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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사

마가복음 차옥숭............... 조회 수 1557 추천 수 0 2008.08.26 11: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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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22-25 
설교자 : 차옥숭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5.10.16 주일설교 
제목: 마지막 식사
본문: 마가복음 14:22~25
설교: 차옥숭 자매 (새길교회 2005.10.16 주일설교)

1995년 겨울 저는 여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성바오로딸 수녀원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침묵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23분의 수녀님들과 신부님 1분 그리고 저까지 25명이 피정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은 눈이 많이 오면 외부와 차단이 되곤 하는 산골 마을로, 얼마나 깊은 골짜기인지, 6.25가 났을 때에도 전혀 몰랐다가,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런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몹시도 아름다운 그 마을은 주민의 90%가 천주교 신자이며, 마을 면장님이 “오늘 6시 미사는 어느 곳에서 드리기로 했습니다”라고 마이크로 동네 전체에 알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밤이면 별들이 하늘 가득히 쏟아지고, 눈이 하얗게 덮힌 아름다운 마을 정경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녀님들의 피정에는 가톨릭 평신도들도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인 저는 특별한 배려로 그곳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조건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성체를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주일 동안 강론 듣고 산책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의 강론의 내용은 모두가 “어떻게 하면 나를 하느님께 온전히 바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는데 저에게는 유익하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3, 4일 째 되는 날 외부에서 신부님이 한 분 더 오시고 수녀님들이 두 줄로 서서 고해성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거기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식사 때 신부님이 식사 후에 시간이 있으면 보자고 했습니다. 식사 후에 그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저도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나이 들고 철이 들면서 자주 저를 괴롭히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앞에 풀빵을 구워 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 할머니를 속이고 풀빵을 몇 번 가져다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저를 그렇게 괴롭혔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난한 할머니를 속였다는 것이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도, 초라한 모습으로 서서 풀빵을 굽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기만 하면 죄책감도 죄책감이지만,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저도 고해성사를 해서 용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가난하고 초라한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할 때 겪는 그 괴로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수녀님들이 줄을 서서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부러웠습니다.

그날 밤 저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님은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러고서 신부님은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고 죄 사함을 받는 개신교 전통에 대해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고해성사가 갖는 심리적인 효과의 좋은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도권은 개신교와의 공동성찬례를 용인하고 있지 않지만, 개별적인 경우 예외적으로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영성체를 허락합니다.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자진해서 청할 경우에 베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서의 강론은 주로 ‘어떻게 하면 온전히 그 분에게 헌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 다음날 오전과 오후 강론은 특별히 영성체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식탁에 하얀 테이불보를 덮고 성체를 모시고 식탁 가장자리를 꽃으로 장식하고 식탁 주변에 모두를 둥글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 주님의 피” 할 때 “아멘” 하는 사람에게 영성체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이 저에게 영성체를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만일 예수께서 이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다면 나만 개신교 신자라고 제외시키지는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님의 몸” 했을 때 “아멘”하고 “주님의 피”했을 때 “아멘”하고서 영성체를 받았습니다.

그전에 교회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았지만, 그날은 어렵게 받은 떡과 포도주여서인지, 또는 신부님의 강론 때문인지 저는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받고 나서, 주님의 몸과 피를 내가 내 안에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한 나쁜 생각도 티끌만한 미운 마음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늘도 별이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평소의 나답지 않게 모든 것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면서 어떤 것에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잔잔해지니 모든 것이 평화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불가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전통의 성만찬 예식이 너무 형식적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식사는, 그분의 공생애와 뗄 수 없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식사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또한 그분의 식사공동체는 이스라엘백성의 식사공동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종교축제일이나 가정축제일에 거행하던 식사에는 정해진 형식이 있습니다. 먼저 손을 씻고 포도주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전식이 있고, 그 뒤에 가장이나 주례자가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후에 빵을 나누어 모든 참석자들이 다른 음식과 함께 먹는 본식이 있고, 마지막으로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후식이 있습니다. 식사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교 축제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마다 거행되는 유월절 만찬입니다. 이 만찬에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야웨의 구원업적을 기억하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유월절 축제는 탈 이집트 이전에,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기 전에 거행하던 봄의 축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근동지역의 유목민들은 봄이 되면 겨우내 머물던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천막을 치며 유목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첫 날 밤에 새끼양이나 어미양을 잡아 그 피를 천막의 말뚝에 뿌리든지 천막의 문지방이나 문설주에 발라서 그들의 집과 가축을 위협하는 악령을 쫒고, 자신들의 신이 새로운 유목여정을 돌보아 주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가족 또는 부족민끼리 공동식사를 함으로써 일치와 단합을 도모했습니다.

이렇게 유목민의 봄의 축제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추수감사축제가 결합되고 여기에 다시 이집트 탈출의 기념이 겹쳐지면서 새로운 의미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래서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슬픔에서 즐거움으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현재화시키는 축제가 됩니다.

근동 사람들에게 공동식사는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습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 일이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유다교의 식탁공동체는 하느님 앞에서의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가장이 찬미의 기도를 드리고 나누어 주는 그 빵 한 조각을 받아먹음으로써, 식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그 찬미의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의 식사를 금기시하였고, 예수께서 세리,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께서 이른바 죄인들을 끌어들여 식사공동체를 만드신 것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합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죄인에 대한 용서의 표징인 식사공동체는 당시 지배적인 사상과 체제와의 갈등과 대결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죄인들에게 용서를 선포한 예수의 행동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전통적 신앙 규범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고, 그 갈등과 대립은 급기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예상하면서 마지막 식사를 마련합니다. 신약성서는 마지막식사에 관한 네 가지 기사를 전합니다. 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22-25, 루가복음 22:14-20, 고린도전서 11:23-26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만을 전할 뿐 식사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상하면서 마련한 마지막 식사는 여타의 식사공동체와는 구별됩니다. 물론 마지막 식사 역시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한 식사, 즉 메시아 시대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공동체를 미리 보여주고 구현한 식사와 밀접히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식사는 이전의 공동식사와 비교해서 분명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예수가 함께 함으로서 공동체가 가능했지만, 마지막식사는 다가온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질 새로운 상황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식사의 전환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련하신 마지막 식사는 유다인의 식탁예식에 따른 것은 확실합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그리고 축복의 기도를 드린 뒤에, 잔을 건네주시면서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는 나의 몸이다”,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식사 중에 이렇게 해석된 빵과 잔을 제자들에게 전하면서 자신의 죽음과 운명에 참여하는 공동체에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그때 팔레스타인의 그 자리에 한정된 초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의 예식에 참여할 때 우리 역시 그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2천 년 전 떡과 포도주를 나누던 바로 그때 그 식탁에 우리들을 초대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의 그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현재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는 참된 하느님 예배에, 자아 봉헌의 예배에 우리가 실존 전체를 들어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 실존 전체를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더 강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존체험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만을 찾는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 서로 분리된 여러 사람들이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의 변화입니다.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 10,17)라는 말씀처럼, 서로 아픔과 슬픔을 나눌 줄 아는 공동체로의 변모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당신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모습은 힘이 넘치는 하느님이 아님을 저희들 잘 압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님을 잘 압니다. 십자가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그대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저들이 몰라서 그랬으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 하시는, 바로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오는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힘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만찬에 우리를 초대하셔서 당신의 사랑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시는 주님 두렵지만 저희들 당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따금씩 드리는 성만찬이 형식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실존 전체를 가지고 당신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고린도전서가 마가복은 보다 먼저 쓰여졌지만 그보다 먼저 예수의 죽은 이후 10년 안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랜 전승인 아라메어 전승을 보존하고 있는 마가의 기사에는 루가나 고린도전서에 보이는 “여러분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최후 만찬의 거듭 행하라는 명령은 예수가 친히 내리신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규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교회는 성만찬을 교회의 삶의 중심에 두고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1'

^^

2012.01.30 21:21:54

교회법전 조항의 "비가톨릭교회"나 "비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이라는 표현은
참회(고해)와 성찬(성체), 병자 성사의 고유한 (성품성사를) 유효하게 보존하는 교회들을 말하는 것으로
동방 교회(정교회)들과 같은 조건에 있는 다른 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신교를 포함하는 용어가 아니다. 개신교를 표현하는 가톨릭 용어는 "교회적 공동체들"이다.

개신교인들는 (만인제사장설)이기때문에 가톨릭적 성사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교회일치운동은 정교회등을 두고 가능한 말이고 개신교들을 위해서 성교회의 본질을 상실시키면서 까지
무리하게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을 요구하는 것은 가톨릭 성체성사에 대한 중대한 오류다

다른 교회(개신교)의 신자가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는 실제 변화를 고백하여야 한고.
또한 올바로 준비한 경우라고 하는것은 개종을 전제로한 예비자 교리정도를 이수중이거나 해야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단계에 이른자라야 죽음의 위험이나 긴급성에 교구장, 주교회의의 판단이 뒷받침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단지 그 위급하고 중대한 이례적 상황에 처한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위한 것일 뿐이다.

혹시라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죽음을 목격하게되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선
그 당사자의 영성의 정도(비신자나 개신교인 또는 가톨릭인)를 구분할 수 없더라도
교도권자가 아닌 천주교신자 누구라도 종부성사를 배풀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비신자나 개신교인들의 일반적인 상황을 확대 해석하여
가톨릭 교역자들이 이들에게 적법하게 영성체를 주는것은 절대로 불가하다.



어떤 오류문서를 보셨다면
그 문서의 작성자 개인분의 에큐메니컬 오류 성향이지 정통 가톨릭의 입장이 아니다.
이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영적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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