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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

마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032 추천 수 0 2008.10.22 19: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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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25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2월 9일 주일설교 
제 목 : 용서와 화해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마가복음 11장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용서와 화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892년에 세상을 떠난 네덜란드의 유명한 복음전도자였던 코리텐 붐 여사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습니다. 코리텐 붐 여사는 독일이 화란을 점령했을 때 유대인으로써 온 가족이 체포되어 악명 높은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흉악한 수용소 간수들의 학대 하에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그곳에서 언니도 세상을 떴습니다. 독일이 항복했을 때 코리텐 붐 여사와 그의 남동생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코리텐 붐 여사는 그 수용소에 있을 때 독일인 간수가 그와 언니에게 행한 흉악한 행동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밖에 나오게 해서 전신을 발가벗겨 온갖 성폭행을 다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언니가 죽었고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고 난 다음에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너를 괴롭히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해서 독일 각지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도시 하루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서 코리텐 붐 여사하고 악수를 하는데 그만 한 사람의 중년신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의 온몸은 얼어 붙었 습니다. 그 사람은 낡은 외투의 깃을 세워 입고서 깊숙이 포켓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이고 앞을 걸어 나오는데 그 악명 높은 나치 수용소의 감독이요, 그가 바로 자기 언니와 그를 벌거벗겨 놓고 온갖 성폭행을 다했던 당사자였습니다. 이제 민간인이 되어서 패전한 독일의 한 시민으로써 집회에 참석했다가 자기에게 인사하러 나왔는데 그 사람은 코리텐 붐 여사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 많은 죄수 중에 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코리텐 붐 여사에게는 꿈에도 잊지 못할 원한에 사무친 당사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앞에 나오자 코리텐 붐 여사는 온갖 수용소에서 당한 그 고통과 괴로움이 주마등처럼 그 마음속에 살아났습니다. 그 사람이 나오자마자 그 앞에 나와서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하자 코리텐 붐 여사는 결코 손을 내어 악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기분은 당장 손을 내밀어서 그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에 ‘주여! 나는 이 사람하고 악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그렇게 하는데 그 마음속에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피를 흘리시고 매달려서 늘어져 계시면서 ‘나를 바라보라. 나를 욕하고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박대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짊어졌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이 사람 앞에서 마음에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느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그 은혜에 힘입어서 코리텐 붐 여사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사람이 코리텐 붐 여사의 손을 잡고서 “당신은 화란 사람 으로써 어떻게 전쟁동안에 그렇게 독일 사람에게 짓밟혔으면서 독일 사람을 용서하고 독일에 와서 복음을 증거 합니까? 나는 많은 죄악을 지은 사람입니다. 나는 독일에 흉악한 수용소 간수로 있으면서 많은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습니다. 옛 원수를 위해서 이처럼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해주는 당신의 사역에 감동 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독일 사람을 용서해 주신 것을 고맙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폭포와 같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 간수를 용서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간수와 마음에 막힌 담을 헐고 화해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독일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자 영혼 속에 한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넘쳐 흘렀 습니다. 코리텐 붐 여사는 그 길로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원한이 사라지고 그는 새로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다는 간증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본론>
1.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
여러분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인 것입니다. 갈보리 산 십자가에 재물이 되어서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창조주신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면 열두 영 더되는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욕하는 사람을 일시에 멸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힘없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 앞에는 로마 군인들이 창검을 번쩍이며 왔다 갔다 하고 대제사장들이 법복을 입고서도 그를 향하여 고함고함 치며 욕을 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교인들, 일반대중들이 조소와 모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매달리게 하신 그 모든 사람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그의 몸은 맥없이 척 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지만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우렁찬 메시지가 있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아들 예수를 통해서 너와 너를 용서하고 너와 화목하고 너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메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사53:5~6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에게 모든 인생의 죄를 다 짊어져 주시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힘없이 거기에 매달려 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활짝 내밀고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나와 이제는 화해하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에게 소망을 주기를 원한다.”는 놀라운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섰을 때 우리 가슴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와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화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후5:18~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조목조목 따져서 죄를 우리에게 돌렸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습니다. 또 설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돌리시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와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받은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만 용서위에 화목했다는 것은 이제 막힌 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도 열등의식과 좌절감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있고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누구에게도 열등의식과 좌절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런 막힌 담이 없습니다. 이것이 화목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하나님께 이렇게 설수가 없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하시고 일방적으로 화목의 손을 내미셔서 그 화목의 손을 붙잡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품어 주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셔서 일방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화목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했을 때 여러분 얼마나 담대함을 얻는지 압니까? 이제 하나님과 화목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라고 하나님께 안길수가 있어요.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기도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의 품에 머리를 기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도 아니요, 버림받은 자도 아니요, 외로운 자도 아닙니다. 이 막막한 우주에 지구촌에서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움 없이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혼을 손에 쥐고 계시는 그 하나님 자녀가 되어 그 하나님의 품에 기대어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남은 여생 사는 것은 우리는 화해의 사도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고후 5:20~21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 예수를 죄를 짊어진 정도가 아니라 죄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죄 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정도로 죄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로 심판을 받고 죄를 다 없애 버리고 예수 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의로우냐 하나님처럼 의롭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값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운 것처럼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며 의를 가지고 하나님 품에 안길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의의 메신저가 되고 화목의 메신저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도 온 세계에 대사관과 공사관이 있어서 우리나라를 대신한 대사와 공사가 있지 않습니까? 사신입니다. 우리도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사관에 대사로써 사신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으니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받으라고 외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직책과 직업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잠시 동안 세상에 살 동안에 우리가 가지는 직분과 직책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직분은 하나님의 사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신저인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웅변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죄를 다 용서하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여 우주의 왕과 함께 살길 원한다는 이 사실을 전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신의 역할을 하고 살게 될 때 우리 크리스천으로써의 우리의 사명과 의무를 다하고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용서와 화해가 없는 곳에는 형벌이 있다
둘째로, 우리가 용서와 화해가 없는 곳에서 살면 그곳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곳은 결국에는 금세도 형벌이 있고 내세에도 형벌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잖아요. 지금 베풀어 주는 용서와 화해를 받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따르잖아요. 그러나 먼 옛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형벌과 고통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악의 고통 속에 삽니다. 세속과 마귀의 고통 속에 삽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 살고, 저주와 가난의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공포와 절망의 고통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크고 적은 수많은 고통이 다가옵니다.
마18:23~34에 주님 말씀하기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갚으라. 그렇지 못하면 네 몸을 팔아라. 처를 팔아라. 자식을 팔아라. 그리고 갚으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너무나 간절히 간구하고는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어깨가 가벼워지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되어서 춤을 추며 나왔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여러분 백 데나리온은 아주 적은 액수의 돈인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교하면 백 데나리온은 60만분의 1밖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아주 가벼운 빚을 진자기의 친구를 만나자 마자 멱살을 잡고 “내 백 데나리온 갚으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에게 말미를 주시면 내가 갚겠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 자리에서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본 친구들이 임금님에게 가서 고했습니다. 임금님이 이 말을 듣자 굉장히 분노해서 “그 놈을 데려 오너라!” 끌고 오니까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굉장히 노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여서 고생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마시고 고생하도록 하라”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의 원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자 범죄도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일 같이 죄를 짓고 있지요. 매일매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추궁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름이 끼고 맙니다. 담이 생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면 용서받지를 못합니다.
마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만큼 우리 이웃을 용서해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용서를 얼마든지 받고 나는 이웃용서 안한다. 나는 우리 남편 용서 못해. 나는 우리 아내 용서 못해. 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용서 못해. 나는 이웃을 용서 못해. 그런다면 이런 이기주의가 이런 자기 중심 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용서받은 만큼 우리는 용서해야 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용서안하면 어떻게 될까요? 감옥에 갇히지요. “너는 용서받고 난 다음 왜 네 이웃은 용서 안하느냐? 너는 일만 달란트 용서받았는데 왜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는 감옥에 들어가라!” 오늘날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음에 고통의 쇠사슬에 묶이고 가정의 불화의 쇠사슬, 병, 생활고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107:10~11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약5:9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마음에 고통, 가정의 불화, 병, 생활고 올무에 걸리고 쇠사슬에 묶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는 자기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면서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옹고집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게 어떤 자매님 한분이 왔는데 그 자매님이 앞면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을 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고 침도 맞고 마사지를 해도 안 나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오산리금식기도원에 와서 금식기도도하고 나와도 안면신경통이 안 나았어요. 굉장히 고통 속에 제게 와서 “왜 하나님이 나는 고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고 그래서 자매님께 말했습니다. “혹시 자매님이 마음속에 원한에 사무치고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고 하니까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누구냐니까 시댁식구들이라고 그래요. 대가족에 맏며느리로써 들어갔는데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소처럼 부려먹고 자기는 온갖 힘을 다해도 모두들 모여서 자기를 욕하고 비평하고 원한에 사무쳤다. 나는 시댁식구들에게 원한에 사무쳤다. 그 시댁식구들과 동의하는 남편에게 대해서 너무나 원한에 사무쳐 어떤 때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안 됩니다.자매님! 시댁식구를 사랑해야 이 병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내 처지에 있으면 목사님도 똑같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내 처지 아니시니까 그런 말을 하지 내 처지에 있어 보십시오. 누가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병이 안 낫지요. “좋아요. 평생을 나는 안면마비로 있어도 시댁식구 사랑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주 망연자실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냐면 성경말씀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했지 사랑하라는 말은 안 적어 놓은 것을 보십시오. 사랑은 후에 해야지 당장 급한 것은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 사랑은 여력이 있으면 사랑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사랑할 힘이 없으니까 용서는 할 수 있잖아요. 용서를 하고 사랑은 나중에 여력이 있으면 하면 됩니다. 용서부터 하시지요. 용서는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한참 있더니만 “자꾸 목사님이 용서하라고 하면 하겠지요. 그러나 사랑은 못합니다.” “그러면 용서라도 합시다.” 그리고 그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가집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하나 원치 않는 마음이지만 그러나 용서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안면신경통이 그 이후로 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용서가 오자 병의 쇠사슬이 풀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용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 아닙니다. 용서 안하면 여러분과 제가 쇠사슬에 묶입니다. 흑암에 쇠사슬에 묶여요. 질병, 가난, 고통, 낭패, 실망, 불행 이러한 쇠사슬에 우리가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받은 이상은 우리는 이웃을 용서해야 될 의무와 책임이 있고 이것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가 고통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3. 용서하고 화해하라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용서하고 화해하겠다고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얼마나 용서에 빚진 자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을 갚기 전에는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빚을 갚는 것을 무슨 자선을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사이는요 여러분 돈 빌려 주고 돈 갚으라고 하면 나중에 자기돈 갚는 것처럼 어깨에 크게 힘주고 돈 빚쟁이에게 빚 받을 때 무슨 자선 받는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실제 여러분, 용서는 자선이 아닙니다. 용서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만큼 갚아야 될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을 자선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내가 용서받은 만큼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3: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용서한 것처럼 너도 그와 똑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자이면 그와 똑같이 너도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용서해야 될 의무와 책임이 있고 용서라는 것 그 자체가 내가 훌륭해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미움과 분노를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했는데 하나님 명령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하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고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치명적인 결과가 다가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약1:20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는데 자꾸 성을 내면 하나님이 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과 담을 쌓으면 하나님도 우리와 담을 쌓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허물려면 이웃과의 담을 허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담을 허물어야 돼요. 부모와 자식 간에 담을 허물어야 돼요. 우리 성도 이웃 간에 마음에 담이 있으면 허물어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허물어집니다. 우리의 담은 딱 쳐놓고 난 다음 “하나님이여 내게 기도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 말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담이 있다. 그러므로 너의 담을 헐기 전에는 나의 담도 헐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도생활에 미움과 분노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롬12:10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 됩니다. “내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위도 높은데 지가 먼저 나한테 용서해 달라고 해야지 내가 뭘 용서 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내게 와서 회개 할 때는 개인적으로 용서하지요. 그리고 화해하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회개하지 않고 지금까지 나를 적대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용서해줘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화해해 버리고 손을 털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은 그 사람 편에 던져 있습니다. 자기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내게 와서 회개하면 나는 또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용서하고 화해해 버리고 나는 무장해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담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롬13:8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마5:44~45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관대하신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을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 어마어마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 다음 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고 분노를 가지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이렇게 손해나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일평생을 살면서 아무리 지위와 명예가 있고 부귀와 영화가 있어도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없으면 헛살았어요.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부간에 싸우고 부모 자식 간에 으르렁거리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살면 그 좋은 환경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가삼간에 살아도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그게 정말 진짜 사는 거 에요. 오늘 물질만능주의가 되어서 사람들은 물질만 많으면 행복할 줄 알고 물고 찢고 싸우고 물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지혜와 권세를 강제로 불의 부정하게도 얻으려고 하는데 그래놓고 난 다음 그 마음은 황무지가 되어 있는 거에요. 황폐하게 돼요.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 땅에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갑니다. 영원히 살지 못해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가는 이 잠시 주어진 삶속에 행복을 갖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살았다면 헛살았지 않습니까?
잠22:24~25절에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이것 보세요. 노를 품거나 울분하면 그것이 올무에 빠지는데 너는 그런 친구를 사귀지 말아라. 너도 함께 그 올무에 빠질까 두려워하라. 여러분 무슨 올무입니까? 우리 영혼을 불안과 슬픔과 불행의 올무에 빠뜨리는 것이 마음에 울분과 미워하고 분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요일2:11에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놀라운 말입니다. 여러분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어두움은 빛을 없애 버리기 때문에 안보여요. 그건 무슨 말이냐. 미워하면 마음속에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다 빼앗아가 버리고 어리석게 짝이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빛 가운데 있게 됩니다. 빛은 뭡니까? 지혜요, 총명이요, 모략이요, 재능이요, 지식인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으면 이런 것 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합니다. 지혜가 임하고 지식이 임하고 모략이 임하고 재능이 임하고 지식이 임하여 그가 모든 판단을 올바르게 하며 올바른 이해력을 가지고서 살아가므로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가지면 어두움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지혜도 없고 총명도 없고 모략도 없고 재능도 없고 지식도 없고 깜깜한 가운데 방황하기 때문에 그는 멸망합니다. 여러분 나라와 나라사이도 그렇습니다. 요사이 미국과 북한이 서로 아주 말을 주고 받는데 누가 이기느냐 보면요 온유한 편이 이기고 분노하는 편이 집니다. 가만히 두고 보세요. 성경말씀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해도 부드럽게 하고 공손하게 하고 온유한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지혜를 잃지 않습니다. 총명을 잃지 않아요. 모략을 잃지 않아요. 재능을 잃지 않아요. 그러나 막말하고 협박하고 공갈하고 미워하면 분노 중에 있는 사람은 어두운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 없이 행합니다. 모략 없이 행해요. 총명 없이 행해요. 자꾸 자기가 망할 길로 걸어가고 자기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과 미워한다는 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윤리와 도덕적인 일이지 우리 삶과 상관이 없다. 안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남보다 훨씬 발전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아둔하게 되어서 언제나 올무에 걸리고 자기의 무덤을 파게 되는 것입니다.
롬12:19에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같은 것 네가 갚으려고 하지 마라. 내가 갚는다.” “아이, 하나님이 갚으면 빨리 안 갚고 너무 늦게 갚기 때문에 답답해서 못 견딥니다.” 그렇잖아요. 빨리빨리. 더구나 우리 한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빨리빨리, 빨리빨리. 밥도 빨리빨리 먹고, 옷도 빨리빨리 입고, 일도 빨리빨리 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느긋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긋하시지만 일을 행하시면 확실히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천천히 돌아가는 맷돌 같지만 거기에 나오는 콩가루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나옵니다. 묵사발이 되어서 나와요. 하나님 손에 걸리면 천천히 심판을 받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내게 맡기라. 너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빛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가지면 육체에 건강을 빼앗습니다. 오늘 의사들은 말하기를 억울한 감정이나 분노가 싸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어서 협심증, 심근경색, 중풍, 소화 장애, 두통, 불면증 이러한 병들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몸에는 자율신경계통은 우리가 컨트롤하지 못하잖아요. 우리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를 가지면 이 자율신경계통 우리가 컨트롤 못하는 위장이나 심장이나 폐나 간장이나 할 것 없이 여기에 파괴적인 호르몬이 생산되어서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면역성이 떨어져서 어떤 병이 오더라도 쉽게 병 걸리고 오래 못살아요. 여러분 산을 다니는 저 호랑이나 사자를 보십시오. 으앙! 눈을 번쩍번쩍 하면서 으앙! 언제나 분노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은 이 세상에 20년도 못살아요. 그러나 저 자라 보십시오. 물속에서 말 한마디 안하고 가만히 하루 종일 있습니다. 얼마나 사냐. 천년을 사는 것입니다. 분노와 긴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파괴적인 영향력을 몸에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 40대 급사하는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입니다. 미워하고 분노하고 긴장하고 하는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 몸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하고 느긋하게 살아야 돼요. 요사이 교통 슬로건 보니까 ‘5분 빨리 가다가 영원히 빨리 간다’ 5분 빨리 가려다가 영원히 빨리 가지 마세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도 느긋하게 살면 명대로 살지만 느긋하게 못살면 빨리 가버려요. 남 열 숟가락 먹을 때 한 숟가락 먹을 때 편안하게 사는 것이 좋다구요.
잠10:11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 이니라”
성 안내는 사람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보가 성을 잘 내지 나는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바보였어요. 왜, 우리 집사람하고 싸울 때 내가 먼저 화를 냈으니까. 항상 화를 내고 늘 비는 것은 내가 먼저 빌어야 돼요. 참으로 화낼 때는 간단히 쉬운데 빌 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평생을 늘 내가 빌다가 볼일 다 봤어요. 내가 먼저 화를 냈으니까. 그러니 슬기롭지 못하지요. 요사이는 지혜가 있어서 내가 성을 안 낸다구요. 그러니까 안 빌지. 자존심도 안 상하고. 노하는 사람은 슬기가 없는 사람이에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 여러분 허물을 사하면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내게 잘못한 사람 내가 용서해 주고 허물을 사해주고 허물을 덮어주면 내게 영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우리를 값지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엡4:25~27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 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사람인 이상 분을 안 낼 수는 없지요. 분이 나지요. 그러나 분을 하루 그날에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낼 분을 내일도 모레도 계속 가지고 가지 말아라. 오늘 대게 여성들은 한번 분을 내면 평생에 가슴이 숨겨 놓았다가 싸움 할 때마다 다 끄집어내요. 내가 젊어 시집올 때 그때 네가 나를 얼마나 고생한지 아느냐? 시집 올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야기 다 내놓는 것입니다. 한번 분을 내었으면 그날로써 청산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는 꺼내놓지 말아야 돼요. 마귀가 청산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가지고 두고두고 파괴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에 분을 내어도 하루가 지나면 해가 지기 전에 청산해 버려야 돼요.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는 화가 나고 분이 나더라도 용서하고 청산해 버리고 잠자리에 들어갈 때는 평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또 용서했으면 그 다음 화해해야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용서만 하고 내버려두는 것 아닙니다. 화해하자. 품에 품었지요.
나는 어느 자매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아들과 남편이 싸움이 붙어서 남편이 아들보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난 네 꼬락서니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 아들이 좋다고 보따리 싸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가 마음에 얼마나 괴로운지요. 그래서 남편을 보고 기도하고 부탁하고 남편의 마음을 끊임없이 마사지를 해가지고서 그 남편 마음이 유하게 되어서 용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친구 집에 가있는 아들을 불러서 2층 자기 방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밥을 가족들과 같이 먹는데 옛날에는 다같이 먹었는데 아버지가 하는 말이 “용서는 했지만 밥은 너하고 같이 먹지 않는다. 아침에 밥상에 데리고 내려만 오면 나는 밥 안먹고 나간다.” 그래서 “아이고 왜 그러느냐?”고 그래서 아들을 내려오라고 해서 아들이 내려오니까 밥 먹다가 숟가락 놓고 나가 버립니다. 용서는 했는데 화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이 또 계속해서 남편 마음을 마사지했습니다. “기왕 용서해서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2층에 저렇게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얼굴을 안보면 어떻게 하느냐? 용서했으면 품에 품어야 되지 않겠느냐?” 자꾸 중재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아들이 밥 먹으러 내려오는데 아버지가 일어나서 아들 손을 잡고 끌어 안더니만 “이제 너하고 화해한다. 네 과거를 용서할 뿐 아니라 너는 나와 화해한다. 이제는 밥같이 먹고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자.” 그래서 그 부인이 너무나 너무나 즐거워서 그 간증을 내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용서와 화해의 다른 점인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싸우고 난 다음에 부인이 “나 당신 용서해요.” 그러나 뾰루퉁. 그러면 화해가 안 되었어요. 화해가 안돼. 용서해 주었으면 그만 여보하고 끌어안아야지요. 그 처음 행동이 어렵지 한번만 하면 그 다음 모든 것이 풀린다구요. 용서했으면 반드시 화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를 짓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잘못 했을 때마다 그것을 빨리빨리 풀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 자존심을 꺾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은 얼마나 큽니까? 그 크신 하나님께서 발가벗고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완전히 던져 버리고라도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존심을 버리시는데 우리의 자존심 개딱 가리만한 자존심 가지고서 뭘 큰소리 합니까? 여러분이 자존심이 크면 하나님보다 클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매달리셨는데 그를 쳐다보면 우리의 자존심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존심 십자가에 버리고 다른데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남편과 화목하고 아내와 화목하십시오. 부모님과 화목하고 자식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십시오.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도 않고 하나님께 돌아서 있는데 일방적으로 아들을 보내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하나님이 청구했습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러므로 하나님 닮아서 부부간에 싸우더라도 내가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해야 돼요. 나는 상대가 용서해 달라고 화해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 아닙니다. 그는 마귀를 닮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로 셀프 이미지가 파괴되는 것 아닙니다. 자존심 짓밟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니 얼마나 고상한 일이고 자존심이 높은 일이고 칭찬할 만한 일인지 몰라요. 하나님이 박수를 쳐주시는데 하나님 박수 받았으면 됐지 세상 박수 받아서 뭘 하겠습니까?
요일4:19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따라 말씀하세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 먼저 우리 사랑했어요. 여러분 하나님 사랑한 것 아닙니다. 날 먼저 사랑해 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 사랑할 때 이웃이 사랑하면 하겠다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 왜, 하나님 닮아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 5:24에 보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오늘 여러분 우리는 재단에 예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싸움하고 뽀루퉁 해서 와서 예물 드렸으면 하나님 그 예물 안 받아요. 이웃 간에 서로 원한 져서 화목하지 않고 오면 예물 안 받아요. 하나님 말하기를 먼저 용서와 화해를 하고 그 다음 예물 드리면 내가 받겠다. 그만큼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내용이 용서와 화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새벽기도하고 철야하고 금식기도하고 기독교 의식을 다 행한다해도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내용이 없는 빈 껍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컨텐츠가 있어야 돼요. 내용이 있어야 돼요. 내용 없는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우리의 내용은 용서와 화해인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 없는 기독교 대결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언제나 바라보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가지고 심판하려면 순식간에 할 수 있는 그분이 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저렇게 매달려 있어요. 저렇게 무력하게 저렇게 힘없이 비참하게 발가벗고 매달려서 있어요. 그것은 용서와 화해가 하나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고 귀하게 느끼는 것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를 구주로 모셨으면 우리는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의 사도가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몸이 병이 들면 치료를 해야만 합니다. 마음의 병인 미움도 분노도 반드시 치료해야 합니다. 그 치료의 길은 용서와 화해뿐입니다. 용서를 갚음으로 치료받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만이 치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도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창조적인 근본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갈보리 산 십자가에 매달려 재물이 되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길밖에는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어느 철학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은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이 매달린 것 보십시오. 이런 이런 역사상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근본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하나님 거기에서 반역하는 우리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먼저 청하고 손을 내민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내용이요, 우리가 그를 따라가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이 인정하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막11:25의 말씀 한번 여러분께서 따라 읽으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입술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기독교의 내용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만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내용은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근본내용은 용서와 화해인 것입니다. 아버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내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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