해 수없이 마음의 가난의 필요성을 들었지만 정작 마음이 가난해져 본 경험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누구의 생각, 설교, 하느님 말씀을 통째로 삼켜 놓기는 하였는데, 그래서 삼킨 것은 늘 내 안에 있지만 그것이 진짜 내 것으로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말씀과 가르침이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한 채 남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내 생각, 내 소신, 내 가치관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 중에서 많은 부분이 아직 내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나, 목사나, 사회적 통념, 교회의 의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으되 내 것이 되지 못한 것들로 인해 고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고민이었고 '성공한 노교수'의 절망이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은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참된 자기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현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한의 확대재생산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에게 니고데모의 고민이 귀하게 여겨지며 마지막 순간 은밀한 밤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의 그 결단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속은 한없이 물러 있는데 껍질은 점점 두꺼워져가고 있는 자신의 근본문제를 피하지 않고 그 높은 신분, 처지, 명예를 마다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의논하는 니고데모, 성공한 교수체면을 무릅쓰고 스스로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는 교수의 마음을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해결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런 물음 속에서 예수는 과연 어떤 대답이 되시는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에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고, 관계된 누가복음 10장 이하에는 알고 있는 대로, 네가 가르친 그대로 실제로 행하는 새로운 삶의 차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답변은 모두 관념적이지 말고 실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러한 관념을 있게 한 근본 토대와 직접 부딪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흔들리는 나무가지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성령의 존재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관념적이기 쉽습니다. 더더욱 교회는 믿음을 율법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교회가 고백해 놓은 신조 384개 정도를 믿어야 한다는 계산을 어느 학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실재와 부딪쳐 자신 속에 있는 '남의 것', 그 타자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낼 때 비로소 자기 소리, 제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제소리를 내는 일, 자기 소리를 터뜨리는 일 바로 이것이 성령의 삶입니다. 제소리란 자신의 본질을 꿰뚫었을 때, 실재(하느님)와 부딪혔을 때 나오는 소리입니다. 평생 남의 소리, 남의 말을 내고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세계에 들지 못한 삶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서도, 불교경전도 모두 그 자체는 남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제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쉽게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 인식된 믿음입니다. 자신의 본성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 나온 고백이 못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참된 믿음, 구원 즉 제소리를 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입니다. 공부란 자신의 모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배우고 채우는 일이며, 수양이란 자신 속의 지나친 것을 끊임없이 덜어내고 자신을 비워내는 노력입니다. 삶에 있어서 과불급, 지나치고 모자라는 일에 대한 매일매일의 갈고 닦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 종교인, 신앙인들은 다른 일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슈드 비' Complex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것을 덜어내며 살아야할 경우가 많습니까? 얼마나 우리 자신의 모자람을 위해 거듭 깨어 있어야할 때가 많습니까? 시인 김광균의 지적대로 인간은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부조리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 오늘의 교회는 공부와 수양을 잊어 버렸습니다. 믿음의 관념화, 규범화로 인하여 니고데모의 심각한 고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근원으로부터 점점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공부와 수양이 없어짐으로 나쁜 나무로 변해갈 뿐입니다. 종교라는 틀 안에 있으면서도, 신앙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나쁜 나무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모릅니다. 나쁜 열매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앙의 세계 속에서 너무나 많이 맺혀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수양이 없는 삶은 넓은 길이며 공부와 수양이 있는 삶은 좁은 길의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좋은 소리, 좋은 말씀, 좋은 생각을 얻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내 속의 타자로 남겨 두지 않고 그 말씀과 더불어 매일매일 고투할 때 그 말씀은 'should be complex'로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나를 자유케 하는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도 도에서 멀지 않다는 공자의 이야기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3천년기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도를 넓히는 것입니다.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 미래가 인간세계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오늘,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더욱 좋은 나무가 되려고 노력하여야 할뿐입니다. 어떤 결과, 어떤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문제의 근원을 피하지 않았던 니고데모의 고민이 되살아나야만 할 때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읽어드린 요한복음(누가복음 10장 이하 참고) 3장에는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선생의 위치에 있었고 지식과 재산 그리고 명예 모두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고 자기 스스로도 삶의 당위성을 일깨우는 율법에 대한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도 허했습니다. 성서에는 그가 깊은 고민을 가졌다고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신분, 위치, 남들이 바라보는 시각 등등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거짓으로 삶을 버텨왔던 것 같습니다. 이런 유대인의 관리가 급기야 한밤중,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와 삶의 근본을 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영생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자기 자신이 다시 태어나기를 간구했겠습니까? 성서에는 '영생', '거듭남' 등등의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되묻고자 하는, 곧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제의 근원을 피하기 위하여 자꾸만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터에 그는 모진 결심 하에 자신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절규가 가끔씩 나 자신의 이야기로 읽혀지고 있을 즈음 한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의 최근 상담기록을 적어 놓은 것으로 '성공한 노교수의 한 맺힌 고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습니다. 환갑이 넘어 정년 퇴직을 앞둔 비교적 명성 있는 한 교수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따뜻한 성품에 실력까지 갖춘 그는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최근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잘못 살았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잘 컸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처지인데 무슨 행복에 겨운 소리인가? 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되질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한 맺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현대인,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노이로제를 슈드 비(Should be) 콤플렉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교수, 목사 체면에, 선생이 이래서야, 남자는 모름지기 등등 사회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집단적 사고가 생활 곳곳에 깔려 있음으로 해서 그곳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노교수는 '나는 자식을 키울 때도, 며느리를 맞을 때도, 심지어 내 취미생활을 할 때조차도 내가 교수, 덕망 있는 교수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인,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당위를 많이 강요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소리만 모두 다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들을뿐더러 그 말씀이 최고의 학자, 목사들에 의해 해석되어 전달됩니다. 더욱 좋고 화려한 소리들이 난무한 가운데 우리는 늘 더 좋은 소리를 찾게 되고 마치 아편과도 같이 더 큰 강도로 다가오는 자극적 소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통해 수없이 마음의 가난의 필요성을 들었지만 정작 마음이 가난해져 본 경험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누구의 생각, 설교, 하느님 말씀을 통째로 삼켜 놓기는 하였는데, 그래서 삼킨 것은 늘 내 안에 있지만 그것이 진짜 내 것으로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말씀과 가르침이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한 채 남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내 생각, 내 소신, 내 가치관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 중에서 많은 부분이 아직 내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나, 목사나, 사회적 통념, 교회의 의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으되 내 것이 되지 못한 것들로 인해 고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고민이었고 '성공한 노교수'의 절망이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은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참된 자기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현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한의 확대재생산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에게 니고데모의 고민이 귀하게 여겨지며 마지막 순간 은밀한 밤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의 그 결단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속은 한없이 물러 있는데 껍질은 점점 두꺼워져가고 있는 자신의 근본문제를 피하지 않고 그 높은 신분, 처지, 명예를 마다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의논하는 니고데모, 성공한 교수체면을 무릅쓰고 스스로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는 교수의 마음을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해결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런 물음 속에서 예수는 과연 어떤 대답이 되시는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에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고, 관계된 누가복음 10장 이하에는 알고 있는 대로, 네가 가르친 그대로 실제로 행하는 새로운 삶의 차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답변은 모두 관념적이지 말고 실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러한 관념을 있게 한 근본 토대와 직접 부딪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흔들리는 나무가지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성령의 존재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관념적이기 쉽습니다. 더더욱 교회는 믿음을 율법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교회가 고백해 놓은 신조 384개 정도를 믿어야 한다는 계산을 어느 학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실재와 부딪쳐 자신 속에 있는 '남의 것', 그 타자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낼 때 비로소 자기 소리, 제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제소리를 내는 일, 자기 소리를 터뜨리는 일 바로 이것이 성령의 삶입니다. 제소리란 자신의 본질을 꿰뚫었을 때, 실재(하느님)와 부딪혔을 때 나오는 소리입니다. 평생 남의 소리, 남의 말을 내고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세계에 들지 못한 삶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서도, 불교경전도 모두 그 자체는 남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제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쉽게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 인식된 믿음입니다. 자신의 본성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 나온 고백이 못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참된 믿음, 구원 즉 제소리를 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입니다. 공부란 자신의 모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배우고 채우는 일이며, 수양이란 자신 속의 지나친 것을 끊임없이 덜어내고 자신을 비워내는 노력입니다. 삶에 있어서 과불급, 지나치고 모자라는 일에 대한 매일매일의 갈고 닦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 종교인, 신앙인들은 다른 일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슈드 비' Complex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것을 덜어내며 살아야할 경우가 많습니까? 얼마나 우리 자신의 모자람을 위해 거듭 깨어 있어야할 때가 많습니까? 시인 김광균의 지적대로 인간은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부조리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 오늘의 교회는 공부와 수양을 잊어 버렸습니다. 믿음의 관념화, 규범화로 인하여 니고데모의 심각한 고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근원으로부터 점점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공부와 수양이 없어짐으로 나쁜 나무로 변해갈 뿐입니다. 종교라는 틀 안에 있으면서도, 신앙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나쁜 나무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모릅니다. 나쁜 열매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앙의 세계 속에서 너무나 많이 맺혀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수양이 없는 삶은 넓은 길이며 공부와 수양이 있는 삶은 좁은 길의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좋은 소리, 좋은 말씀, 좋은 생각을 얻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내 속의 타자로 남겨 두지 않고 그 말씀과 더불어 매일매일 고투할 때 그 말씀은 'should be complex'로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나를 자유케 하는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도 도에서 멀지 않다는 공자의 이야기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3천년기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도를 넓히는 것입니다.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 미래가 인간세계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오늘,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더욱 좋은 나무가 되려고 노력하여야 할뿐입니다. 어떤 결과, 어떤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문제의 근원을 피하지 않았던 니고데모의 고민이 되살아나야만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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