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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믿음

누가복음 서중석 목사............... 조회 수 2778 추천 수 0 2007.12.18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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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7:11-19 
설교자 : 서중석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에 있는 한 마을에서 예수와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마주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를 만나자마자 소리를 높여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여기서 '선생님'이라고 번역된 원래의 단어는 'epistates'이다. 이 단어는 보통 '선생'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선생'을 뜻할 때는 'didaskalo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epistates'에는 'didaskalos'보다 훨씬 더 존중의 뜻이 담겨 있다. '선생님'보다 '스승님'이라는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다. 이 단어는 아무나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만이 예수를 '스승님'하고 불렀다.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이 예수를 스승님으로 부른 것은 유일하게 이 나병환자들뿐이었다. 이 호칭을 사용했을 때, 나병환자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존중했거나, 아니면 병을 고치기 위해 존중하는 체 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나병환자들의 간청을 예수께서는 들어주셨다. 이 때 예수께서는 11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도중이셨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는 처형을 당하시려는 것이었다. 곧 예수님의 마음은 착잡하셨을 것이다. 나중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 22:42) 하는 기도를 드리신 것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한 길은 힘겨운 길이었다. 그런데도 나병 환자들의 요구를 예수께서는 들어주셨다. '나도 이제 곧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까지 돌보아 줄 기력이 없다' 하고 거절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사람들이 그 사정을 잘 모르고 우리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하면 우리는 이내 거절하기가 쉽다. 나도 지금 힘들다고!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어렵다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힘겨운 정황 속에서도 나병환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병환자들이 치유되면 그들은 제사장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여야 하고, 또 제사장은 그들을 검사해야 한다. 이것은 양쪽 모두의 의무였다. 검사도 비교적 정밀하게 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이 나병을 병중에서 가장 두려운 병으로 여겼던 이유는, 한 번 걸리면 정결해질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격리된 생활의 비참함과 처절함의 단면을 벤허와 같은 영화가 생생하게 그려낸 적이 있었다. 그 영화의 장면들은 당시 실제 정황을 결코 과장한 것이 아니다. 헨델의 메시아 중 7번 '정결하게 하시리라' 또는 '깨끗하게 하시리라'는 합창곡도 바로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가 된다. 그 가사로 사용된 말라기 3장 3절은 앞으로 하나님의 특사가 나병뿐 아니라 모든 부정한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정결하게 해주실 것을 예고해 주는 내용이다. '정결하게 된다' 또는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사회에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적인 활동을 해도 좋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된다. 헨델은 말라기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특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사회로부터 격리된 그 부정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해 줌으로써 그들의 사회복귀를 주도하는 분으로 해석했다. 이런 점에서 헨델은 위대한 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높은 신학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 본문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겉치레 인사가 결코 아니다.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그 삶 전체가 회복되었다는 감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에게로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다. 제사장들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출발은 열 명이 함께 했으나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의 심정을 전했다. 16절을 보면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라고 자부하던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그 감격의 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따라서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서 탈락된 것으로 여겨졌던 한 사마리아 사람만이 영광과 감사를 드렸다. 이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17절). 급할 때의 마음과 급한 불이 꺼진 다음의 마음이 이토록 달라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 얄팍한 태도들에 문득 섭섭하다는 마음, 아니 외롭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까?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토록 힘이 드는가? 그 삶을 온전히 결정적으로 회복시켜준 나를 쉽게 잊는다는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스승님으로 부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지금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삼풍백화점 붕괴로 생 매몰 당했던 사람들 중 환경미화원 24명이 온 국민의 축하와 경탄 속에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매몰된 지 51시간이 경과된 후의 구출이고 더구나 집단적인 구출이라 그 감격의 강도가 강했다. 언제 다시 붕괴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작업 환경 속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작전을 폈던 구조대원들의 활약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4명 중 오직 한 사람만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는 점이다. 구출될 당시 그들은 비교적 건강상태가 양호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건강했다고는 하나 극한 상황에서 빗물로 버텨왔던 그들의 의식이 온전한 것일 리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점은 그들이 아니라 감사를 한 사람에게 있다. 등에 업혀 나온 24명 중 13번째의 여인만이 철야구조작업 요원들에게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여인의 건강상태가 다른 23명보다 월등하게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4명 중 그 여인만 남몰래 좋은 음식, 좋은 물로 버티어왔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같이 공동으로 겪은 경황이 없었던 그 힘겨웠던 상황 속에서도 그 여인은, 아니 그 연인만이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녀에게는 살았다는 감격이 치솟았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여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당신은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을 유일하게 감동시킨 분이라고!〉 13번째 여인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운 반응을 했다. 내가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누가복음 17장의 이 기사를 택한 것은 순전히 그 여인의 짤막한 감사인사가 내게 준 감동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여인은 감사가 평소 몸에 밴 사람이라 생각한다. 생전 감사를 안 해본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는 더구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던 사람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감동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지하 삼층에서 밧줄로 묶어 올려준 구조대원이 24명을 다 구한 후 인터뷰에 응하면서 한 말이다. 그가 힘겹게 벽을 뚫고 그들이 있는 곳에까지 접근해서 그들을 보고 나서 말한 첫마디는 "여러분 이렇게 살아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었다. 감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구조하러 들어간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오히려 감사를 했다. 나는 그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 이유는 그가 감사의 극치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 모두를 신선한 충격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나, 외국인으로 감사의 극치를 보여준 대표적인 예를 나는 벨기에의 다미안 신부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 나병환자와 함께 보내기로 작정한 다미안 신부는 나병환자들이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는 남태평양의 몰로카이 섬에 가서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환자인 그들이 환자가 아닌 자신을 그들과는 운명이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 신부는 그들과 심정적으로 교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자신도 그들의 고통을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직접 자신이 나병환자가 되기를 날마다 주께 기도했다. "제발 나병에 걸리게 해주십시오." 그러던 중 몇 년만에 결국 그 자신이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 신부는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감사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정교육이 결정적이다. 요즈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 손쉽게 넣을 수 있게 된 아이들은 감사하는 법을 모른 채 성장하기 쉽다. 또 어른들은 공부를 안 할 때만 간섭할 뿐 그까짓 감사쯤은 가르치지 않아도 대수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단히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나'만 알지, '남'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감사를 가르쳐야 한다. 어떻게? 말로만? 어른들이 늘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어린이들은 그것을 보고 배운다. 자신은 감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면서 자식에게 감사하며 살라고 하면 부모에 대한 신뢰도만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18절에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고 물으셨다. 감사하리라 기대했던 귀한 집 아이들은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천한 집 아이가 감사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했다 할 때, 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 의해 천한 사람으로,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간주되었다(요 4:9). 요한복음 8장 4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비난할 때 이런 식으로 했다. "너는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이 들린 사람이 아니냐?" 이러한 비난 속에는 사마리아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과 유사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편견이 암시되어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토록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그 잘났다는 유대인 제사장과 유대인 레위인은 피해갔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 여관으로 데리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눅 10:29-37). 예수님과 대화하다 결국 예수를 증거 하여 많은 사람을 믿게 한 사람도 다름 아닌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었다(요 4:39).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를 드렸다는 보도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실천하며 살려는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감사와는 거리가 먼 듯한 비기독교인들이 감사에 더 익숙한 것이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난다.
예수께서는 고침을 받고 감사를 드렸던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셨다. 여기서 네 믿음이라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여기의 믿음은 그것에다 감사가 합쳐진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너의 신뢰와 그 은혜에 대한 너의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들처럼 감사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았다는 선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우, 그의 육신은 치료되었어도 영은 치료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누가복음 17장의 이 사건은 우리의 믿음 속에 감사가 포함되어야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각이 뚜렷해져야 나온다. 곧, 감사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과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터져 나온다. 이런 인식이 분명해 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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