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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6:1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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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장호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나의 바위, 내 구원자이신, 주님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예수님은 지상선교에서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인간을 치유하시는 자비의 많은 행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 기자들은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도 30퍼센트나 기록한 것은 치유를 예수님의 중요한 과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것이 현재 살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명상하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부름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금욕적인 경건한 삶을 살면서 하늘나라의 도래에 채비하여 그의 동포들에게 “회개하라”고 간절히 외치던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 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병들고 고통 당하는 사람의 치유자이시며 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 것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 첫 부분(17~19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선교를 아주 정확하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에게 설교하였습니다. 특별히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다가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 마을의 회당 예배에서 행하신 그분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사명을 마음이 찍힌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며 억눌리고 묶인 사람을 해방하는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 설교 끝에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열기 시작하였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소식은 유다 땅과 그 근방까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설교에서 이제까지 아무에게서도 보거나 듣지 못한, 또 만질 수 없었던 것을 만지는 것과 같은 하늘나라의 신비한 맛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마음이 찍힌 사람들을 낫게 하시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깨끗이 고치는 여러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치유의 행적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전혀 체험하지 못한 위로와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치유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 기사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의 동기와 그 능력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이 벌서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나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가 안 되였다.”[마태 15:32a]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배고픔보다 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병 환우와의 만남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의 손을 나병 환우에 대시고 낫도록 하신다.”고 마가는 기록 합니다.(1:40) 예수님의 애가 녹는 “측은한 마음”은 나병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잊으시게 하고 종교적, 문화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이를 치유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를 떠나 방자한 삶음을 살다가 세상이 주는 재원과 안전까지 다 잃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맞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누가15:20 참조]. 하느님 아버지는 어떠한 잘못을 범할지라도 용서하시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또 나인 지방에서 죽은 외아들의 상여에 울고 따라 가는 과부인 그의 어머니의 울음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애가 녹는 듯한 “측은한 마음”으로 “울지 말라” 위로하시며 “젊은이여 일어나라” 명령하여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누가 7:13~14].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그와 이별하는 가족들의 울음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가까운 애 녹는 마음을 복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의 장지에서 모두들 울며 애통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 자신도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랐으며” 그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1:35~38]. 공동번역의 “눈물을 흘렸다”는 번역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는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그의 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하시는 비통한 마음에 잠기신 예수님의 심정에 적절치 않은 번역인 것 같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he wept”라고 짧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울음은 주위 사람과 같이 슬픔에 차서 큰소리로 통곡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 기적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애끊은 외침 또는 그 고통을 제거하여줄 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마음과 주님의 자비하신 마음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헤매는 사람의 처참한 신음 소리를 가슴 깊이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소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으로 아파하고 시달리는 사람과 함께 나누려는 그분의 움직임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참여 과정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기적의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치유의 행적의 원천은 예수님의 가슴 깊이에서 나오는 연민의 정, compassion입니다. 영어 표현 compassion은 우리가 흔히 쓰는 동정과 상통하고 있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가련하다 또는 불쌍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말들은 자기를 낮추면서도 생색내거나, 상호간의 일치감을 결여하거나, 상대를 열등하게 여기거나 또는 상대를 도와주는 대상으로 여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박애정신이나 동정심에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자선행위가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결과도 흔히 일어납니다. 이런 자선행위는 연민과 자비에서 나오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며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힘을 실어 주지 못하고 의존성을 조장합니다.
연민(compassion)은 구약에서의 hesed와 같은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 성경에서도 문맥에 따라 여러 말로 번역된 아주 어려운 용어입니다. 미국의 구약신학자 Bernard Anderson은 선지자의 전통에서 이해되는 hesed는 항구적이고 진실된 사랑, 충성스러운 절의, 외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 때문에 변함없이 사랑하는 어버이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 용어는 어떤 인격적인 품성이나 미덕이 아니라 실천이 있어야 하는 명사이며 추상적이지 않은 용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은덕을 입은 행위도 hesed를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야훼 하느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며 또 동시에 의로우신 하느님은 성스럽고 올바른 분입니다. 자비하심과 의로우심은 하느님의 속성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미가는 야훼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과 자비인 hesed를 행하는 것과 정의인 mispat를 행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미가 6:8]. “불의는 연민의 가장 원천적인 적이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명제입니다.” 한 유대교의 랍비는 hesed를 행하는 자체가 부자나 사회의 특권층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민인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며 또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야훼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내시지 않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 34:6]. 야훼께서 자칭하신 것을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에 매정하고 쌀쌀한 무감각한 초월적인 또는 추상적인 창조주는 아닙니다. 랍비인 Hershel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 인간사에 관심이 많으시고 아주 자비하셔 그분이 친히 창조하신 것에서 절대로 멀리 떠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늘 돌보시면서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라고 설파합니다. 사람이 고통당하면 꼭 하느님도 고통당하신다는 사실을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와 집 없는 나그네에게 베푼 너그럽고 큰 사랑에서 나타내 보이시고 있습니다(신명 30:3). 곧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의 고통을 나누려는 사랑의 행적에서 이해됩니다.
Toronto 근처의 라루슈 공동체인 Daybreak에서 살다가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난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인 Henry Nouwen은 저서인『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까지도 돌보아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탈무드의 이야기에서 메시아는 자기 자신의 상처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거나 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도와 달라고 청하여도 별도 준비 없이 곧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건강과 죽음과 고통에서 해방의 길을 열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메시아는 부서진 그의 몸을 하느님께 완전히 바쳐서 우리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몸이 부서지는 상처는 우리를 치유 하시는 가장 주요한 자원이 된 것임을 Nouwen은 주장합니다. 또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의 원천이 오로지 자비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육화한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이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투성인 우리 이웃 안에서, 말기 환우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또 말없이 이런 이웃을 돌보는 사역자들 안에서 우리는 항상 만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6장 20절부터 26절은 예수님의 아주 중요한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치유자이시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 하신 설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지금 우는 사람들아, 사람의 아들 때문에 핍박 받는 사람들아, 너희들은 행복하다” 치유와 해방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이 설교에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과 슬픔에서 또는 사회적 추방과 배척 가운데 외치며 우는 소리가 하느님께 들려오는 사람이 되라고 분부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불안전하고, 넉넉하지 않고, 취약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홀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처지에서 하느님만을 특별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현대의 가난한 사람은 언제 직장에서 해고당할지 모를 위협을 받고 있거나, 실직하여 어디에서나 일 할 곳이 보이지 않거나, 하루 끼니가 어디에서 올지 모르거나, 거주할만한 집을 얻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거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노인들, 불치와 난치의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우리 주위의 노숙자 등등. 이런 여러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지금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이며 하늘나라가 저희들 것이며 이런 가난한 삶의 욕구는 하늘나라에서 장차 채워질 것이며 하늘의 위로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들은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아주 중요한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십일 세기의 이 세상이 추구하는 삶 또는 가치와는 아주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삶과 가치를 제시하고 계신다고 여깁니다. 이 세상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슬픈 사람들, 여러 사회적 배척이나 추방(ostracism)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잘 알고 체험하고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치유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시고 있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염원은 예수님을 따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덕을 입고 자비로운 삶의 길을 배양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이런 생활은 종교적 또는 윤리적 체제를 넘어서는 영성생활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살았던 “길”이었습니다. 성서 중심의 종교적인 삶 보다는 복음 안에 담긴 “예수님의 영”을 자기의 모든 생활권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또 이 사회에서 배척 받는 사람이 되는 여러 길들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길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데 얼마나 부족한가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만난 율법적인 부자 청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이(치유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치유와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제자의 조건을 우리가 우리의 힘만으로는 만들어 나가는 것은 역부족이며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주님은 자비로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생활양식)을 걸으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설교 끝에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 6:36] 분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치유 사역자들은 복음 이야기 속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명상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실 것을 열심으로 기도하는 삶을 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치유사역에서 만난 여러 많은 환우들이 우리 자신을 그들의 고통과 슬픔 안으로 동참케 하여 나누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우리의 것이 되는 때 우리는 함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Nouwen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영 안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는 환우 자신들입니다.
마지막 우리의 한 사례로서 이 말씀의 간증으로 맺으려고 합니다. 한 살 때 의료사고의 희생자가 된 요셉은 약 칠년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환우입니다. 지금 만 아홉 살이 되었지만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입으로 먹을 수도 없는 전신이 마비된 뇌수막염의 와상 환우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의 일차 요양시설에 위탁하여 이 애는 거기에서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육 년 전에 그의 곁에는 류마티슴으로 전신 거동 불능한 사십 대 여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요셉과 함께 약 일년을 사는 동안 크나큰 치유의 은사를, 아무 말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요셉을 통하여 얻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매듭마다 구부러진 손발과 골반을 수술하면 걸을 수 있고 홀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의사의 제안을 믿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높은 수술의 위험성과 재활의 고통과 아픔 등을 이유로 오랫동안 이를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년 간의 요셉과의 생활에서 그 여인은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답게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욕으로 지난 4년 동안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지금 그 여인은 생활하는데 큰 지장 없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셉은 그 여인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였고 지금도 요셉을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 요셉을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살리신 이유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들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서로 얼싸안고 춤 추고 기뻐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여러분 모두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 우리가 가난한 이웃,
굶주린 이웃, 고통 받는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하시고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예수님은 지상선교에서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인간을 치유하시는 자비의 많은 행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 기자들은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도 30퍼센트나 기록한 것은 치유를 예수님의 중요한 과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것이 현재 살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명상하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부름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금욕적인 경건한 삶을 살면서 하늘나라의 도래에 채비하여 그의 동포들에게 “회개하라”고 간절히 외치던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 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병들고 고통 당하는 사람의 치유자이시며 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 것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 첫 부분(17~19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선교를 아주 정확하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에게 설교하였습니다. 특별히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다가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 마을의 회당 예배에서 행하신 그분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사명을 마음이 찍힌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며 억눌리고 묶인 사람을 해방하는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 설교 끝에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열기 시작하였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소식은 유다 땅과 그 근방까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설교에서 이제까지 아무에게서도 보거나 듣지 못한, 또 만질 수 없었던 것을 만지는 것과 같은 하늘나라의 신비한 맛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마음이 찍힌 사람들을 낫게 하시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깨끗이 고치는 여러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치유의 행적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전혀 체험하지 못한 위로와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치유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 기사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의 동기와 그 능력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이 벌서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나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가 안 되였다.”[마태 15:32a]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배고픔보다 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병 환우와의 만남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의 손을 나병 환우에 대시고 낫도록 하신다.”고 마가는 기록 합니다.(1:40) 예수님의 애가 녹는 “측은한 마음”은 나병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잊으시게 하고 종교적, 문화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이를 치유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를 떠나 방자한 삶음을 살다가 세상이 주는 재원과 안전까지 다 잃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맞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누가15:20 참조]. 하느님 아버지는 어떠한 잘못을 범할지라도 용서하시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또 나인 지방에서 죽은 외아들의 상여에 울고 따라 가는 과부인 그의 어머니의 울음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애가 녹는 듯한 “측은한 마음”으로 “울지 말라” 위로하시며 “젊은이여 일어나라” 명령하여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누가 7:13~14].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그와 이별하는 가족들의 울음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가까운 애 녹는 마음을 복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의 장지에서 모두들 울며 애통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 자신도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랐으며” 그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1:35~38]. 공동번역의 “눈물을 흘렸다”는 번역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는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그의 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하시는 비통한 마음에 잠기신 예수님의 심정에 적절치 않은 번역인 것 같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he wept”라고 짧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울음은 주위 사람과 같이 슬픔에 차서 큰소리로 통곡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 기적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의 애끊은 외침 또는 그 고통을 제거하여줄 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마음과 주님의 자비하신 마음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헤매는 사람의 처참한 신음 소리를 가슴 깊이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소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으로 아파하고 시달리는 사람과 함께 나누려는 그분의 움직임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참여 과정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기적의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치유의 행적의 원천은 예수님의 가슴 깊이에서 나오는 연민의 정, compassion입니다. 영어 표현 compassion은 우리가 흔히 쓰는 동정과 상통하고 있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가련하다 또는 불쌍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말들은 자기를 낮추면서도 생색내거나, 상호간의 일치감을 결여하거나, 상대를 열등하게 여기거나 또는 상대를 도와주는 대상으로 여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박애정신이나 동정심에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자선행위가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결과도 흔히 일어납니다. 이런 자선행위는 연민과 자비에서 나오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며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힘을 실어 주지 못하고 의존성을 조장합니다.
연민(compassion)은 구약에서의 hesed와 같은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 성경에서도 문맥에 따라 여러 말로 번역된 아주 어려운 용어입니다. 미국의 구약신학자 Bernard Anderson은 선지자의 전통에서 이해되는 hesed는 항구적이고 진실된 사랑, 충성스러운 절의, 외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 때문에 변함없이 사랑하는 어버이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 용어는 어떤 인격적인 품성이나 미덕이 아니라 실천이 있어야 하는 명사이며 추상적이지 않은 용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은덕을 입은 행위도 hesed를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야훼 하느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며 또 동시에 의로우신 하느님은 성스럽고 올바른 분입니다. 자비하심과 의로우심은 하느님의 속성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미가는 야훼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과 자비인 hesed를 행하는 것과 정의인 mispat를 행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미가 6:8]. “불의는 연민의 가장 원천적인 적이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명제입니다.” 한 유대교의 랍비는 hesed를 행하는 자체가 부자나 사회의 특권층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민인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며 또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야훼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내시지 않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 34:6]. 야훼께서 자칭하신 것을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에 매정하고 쌀쌀한 무감각한 초월적인 또는 추상적인 창조주는 아닙니다. 랍비인 Hershel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 인간사에 관심이 많으시고 아주 자비하셔 그분이 친히 창조하신 것에서 절대로 멀리 떠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늘 돌보시면서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라고 설파합니다. 사람이 고통당하면 꼭 하느님도 고통당하신다는 사실을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와 집 없는 나그네에게 베푼 너그럽고 큰 사랑에서 나타내 보이시고 있습니다(신명 30:3). 곧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의 고통을 나누려는 사랑의 행적에서 이해됩니다.
Toronto 근처의 라루슈 공동체인 Daybreak에서 살다가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난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인 Henry Nouwen은 저서인『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까지도 돌보아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탈무드의 이야기에서 메시아는 자기 자신의 상처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거나 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도와 달라고 청하여도 별도 준비 없이 곧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건강과 죽음과 고통에서 해방의 길을 열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메시아는 부서진 그의 몸을 하느님께 완전히 바쳐서 우리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몸이 부서지는 상처는 우리를 치유 하시는 가장 주요한 자원이 된 것임을 Nouwen은 주장합니다. 또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의 원천이 오로지 자비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육화한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이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투성인 우리 이웃 안에서, 말기 환우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또 말없이 이런 이웃을 돌보는 사역자들 안에서 우리는 항상 만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6장 20절부터 26절은 예수님의 아주 중요한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치유자이시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 하신 설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지금 우는 사람들아, 사람의 아들 때문에 핍박 받는 사람들아, 너희들은 행복하다” 치유와 해방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이 설교에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과 슬픔에서 또는 사회적 추방과 배척 가운데 외치며 우는 소리가 하느님께 들려오는 사람이 되라고 분부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불안전하고, 넉넉하지 않고, 취약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홀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처지에서 하느님만을 특별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현대의 가난한 사람은 언제 직장에서 해고당할지 모를 위협을 받고 있거나, 실직하여 어디에서나 일 할 곳이 보이지 않거나, 하루 끼니가 어디에서 올지 모르거나, 거주할만한 집을 얻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거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노인들, 불치와 난치의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우리 주위의 노숙자 등등. 이런 여러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지금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이며 하늘나라가 저희들 것이며 이런 가난한 삶의 욕구는 하늘나라에서 장차 채워질 것이며 하늘의 위로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들은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아주 중요한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십일 세기의 이 세상이 추구하는 삶 또는 가치와는 아주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삶과 가치를 제시하고 계신다고 여깁니다. 이 세상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슬픈 사람들, 여러 사회적 배척이나 추방(ostracism)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잘 알고 체험하고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치유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시고 있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염원은 예수님을 따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덕을 입고 자비로운 삶의 길을 배양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이런 생활은 종교적 또는 윤리적 체제를 넘어서는 영성생활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살았던 “길”이었습니다. 성서 중심의 종교적인 삶 보다는 복음 안에 담긴 “예수님의 영”을 자기의 모든 생활권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또 이 사회에서 배척 받는 사람이 되는 여러 길들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길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데 얼마나 부족한가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만난 율법적인 부자 청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이(치유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치유와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제자의 조건을 우리가 우리의 힘만으로는 만들어 나가는 것은 역부족이며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주님은 자비로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생활양식)을 걸으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설교 끝에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 6:36] 분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치유 사역자들은 복음 이야기 속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명상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실 것을 열심으로 기도하는 삶을 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치유사역에서 만난 여러 많은 환우들이 우리 자신을 그들의 고통과 슬픔 안으로 동참케 하여 나누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우리의 것이 되는 때 우리는 함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Nouwen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영 안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는 환우 자신들입니다.
마지막 우리의 한 사례로서 이 말씀의 간증으로 맺으려고 합니다. 한 살 때 의료사고의 희생자가 된 요셉은 약 칠년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환우입니다. 지금 만 아홉 살이 되었지만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입으로 먹을 수도 없는 전신이 마비된 뇌수막염의 와상 환우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의 일차 요양시설에 위탁하여 이 애는 거기에서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육 년 전에 그의 곁에는 류마티슴으로 전신 거동 불능한 사십 대 여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요셉과 함께 약 일년을 사는 동안 크나큰 치유의 은사를, 아무 말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요셉을 통하여 얻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매듭마다 구부러진 손발과 골반을 수술하면 걸을 수 있고 홀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의사의 제안을 믿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높은 수술의 위험성과 재활의 고통과 아픔 등을 이유로 오랫동안 이를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년 간의 요셉과의 생활에서 그 여인은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답게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욕으로 지난 4년 동안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지금 그 여인은 생활하는데 큰 지장 없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셉은 그 여인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였고 지금도 요셉을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 요셉을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살리신 이유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들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서로 얼싸안고 춤 추고 기뻐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여러분 모두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 우리가 가난한 이웃,
굶주린 이웃, 고통 받는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하시고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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