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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0: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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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채수일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
1. 사람의 삶은 언제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관계는 우리에게 많은 기쁨과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관계라는 끈이 숨 막힐 정도로 목을 조여 와서 차라리 모든 관계를 끊고 살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관계가 기쁨을 주든지 아니면 부담을 주든지, 관계가 신뢰로 가득 차 있든지 아니면 긴장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사람은 외로운 섬처럼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관계의 역사이듯이, 성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에 대하여 말합니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아담과 이브, 불평등한 형제관계 때문에 살인을 한 가인과 아벨, 부왕의 질투와 왕위계승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우정을 지킨 요나단과 다윗, 서로 다른 종교와 부족적 배경 때문에 서로를 배신한 삼손과 데릴라,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사는 경건한 형과 유산을 탕진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한 동생, 잃어버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등 성서에는 다양한 관계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2.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가운데 두 자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들입니다. 이 두 자매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문학과 미술이 오랫동안 즐겨 채택한 모티브였지만 또한 많이 오해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두 개의 대립적인 인간상, 혹은 제자상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편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여인인 마르다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베다니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일만큼 적극적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입니다(요 11,1-2).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느님께 구하시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요 11,21-23)라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인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을 접대합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엌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합니다. 이런 마르다 같은 여인들이 없다면 오늘의 교회도 일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헌금하고, 새벽기도는 물론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접대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마르다 같은 여신도들이 없다면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가 오히려 주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마리아가 무엇을 했길래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나요? 마리아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녀는 단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의 마리아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미술작품들은 마리아를 매우 아름답고 겸손하고 명상적인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하여 ‘일곱 마귀’에게서 해방된 여인(눅 8,2)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도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요 11,20). 마리아는 매우 소극적인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죄 많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요 12,1-8; 마 26,6-13; 막 14,3-9). 그런데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날, 마르다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약간은 화가 났을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말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거장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94)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라는 작품(1567)에는 마르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에게 무언가를 따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준비는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만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잔뜩 울화가 치밀어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작품(1618)도 불만스런 얼굴로 절구질을 하는 마르다를 그리고 있습니다(고종희,『명화로 읽는 성서-성과 속을 넘나든 화가들』, 한길아트, 2000, 108~110쪽).
그러나 마리아는 ‘중요한 일이 뭔지를 알고, 부수적인 일은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 ‘결단성이 있었으며, 비록 잠시 방탕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주님을 알고 난 후부터는 오직 주님 섬기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여인,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으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고종희, 같은 책, 110쪽).
정말 그럴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했을까요? 물론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매우 수상스런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온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마르다가 가만히 말하자마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에게 갑니다. 예수님에게 온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울면서 말하자,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면서 우신 경우가 별로 없는 것에 비추어보아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해 하며 괴로워하고(요 11,33, 38), 눈물을 흘렸다는 것(요 11,35)이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마리아의 행동도 매우 에로틱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린 이후, 다시 말해 율법과 복음, 행위를 통한 구원과 말씀의 경청에서 오는 믿음을 통한 구원, 업적을 통한 의인과 믿음을 통한 의인으로 대립시킨 이 후,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는데 있습니다. 마르다는 활동적인 봉사의 삶을, 마리아는 명상적인 기도의 삶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결국 행동보다는 기도를, 봉사보다는 명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말일까요? 만일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3.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마르다를 탓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기대된 모든 일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실 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르다의 친절과 접대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처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본 마르다가 마침내 예수님에게 와서 말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
혼자서 땀을 흘리며 분주한 데 동생은 일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해서 마르다가 그랬을까요? 마르다의 불평 뒤에는 단순히 도움에 대한 요청 이상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유대 전통을 아는 사람은 곧바로 이 점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은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자로서 매우 점잖지 않게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선생의 발 곁에는 오직 첫 번째 남자 제자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남자 제자는 물론이지만 더욱이 여자가 랍비의 발 곁에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랍비도 여자가 자기 발 곁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대단히 선동적으로, 다시 말해 해방된 여성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니인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말해 마르다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태도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마르다와 조용하고 소극적인 마리아의 태도를 대립시킬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누구도 자신의 행동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경시하거나, 자신의 경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형태가 어떻든 각각의 신앙생활은 존중되어야 하고, 각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신앙과 은사의 다양성은 서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이것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서로 간섭하지도 말고,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그런 무관심을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마르다가 아니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주님, 제 언니가 저렇게 부산을 떨면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접대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제발 그만두고 조용히 앉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만약에 마리아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예수님은 같은 대답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약자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강자였습니다. 마르다는 사회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가 성서로부터 아는 것처럼 당시의 관습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켜 보호합니다. 그것은 지금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바른 일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조화로운 균형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지금도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이만이 아니라 늙은이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은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돕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교인들의 다양한 은사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을 돕는 때는, 우리가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서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가장 약한 곳, 가장 약한 교인들을 찾아 그들의 은사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직분과 은사는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지배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눅 22,27). 주님이 시중드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시중드는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 따라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지치지 않는 힘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서울 강남구 대치동 889-5 샹제리제센터 A동 808호(135-280)
전화: 555-6959 e-mail: tosaegil@empal.com
인간의 역사가 관계의 역사이듯이, 성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에 대하여 말합니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아담과 이브, 불평등한 형제관계 때문에 살인을 한 가인과 아벨, 부왕의 질투와 왕위계승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우정을 지킨 요나단과 다윗, 서로 다른 종교와 부족적 배경 때문에 서로를 배신한 삼손과 데릴라,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사는 경건한 형과 유산을 탕진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한 동생, 잃어버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등 성서에는 다양한 관계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2.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가운데 두 자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들입니다. 이 두 자매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문학과 미술이 오랫동안 즐겨 채택한 모티브였지만 또한 많이 오해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두 개의 대립적인 인간상, 혹은 제자상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편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여인인 마르다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베다니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일만큼 적극적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입니다(요 11,1-2).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느님께 구하시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요 11,21-23)라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인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을 접대합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엌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합니다. 이런 마르다 같은 여인들이 없다면 오늘의 교회도 일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헌금하고, 새벽기도는 물론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접대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마르다 같은 여신도들이 없다면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가 오히려 주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마리아가 무엇을 했길래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나요? 마리아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녀는 단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의 마리아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미술작품들은 마리아를 매우 아름답고 겸손하고 명상적인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하여 ‘일곱 마귀’에게서 해방된 여인(눅 8,2)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도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요 11,20). 마리아는 매우 소극적인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죄 많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요 12,1-8; 마 26,6-13; 막 14,3-9). 그런데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날, 마르다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약간은 화가 났을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말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거장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94)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라는 작품(1567)에는 마르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에게 무언가를 따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준비는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만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잔뜩 울화가 치밀어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작품(1618)도 불만스런 얼굴로 절구질을 하는 마르다를 그리고 있습니다(고종희,『명화로 읽는 성서-성과 속을 넘나든 화가들』, 한길아트, 2000, 108~110쪽).
그러나 마리아는 ‘중요한 일이 뭔지를 알고, 부수적인 일은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 ‘결단성이 있었으며, 비록 잠시 방탕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주님을 알고 난 후부터는 오직 주님 섬기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여인,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으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고종희, 같은 책, 110쪽).
정말 그럴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했을까요? 물론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매우 수상스런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온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마르다가 가만히 말하자마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에게 갑니다. 예수님에게 온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울면서 말하자,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면서 우신 경우가 별로 없는 것에 비추어보아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해 하며 괴로워하고(요 11,33, 38), 눈물을 흘렸다는 것(요 11,35)이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마리아의 행동도 매우 에로틱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린 이후, 다시 말해 율법과 복음, 행위를 통한 구원과 말씀의 경청에서 오는 믿음을 통한 구원, 업적을 통한 의인과 믿음을 통한 의인으로 대립시킨 이 후,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대립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는데 있습니다. 마르다는 활동적인 봉사의 삶을, 마리아는 명상적인 기도의 삶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결국 행동보다는 기도를, 봉사보다는 명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말일까요? 만일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3.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마르다를 탓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기대된 모든 일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여인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실 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르다의 친절과 접대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처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본 마르다가 마침내 예수님에게 와서 말 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
혼자서 땀을 흘리며 분주한 데 동생은 일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해서 마르다가 그랬을까요? 마르다의 불평 뒤에는 단순히 도움에 대한 요청 이상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유대 전통을 아는 사람은 곧바로 이 점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은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자로서 매우 점잖지 않게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선생의 발 곁에는 오직 첫 번째 남자 제자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남자 제자는 물론이지만 더욱이 여자가 랍비의 발 곁에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랍비도 여자가 자기 발 곁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대단히 선동적으로, 다시 말해 해방된 여성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니인 마르다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말해 마르다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태도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마르다와 조용하고 소극적인 마리아의 태도를 대립시킬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누구도 자신의 행동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경시하거나, 자신의 경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형태가 어떻든 각각의 신앙생활은 존중되어야 하고, 각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신앙과 은사의 다양성은 서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이것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서로 간섭하지도 말고,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그런 무관심을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마르다가 아니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주님, 제 언니가 저렇게 부산을 떨면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접대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제발 그만두고 조용히 앉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만약에 마리아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예수님은 같은 대답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약자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강자였습니다. 마르다는 사회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가 성서로부터 아는 것처럼 당시의 관습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켜 보호합니다. 그것은 지금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바른 일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조화로운 균형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지금도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이만이 아니라 늙은이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은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돕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교인들의 다양한 은사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을 돕는 때는, 우리가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서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가장 약한 곳, 가장 약한 교인들을 찾아 그들의 은사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직분과 은사는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지배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눅 22,27). 주님이 시중드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시중드는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 따라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지치지 않는 힘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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