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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3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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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제목: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본문: 마가복음 15:33-41, 16:1-8
설교: 김기동 자매 (새길교회 2007.7.8주일설교)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의 삶을 담고 있는 4복음서를 보면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서는 각각 다른 소리를 해도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는 그 살인의 주체가 누구이든간에 여하튼 십자가에서 죽었고, 장사되어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빈 무덤에 대한 구구한 추측이 그 당시 난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훔쳐가고는 딴 소리를 한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기자는 이것 또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병사들을 매수해서 퍼트린 잘못된 소문이라고 덧붙이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고 어느 것이 신앙적 해석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암시하듯이 빈 무덤이 곧 부활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세마포에 싸였던 그 모습으로 예수는 부활하였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는 유령과 같이 벽을 뚫고 가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부활한 몸은 무엇인가 다른가 아니면 부활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이렇게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그 몸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회의론에 이르기까지 부활 사건은 사실 신앙고백은 차치하고 그 현실성과 관련하여서는 논외로 놓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저로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굳건한 신앙의 기반이 되었던 바로 그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구체적 질문과 함께 또 하나는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공관복음서 예수 이야기 구조의 근간을 제공합니다. 사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이와 같은 완결된 예수傳을 남겨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다시 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예수를 회상하고 나누면서 곧 오실 예수를 만날 설레임만 가지고 있었으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지 않았고 예수를 만난 자, 예수를 직접 경험한 자들이 하나 둘 늙고 죽어갑니다. 예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또한 예수 이야기는 구전되는 가운데 왜곡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짜 예수가 말한 것인지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예수는 형태만 인간이었을 뿐 실로 영적인 존재였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그 당시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전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해져 갔던 것 같습니다. 파편적이나마 그의 말, 그의 삶에 대한 기억들이 기록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 기록의 진정성에 대한 주장들 또한 다양했을 거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누가복음 기자도 그 서론에서 자신의 기록이야말로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역사상 첫 기록이라기보다는 기준의 잣대를 통과한 ‘정경’으로 인정된 가장 오래된 사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마가복음보다 더 먼저 기록된 그 어떤 예수傳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복음보다도 그 우선성이랄까,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명확한 신념을 가지고 마가복음기자는 예수 이야기를 써 내려 갑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끝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있는 9-20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마가복음을 담고 있는 사본들을 보면 권위있는 보다 오래된 사본들에서 마가복음은 8절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본은 9절까지, 또 어떤 사본은 20절까지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아마도 마가복음은 원래는 8절에서 끝나도록 기록되었는데 무슨 다른 이유로 20절까지의 내용이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9절 이하는 부활의 예수와의 만남, 선교 사명의 전수 등의 내용으로 진실로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부활을 확증하는 중요한 전거가 되는 것들입니다. 8절에서 끝나는 것이 무엇인가 적절치도 충분치도 않다고 판단되기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은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일반적인 ‘신앙'의 눈으로 보면 기실 그러한 부가적 끝맺음은 필연적인 것이었겠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마가복음은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 놓았길래 그럴까요? 저와 함께 본문이 그리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재판을 거처 예수는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진 채 시내를 통과하여야 했고(물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져 주기는 합니다만) 사람들의 온갖 모욕의 소리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골고다라는 곳에서 옷이 벗겨지고 두 강도와 함께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면 내려와 보라는 종교지도자들의 조롱, 함께 매달린 처지에 있는 강도들의 욕, 그렇게 예수는 6시간을 매달려 죽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지 3시간이 지난 정오쯤 하늘은 어두워졌고 그렇게 또 3시간이 흘렀다고 합니다. 한낮에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자연현상은 아닙니다. 시커먼 비구름이 해를 가리는 경험을 우리 또한 종종 하곤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자연적 현상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역사가들은 종종 유명한 랍비가 죽었을 때, 시저가 죽었을 때 그 때 하늘이 어두워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면서 그 어두움을 애통의 상징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아모스에 보면(8:9) 대낮에 해가 지고 한 낮에 땅을 캄캄케 하는 그 날은 곧 야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지경만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우주적 사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것은 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는 다분히 목적을 가진 해석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다른 경우들보다 훨씬 빠르게 6시간 만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44절에 보면 빌라도가 백부장보고 진짜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피를 쏟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예수는 그의 생애 마지막 말을 토해 냅니다. ‘엘로이 엘로이 래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마지막 말과 함께 큰 소리를 지르고 죽었습니다. 38절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실 그 장면과는 상관없습니다. 앞에서의 어두움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려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두움, 휘장의 갈라짐은 그 시간의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아마도 십자가 신앙을 고수하던 기독교인들의 해석의 상징이었을 것이라는 거지요.
예수의 죽음은 여러 사람에 의해 목격되었습니다. 모욕하던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이 거기에 있었겠지요. 그리고 처형을 주관하던 로마군인들(백부장을 포함하여),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자들 중에서는 여인들만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그들 중 백부장이 한 말이라는 것이 전해집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왜 나를 버리느냐고 탄식하며 죽고 백부장은 그걸 보고 그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관관계가 이해되십니까? 확고한 신념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였고, 잡히시던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그 무수한 조롱을 묵묵히 감내하던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보면 무력하게 무너져 버린 듯한 철저한 절망의 탄식을 토로합니다. 게다가 이방인 백부장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는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니요. 차라리 누가복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되겠습니다. ‘이는 의로운 사람이었구나.’ 뚜렷한 죄목 없이 처형당하면서도 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죄를 뒤집어씌운 자들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죄없는 사람이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니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상은 절대적 권위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 능력을 넘어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담지하는 표상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무기력하고 처절하게 죽는 식민지 유대의 한 젊은이를 보고 어떻게 이방인 백부장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학자들은 마가복음기자가 백부장의 입을 빌어 마가복음의 핵심적 해석을 확증하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마가복음 시작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마치 하나의 호를 그리듯이 결정적으로 이방인에 의한 고백으로 그 하나님의 아들됨이 확증된다는 것이지요. 곧 백부장의 고백은 사건성이 없이 고백의 원형으로 주어졌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사건 장면 자체에서의 이 고백의 위치는 단순히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제하는 고백의 원형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흘 뒤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고,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입구를 막았던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지요.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흰 옷을 입은 어떤 젊은이를 만나서 십자가에 달렸던 그 나사렛 예수는 살아났다고, 그러니 갈릴리로 가서 그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벌벌 떨며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런 이유는 넋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건 무엇인가 미진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 복음서를 본 기독교인들은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기쁨과 확신을 주어도 모자란 판에 도망하고 벌벌 떨고 무서워서 말도 못하는 지경이라니요. 그렇기에 아마도 9절 이하의 내용들이 재편집되었을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그 주인공들의 행동은 사실 상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빗겨나갑니다. 예수는 철저한 절망 가운데 탄식의 부르짖음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였고, 부활의 소식 앞에서 그 첫 소식의 수혜자 여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말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이방인 백부장은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고백을 내뱉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출발점의 현장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영광과 확신 그리고 기쁨의 소리가 아니라, 절망과 탄식의 소리와 두려움에 떨며 말 못하는 비겁함 그리고 그 중간에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의 소리입니다. 신앙의 기준으로도, 합리성의 기준으로도 이러한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 마가복음 기자는 이렇게 이해할 수 없이 그 장면들을 그려놓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들은 다른 복음서에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개작됩니다.
사실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보다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보다 질서정연하게 서술된 것은 실제라기보다는 해석되고 설정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사실상 그렇게 명확하게 설명되고 짜맞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의 파편적이고 서로 연결이 맞지 않는 이야기들의 서술은 어쩌면 역사적 실제와 들어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에서 철저한 절망의 탄식,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탄식해서는 안 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와 그 여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와 그 여인들은 신앙이 없어서였을까요? 혹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함의하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은 확신과 신뢰, 긍정적 태도의 이면에서 또한 그 당혹스러운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또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시작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찬양문체를 띈 이 고백이야말로 절망과 당혹의 순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성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백부장이 그렇게 고백할 여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백부장으로 가장한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장치가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고백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예수의 탄식, 여인들의 태도, 그리고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저는 오늘 제가 잊고 있던 신앙의 또 다른 출발점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그대로 드러내는데서 출발합니다. 절망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됩니다. 길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혹해 하는 자에게 진리의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믿음 없음을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입술의 고백을 선물하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옳고 그름, 이해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떠나 오늘 진실로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구원자, 나의 그리스도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본문: 마가복음 15:33-41, 16:1-8
설교: 김기동 자매 (새길교회 2007.7.8주일설교)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의 삶을 담고 있는 4복음서를 보면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서는 각각 다른 소리를 해도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는 그 살인의 주체가 누구이든간에 여하튼 십자가에서 죽었고, 장사되어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빈 무덤에 대한 구구한 추측이 그 당시 난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훔쳐가고는 딴 소리를 한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기자는 이것 또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병사들을 매수해서 퍼트린 잘못된 소문이라고 덧붙이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고 어느 것이 신앙적 해석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암시하듯이 빈 무덤이 곧 부활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세마포에 싸였던 그 모습으로 예수는 부활하였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는 유령과 같이 벽을 뚫고 가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부활한 몸은 무엇인가 다른가 아니면 부활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이렇게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그 몸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회의론에 이르기까지 부활 사건은 사실 신앙고백은 차치하고 그 현실성과 관련하여서는 논외로 놓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저로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굳건한 신앙의 기반이 되었던 바로 그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구체적 질문과 함께 또 하나는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공관복음서 예수 이야기 구조의 근간을 제공합니다. 사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이와 같은 완결된 예수傳을 남겨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다시 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예수를 회상하고 나누면서 곧 오실 예수를 만날 설레임만 가지고 있었으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지 않았고 예수를 만난 자, 예수를 직접 경험한 자들이 하나 둘 늙고 죽어갑니다. 예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또한 예수 이야기는 구전되는 가운데 왜곡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짜 예수가 말한 것인지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예수는 형태만 인간이었을 뿐 실로 영적인 존재였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그 당시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전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해져 갔던 것 같습니다. 파편적이나마 그의 말, 그의 삶에 대한 기억들이 기록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 기록의 진정성에 대한 주장들 또한 다양했을 거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누가복음 기자도 그 서론에서 자신의 기록이야말로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역사상 첫 기록이라기보다는 기준의 잣대를 통과한 ‘정경’으로 인정된 가장 오래된 사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마가복음보다 더 먼저 기록된 그 어떤 예수傳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복음보다도 그 우선성이랄까,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명확한 신념을 가지고 마가복음기자는 예수 이야기를 써 내려 갑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끝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있는 9-20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마가복음을 담고 있는 사본들을 보면 권위있는 보다 오래된 사본들에서 마가복음은 8절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본은 9절까지, 또 어떤 사본은 20절까지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아마도 마가복음은 원래는 8절에서 끝나도록 기록되었는데 무슨 다른 이유로 20절까지의 내용이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9절 이하는 부활의 예수와의 만남, 선교 사명의 전수 등의 내용으로 진실로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부활을 확증하는 중요한 전거가 되는 것들입니다. 8절에서 끝나는 것이 무엇인가 적절치도 충분치도 않다고 판단되기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은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일반적인 ‘신앙'의 눈으로 보면 기실 그러한 부가적 끝맺음은 필연적인 것이었겠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마가복음은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 놓았길래 그럴까요? 저와 함께 본문이 그리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재판을 거처 예수는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진 채 시내를 통과하여야 했고(물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져 주기는 합니다만) 사람들의 온갖 모욕의 소리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골고다라는 곳에서 옷이 벗겨지고 두 강도와 함께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면 내려와 보라는 종교지도자들의 조롱, 함께 매달린 처지에 있는 강도들의 욕, 그렇게 예수는 6시간을 매달려 죽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지 3시간이 지난 정오쯤 하늘은 어두워졌고 그렇게 또 3시간이 흘렀다고 합니다. 한낮에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자연현상은 아닙니다. 시커먼 비구름이 해를 가리는 경험을 우리 또한 종종 하곤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자연적 현상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역사가들은 종종 유명한 랍비가 죽었을 때, 시저가 죽었을 때 그 때 하늘이 어두워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면서 그 어두움을 애통의 상징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아모스에 보면(8:9) 대낮에 해가 지고 한 낮에 땅을 캄캄케 하는 그 날은 곧 야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지경만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우주적 사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것은 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는 다분히 목적을 가진 해석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다른 경우들보다 훨씬 빠르게 6시간 만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44절에 보면 빌라도가 백부장보고 진짜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피를 쏟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예수는 그의 생애 마지막 말을 토해 냅니다. ‘엘로이 엘로이 래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마지막 말과 함께 큰 소리를 지르고 죽었습니다. 38절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실 그 장면과는 상관없습니다. 앞에서의 어두움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려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두움, 휘장의 갈라짐은 그 시간의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아마도 십자가 신앙을 고수하던 기독교인들의 해석의 상징이었을 것이라는 거지요.
예수의 죽음은 여러 사람에 의해 목격되었습니다. 모욕하던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이 거기에 있었겠지요. 그리고 처형을 주관하던 로마군인들(백부장을 포함하여),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자들 중에서는 여인들만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그들 중 백부장이 한 말이라는 것이 전해집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왜 나를 버리느냐고 탄식하며 죽고 백부장은 그걸 보고 그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관관계가 이해되십니까? 확고한 신념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였고, 잡히시던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그 무수한 조롱을 묵묵히 감내하던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보면 무력하게 무너져 버린 듯한 철저한 절망의 탄식을 토로합니다. 게다가 이방인 백부장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는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니요. 차라리 누가복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되겠습니다. ‘이는 의로운 사람이었구나.’ 뚜렷한 죄목 없이 처형당하면서도 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죄를 뒤집어씌운 자들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죄없는 사람이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니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상은 절대적 권위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 능력을 넘어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담지하는 표상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무기력하고 처절하게 죽는 식민지 유대의 한 젊은이를 보고 어떻게 이방인 백부장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학자들은 마가복음기자가 백부장의 입을 빌어 마가복음의 핵심적 해석을 확증하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마가복음 시작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마치 하나의 호를 그리듯이 결정적으로 이방인에 의한 고백으로 그 하나님의 아들됨이 확증된다는 것이지요. 곧 백부장의 고백은 사건성이 없이 고백의 원형으로 주어졌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사건 장면 자체에서의 이 고백의 위치는 단순히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제하는 고백의 원형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흘 뒤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고,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입구를 막았던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지요.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흰 옷을 입은 어떤 젊은이를 만나서 십자가에 달렸던 그 나사렛 예수는 살아났다고, 그러니 갈릴리로 가서 그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벌벌 떨며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런 이유는 넋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건 무엇인가 미진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 복음서를 본 기독교인들은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기쁨과 확신을 주어도 모자란 판에 도망하고 벌벌 떨고 무서워서 말도 못하는 지경이라니요. 그렇기에 아마도 9절 이하의 내용들이 재편집되었을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그 주인공들의 행동은 사실 상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빗겨나갑니다. 예수는 철저한 절망 가운데 탄식의 부르짖음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였고, 부활의 소식 앞에서 그 첫 소식의 수혜자 여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말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이방인 백부장은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고백을 내뱉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출발점의 현장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영광과 확신 그리고 기쁨의 소리가 아니라, 절망과 탄식의 소리와 두려움에 떨며 말 못하는 비겁함 그리고 그 중간에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의 소리입니다. 신앙의 기준으로도, 합리성의 기준으로도 이러한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 마가복음 기자는 이렇게 이해할 수 없이 그 장면들을 그려놓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들은 다른 복음서에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개작됩니다.
사실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보다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보다 질서정연하게 서술된 것은 실제라기보다는 해석되고 설정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사실상 그렇게 명확하게 설명되고 짜맞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의 파편적이고 서로 연결이 맞지 않는 이야기들의 서술은 어쩌면 역사적 실제와 들어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에서 철저한 절망의 탄식,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탄식해서는 안 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와 그 여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와 그 여인들은 신앙이 없어서였을까요? 혹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함의하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은 확신과 신뢰, 긍정적 태도의 이면에서 또한 그 당혹스러운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또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시작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찬양문체를 띈 이 고백이야말로 절망과 당혹의 순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성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백부장이 그렇게 고백할 여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백부장으로 가장한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장치가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고백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예수의 탄식, 여인들의 태도, 그리고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저는 오늘 제가 잊고 있던 신앙의 또 다른 출발점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그대로 드러내는데서 출발합니다. 절망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됩니다. 길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혹해 하는 자에게 진리의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믿음 없음을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입술의 고백을 선물하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옳고 그름, 이해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떠나 오늘 진실로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구원자, 나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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