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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앙

누가복음 차정식............... 조회 수 2904 추천 수 0 2004.05.05 14: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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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4:13-35 
설교자 : 차정식 목사 
참고 : 새길교회 
매년 이맘 때 새길교회에 설교하러 올 때 저 나름의 은근한 감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묘한 해방감 같은 것입니다. 그 원인이 뭘까, 간밤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대강 세 가지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제 몸의 동선이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여기 저기 자유롭게 배회하고 소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가 방문하는 계절이 예외 없이 부활절 이후의 화창한 봄이라는 사실과 관련되는 듯합니다. 아마도 봄을 타는가 봅니다. 셋째, 저의 성서 분석과 해석과 적용이 다소 오버할지라도 여기서는 그것을 타박하지 않고 다 용납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모든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그것은 길 위에 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묵은 길이 아니라 늘 새로운 길, 참신한 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생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길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것 같지만 그 이전에 복음은 이미 길 위에서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길 위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움직이는 운동이었습니다. 예수의 신학 또한 방랑하는 삶의 스타일에 기초한 길 위의 신학이었습니다. 그의 바톤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선교 동선을 추적해보면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떠돌며, 그들 또한 부지런히 길 위에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라는 공식 명칭이 생겨나기에 앞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은, 그래서, ‘그 길’(to hodos), 또는 한자어로 ‘그 도’라는 표현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시작이 길 위에서 부활 신앙을 체험하면서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대 철학의 한 유파로 소요학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방이 아닌 길 위에서 걸으면서, 소요하면서 대화를 통해 진리를 논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의 소요와 대화의 전승이 흥미롭게도 누가-행전의 계통에 나타납니다. 본문의 경우도 그렇고, 사도행전에서 빌립 집사가 이집트로 내려가는 내시와 길 위에서 대화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나눈 것도 같은 패턴의 예입니다. 본문은 공관복음 중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예수 부활의 후일담입니다. 이를 전문 용어로 ‘기원 설화’(etiological legend)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꼼꼼히 뜯어 살펴보면 맨 처음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어떤 경로를 거쳐 생성되었는지 그 압축 파일을 열어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글로바라는 실명의 제자와 또 다른 익명의 제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참혹한 십자가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여인들이 전한 부활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 낙담한 채 귀향 중이었습니다. 그때 그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걸으면서 대화하던 중 그들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은 극적으로 눈이 열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일종의 관전 포인트라고 할까요?

첫째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신앙적 변화라는 관점입니다. 그 변화는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눈을 뜨는 개안의 체험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깨달음의 이야기가 됩니다. 신앙적 각성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때 눈은 신체기관으로서의 의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식의 개념입니다. 제자들은 이를테면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는 겁니다.

둘째, 예수의 입장에서, 예수의 위상 변화를 강조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선지자라는 민족적 지도자에서 십자가 고난을 받고 부활의 영광을 얻은 그리스도로 변화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론의 전환을 다룬 에피소드입니다. 예수는 여기서 ‘존재의 전환’을 겪게 됩니다.  

셋째, 그 모든 변화의 방법이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먼저 회고와 대화의 방법이 제출됩니다. 두 제자는 예수께 근래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회고시켜줍니다. "그는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4:19-20).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진전됩니다. 아울러, 비판과 해석, 설명의 방법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깨닫지 못하는 그 제자들을 향해 질책성 비판을 가하고, 성서의 의미를 풀어 해석하면서 그로부터 도출된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그 말미에 식사 행위라는 또 다른 방법이 나타납니다. 함께 떡을 떼어 나누는 그 식사 행위는 성만찬이라는 제의 행위가 그리스도교의 제도적 형성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넷째, 이 모든 것들, 곧 회고와 대화, 비판과 해석과 설명, 식사 행위, 그 결과로 발생한 개안과 신학적 변신의 사건이 시종일관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예수가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연후 제자들의 신앙 간증이 뒤따르는데, 여기서 우리는 아쉽다는 느낌이 생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좀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기분 좋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길이 끝나면 또 다른 새 길이 시작된다는 평범한 상식을 염두에 두면 예수의 사라짐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래야 제자들에게 주체적 신앙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새롭게 길 떠나는 무드로 충만합니다. 4.15 총선 이후 이 나라, 이 사회의 정치적 무드에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선거 결과를 놓고 국민들은 뭔가 새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기대로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생명력을 극대화하여 무엇이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픈 의욕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야 정상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이, 그 생의 동선이 시간 따라, 공간 따라, 일정한 패턴을 따라, 또 모험의 길을 쫓아 유동하는 길 위의 존재라는 사실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의 경우가 그랬듯, 우리의 신학 또한 길 위의 신학이며, 우리의 신앙도 끊임없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길 위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길 위의 신앙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개척하여 없는 새 길을 만들망정 이미 밟은 길을 영토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 생의 각종 성취를 탈영토화합니다. 제가 학교에 있다 보니까 주로 학교에서의 경험으로 신앙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 중요한 경험 하나는, 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성취에 스스로 들려 동어반복과 동종교배의 습성에 빠지면 그것이 학자의 학문적 생명에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성취를 해체하여 훌훌 털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고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길 위의 신앙은, 자신의 성채를 지어 그 안온한 장막 속에 안존하기보다 끊임없이 다시 걷는 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기억을 살려 회고하고 대화하며, 비판하고 재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는 믿음으로 가능해질 것입니다. 길 위의 신앙은, 그 깨달음의 결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길을 바꿔 예루살렘으로 향했듯, 180도 유턴하여 뒤돌아설 수 있는 과감한 전복과 자기 도전의 신앙입니다.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겁니다. 혹자는 새것 콤플렉스를 비판하지만, 그 새것이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비판적 계승과 발전이라면 새로워지고자 하는 역동의 몸부림은 뭇 생명의 특권일 것입니다.

4.15 총선이 있던 날, 저는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간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으로 제 생에 열여섯 번째 이사였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오딧세우스 생각을 했습니다. 파란만장한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그의 심사를 떠올려봤습니다. 모든 길은 본향으로, 집으로 회귀하는 길의 모사라는 엘리아데의 아름다운 문장도 덩달아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다, 저는 모든 집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발걸음으로 새 출발하는 가지 갱신의 기반이라는 말을 덧보태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색을 통해 도출한 이사의 신학적 의미인즉, 내 자신이 고정, 고착된 사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체로 길 위의 존재라는 자각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역동하는 생명체는 언제나 활달합니다. 밥을 먹어도 길 위에서 먹어야 더 맛있고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어릴 적 소풍 가서, 어머님이 싸주신 찐 계란, 사이다, 김밥의 심오한 맛을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등산하다가 길 위에서 끓여먹는 라면 한 그릇의 맛은 얼마나 철학적입니까. 혼자 먹지 않고 함께 나누며 하는 식사, 그것은 성만찬이라는 제의 이전에 자연화된 욕망의 소박한 향유일 것입니다. 바로 그 길 위에서 물신에 찌든 우리의 가짜 욕망은 반성의 계기를 얻고 자연스런 상태의 태초의 욕망에 가까워집니다.

새길교회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방 안에 밀폐, 침잠하는 신앙이 아니라 길 위에서 역동하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묵은 길, 남들이 다 가는 길, 친숙하고 편한 길이 아니라 거칠고 협착할지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하여, 새길교회라는 이름에 부응하는 교우들이 다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엠마오로 가던 길 위의 두 제자처럼 실의와 낙담, 무기력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회고하고 그와 더불어 대화하며, 선의의 비판과 해석, 상세한 설명을 주고받고, 함께 나누는 식사로써, 우리의 눈이 열리고 깨달음의 환희에 동참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잠자는 생명력을 일깨워 약동하는 이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배 시간 한 시간 전쯤에 여기 당도하여 인근의 청담공원을 산보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우연히 길 위에서 권진관 형제를 만나 즐겁게 담소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대신 선량한 이웃들을 봤습니다.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놀이터 벤치에서 종교에 대하여 대화하는 중년 부부의 모습도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싱그런 초록의 빛을 응시하고 새소리를 들으며,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기에 행복합니다. 그 행복은 뭇 생명이 새로워지려는 신진대사의 운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활의 숨결 덕분일 것입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여러분의 마음이 간단없이 스스로 새로워짐으로써 남을 새롭게 하는 길 위에 머물길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생명력이 극대화되어 그로써 감화된 이 시대, 이 사회가 부활의 계절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귀에 스친 노래 가사가 “거리는 부른다. 미풍에 춤추며 숨쉬는 거리는”이었습니다. 인간의 거리는 여러분들의 생명력으로 인해 춤출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활 신앙, 맥동하는 길 위의 신앙이 이 건조하고 오염된 인간의 거리를 춤추며 약동하는 숨결 넘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변화의 동력을 창출하는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들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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