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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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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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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배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 저는 베드로, 한 평범한 어부였던 그의 삶을 달리 만들었던 본문을 읽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3년 후 허탈한 심정으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광경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초라하게 만들만큼 위력을 지녔던 예수의 말씀 -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 앞에 모든 것을 놓아두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길, 인정하기 어려운 그 패배적 삶을 보며 베드로는 또 다시 얕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허탈한 삶으로 되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도 베드로의 경우처럼 오로지 이 곳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음을 믿고 찾아왔건만 오히려 절망과 좌절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자포자기가 되어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다른 종교로 이적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아직도 이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 곳에서 다시금 희망을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 위에 나 자신의 온 영혼을 집중시키며 새길교회 여러분들에게 선포할 종려주일 설교를 위해 며칠 밤을 고민하였습니다.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질 수 있는 신앙과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용기, 결단이 가능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저는 「깊은 곳, 깊은 강」이란 어휘를 택했습니다. 깊은 곳이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문 말씀의 핵심을 지시하는 것이며, 깊은 강이란 70세를 넘긴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꾸의 마지막 소설의 표제입니다. 소설 『깊은 강』의 내용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곳'의 의미를 해석해 봄으로써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나아감이 분명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이소베라는 한 남자, 이 소설의 화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환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니 환생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몇몇 관광객들과 함께 환생의 나라 인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그 곳에서 자기 아내의 병간호를 하였던 자원봉사자(간병인) 미츠코라는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로부터 그녀의 옛 남자 친구이자, 지금은 신부가 되어 있는 오오츠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본 소설의 제목 『깊은 강』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강인 갠지스강을 의미함과 동시에 오오츠라는 한 신부의 삶의 깊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오오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오오츠 - 그는 오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카톨릭대학 철학부를 다니고 있으며 이후 신부가 되기를 꿈꾸는 일본 내의 보기 드문 기독교 지성인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왜 신부가 되려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 왔기 때문이라고 소박하게 대답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신(神)을 그는 서슴없이 양파, 곧 아무리 벗겨보아도 늘 한결같은, 사랑의 실체라고 바꾸어서 부르기도 하며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힘주어 말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랑스에 유학을 떠나 신학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그 곳 교수, 신부들과 곧잘 논쟁 속에 휘말리고 서구 기독교 신학자들을 화나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시아의 모성적 심성이 그로 하여금 유럽의 기독교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 곳에서 신부 서품을 받지 못하고 수도자 과정으로 머물게 됩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미츠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전 아직 신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의 성직자들에게 전 신부가 되기 위한 순종의 덕이 부족하고, 진정한 신앙에 필요한 원칙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순종의 덕이 부족하다는 것이나, 진정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도, 실은 내가 변함없이 유럽식 기독교만이 절대일 수 없다는 생각을 답안지에 쓰거나 그렇게 떠들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런 자신에게 유럽의 신부들은 카톨릭 교회를 떠나는 게 낫겠다고 말하지만 오오츠는 "나는 예수에게 붙잡혔기에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미츠코를 비롯하여 인도 여행을 했던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이런 오오츠가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인도 갠지스강가에서 힌두교 옷차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놀라움과 함께 그들이 추적해 본 오오츠의 삶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갠지스강에 대해서 조그마한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갠지스강 - 그것은 엔도 슈사꾸 소설의 제목이 말하듯이 여기에서 깊은 강으로 묘사됩니다. 갠지스강을 깊은 강이라 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도인에게 있어서 갠지스강은 인간이 살아 생전 아무리 고귀한 신분으로 살았건, 계급 밖의 천한 삶을 살았던 간에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말과 소의 오물이 버려지고, 사람들이 그 곳에서 목욕하고 빨래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죽어 화장된 인간의 마지막 한 움큼의 재 역시 이 곳에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 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다행히 돈이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힘을 입어 갠지스강까지 인도되어 그 곳에서 운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 노인, 창녀, 거지 - 오랜 순례의 길 끝에 지쳐서 길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길가에 나둥그러져 있습니다.
바로 오오츠는 길가에 나둥그러진 수많은 순례객들의 시체를 등에 업고 화장터를 오르내리며 그들의 재를 갠지스강에 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외국 수도사의 복장으로는 힌두교인들의 화장터를 출입할 수 없기에 그는 힌두교도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오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난 양파(예수)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썩어 문드러진 손을 내밀어 구걸하던 소녀도, 살해당한 간디도 똑같이 마다하지 않고 한사람 한사람의 재를 받아 흘러내립니다. 양파(예수)가 말한 사랑의 강은 어떤 추한 인간도 어떤 더러운 인간도 마다하지 않고 흘러보냅니다." "양파(예수)가 이 마을에 들르셨다면 비록 이들이 힌두교도들이지만 그분이야말로 길에 쓰러져 있는 이들을 등에 업고 화장터로 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생전에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옮기셨던 것과 같이."
오오츠 신부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됩니다. 같이 인도여행을 떠났던 동료 중에는 기자출신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직업상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화장터의 모습을 촬영하다가 몇몇 난폭한 힌두교도들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 순간 오오츠는 평소 입고 있던 힌두복장을 그들에게 입히고 그들을 피신시키곤, 자신이 사진 찍은 장본인임을 자처하여 일본인의 모습으로 그들에 의해 발로 체이고 몽둥이를 맞으면서 피를 토한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소설의 화자인 이소베는 아니 엔도 슈사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오오츠, 저 사람이야말로 예수가 환생한 것이라고." 자신의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그의 환생을 기대하여 찾아 왔던 인도 땅에서 한 카톨릭 수도사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환생을 봄으로써 그는 부활의 의미를 아시아적으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엔도 슈사꾸는 본 소설을 통해서 갠지스강 - 깊은 강, 사랑의 강, 환생의 강인 갠지스강 - 은 인도인, 힌두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예수로 환생시킬 수 있는 강, 바로 그 깊은 강, 갠지스강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성서의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깊은 강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인도의 어느 유적지보다 갠지스강만큼 인생의 오묘함을 보일 수 있는 곳은 없다고 고백하는 엔도의 말처럼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깊은 강,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추악한 모습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우리의 좌절과 아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의 논리에 맹종케 하여 얕은 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깊은 곳, 깊은 강을 외면토록 했습니까?
이제 우리들은 지나치게 세속화된 아니 타락된 종교적 심성에 대한 뼈 깎는 반성이 있어야 될 줄 압니다. 이러한 문제는 기성교회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신학대학 내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거룩한 곳이, 깊은 곳이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가르치는 신학대학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학교에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목사가 되기 위하여, 교수가 되고 큰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남들보다 좋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깊은 강과 깊은 곳을 확인하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선교사, 목사, 교수, 큰 교회를 섬기는 사람,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기능에 불과합니다. 이곳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여러분을 기능인으로 만들기 위한 곳이 아니라 삶의 바탕을 올바르게 키워주는 곳입니다."라고.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그 동안 우리는 조그마한 이익에 중심이 흔들리고 남들보다 먼저 기득권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득이 되느냐 아니냐를 우리의 행동기준으로 삼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국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책 가운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부흥사들의 값싼 설교와는 질적으로 내용을 달리합니다.
건국초기 미국은 '성품윤리'(character ethic)라고 불리는 용기, 정의, 인내, 순수함 등의 인간의 인성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고 합니다. 삶을 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지켜지고 간직되어야 할 원칙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지요.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품윤리는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는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성격 조정, 대중적 이미지, 기법과 화술, 예컨대 '찌푸리는 것보다 미소짓는 것이 더 많은 친구를 얻는다',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격윤리'란 삶의 테크닉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임시변통의 영향력 행사, 권력획득 전략, 적극적 사고방식 등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저자 스티븐 코비는 앞으로 인류 미래를 위해 다시금 성품윤리가 회복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원천적인, 기본적인 삶의 자세 확립 없이 기법과 기술에 익숙해지고 있는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새길을 가려는 우리 역시 우리를 좌절케 만든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술과 기법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은 타락된 종교적 심성의 소유자입니다. 그 속에는 깊은 강이 존재하지 않으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절망과 아픔은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 종교적 심성으로서의 깊은 강에 대한 절규가 사라져 버린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지 않고 얕은 물가에서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쫓아 자신의 직분과 명예를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지요. 이렇게 되는 경우 우리는 실상 가장 세속적이면서도 거룩의 탈을 쓰고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누구이건 간에 인간 모두를 감싸안은 깊은 강, 깊은 곳의 의미에 따라 관용과 사랑의 마음 부재를 우리의 부끄러운 리얼리티(reality)로서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희년으로 고백했던 1995년을 유엔(UN)은 세계관용의 해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평화의 원년이 되기를 바라며 행사를 주관했던 유네스코는 관용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하고 있습니다. '관용이란 편견과 독단으로부터의 자유, 타인에 대한 선입견 없는 긍정적 태도 그리고 개인적 차이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만 재능이나 신념 또는 신앙 등은 다를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더욱 이러한 개인적 차이야말로 개인과 고유의 문명을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 되며, 따라서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행동규범을 금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몸담고 있는 교회 내에는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누구를 이기고 하는 등등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앞에 벌어진 현실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이유로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배제의 원리가 우리 풍토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회는 관용의 해에 가장 비관용적 집단으로 전락해 버릴 위협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갠지스강에 오셨다면 그분 역시 가난한 힌두교인들을 등에 업고 갠지스강의 화장터로 오르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오오츠의 깊은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얕은 곳에서 자신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자신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기요, 우리 기독교의 위기이며 우리 종교성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다른 가능성을 뒤로하고 그리스도의 길로, 깊은 곳으로 나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서로 적이 되고 갈등하게 된다면 우리는 승패의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패배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문제가 되는 비참함을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깊은 곳, 깊은 강 앞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내는 결단을 합시다. 우리 삶 속에 깊은 강이 있고 내 자신이 그 곳에 발을 딛고 서 있다면 우리는 뭐라 해도 행복한 종교적 영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엔도 슈사꾸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통해 환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던 중, 저는 카메룬에서 온 흑인 목사님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분은 박사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카메룬 교회의 감독으로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7살 먹은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얼굴, 너희들의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스위스 아이들은 저마다 흰색을 써서 혹은 노란색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아들은 자기 얼굴을 검은 색 크레파스로 새카맣게 칠하고 있었습니다. 머리털도 곱슬곱슬하게 그려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선생님은 목사님께 전화를 하면서 이 아이는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깊은 곳 깊은 강에 우리들의 삶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왜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모두들 하얗게 노랗게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새카맣게 그렸던 그 흑인 소년의 자의식처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새롭게 다짐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두려움과 절망으로 얕은 물가에 그물을 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부활하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종려주일을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저는 「깊은 곳, 깊은 강」이란 어휘를 택했습니다. 깊은 곳이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문 말씀의 핵심을 지시하는 것이며, 깊은 강이란 70세를 넘긴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꾸의 마지막 소설의 표제입니다. 소설 『깊은 강』의 내용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곳'의 의미를 해석해 봄으로써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나아감이 분명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이소베라는 한 남자, 이 소설의 화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환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니 환생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몇몇 관광객들과 함께 환생의 나라 인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그 곳에서 자기 아내의 병간호를 하였던 자원봉사자(간병인) 미츠코라는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로부터 그녀의 옛 남자 친구이자, 지금은 신부가 되어 있는 오오츠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본 소설의 제목 『깊은 강』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강인 갠지스강을 의미함과 동시에 오오츠라는 한 신부의 삶의 깊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오오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오오츠 - 그는 오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카톨릭대학 철학부를 다니고 있으며 이후 신부가 되기를 꿈꾸는 일본 내의 보기 드문 기독교 지성인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왜 신부가 되려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 왔기 때문이라고 소박하게 대답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신(神)을 그는 서슴없이 양파, 곧 아무리 벗겨보아도 늘 한결같은, 사랑의 실체라고 바꾸어서 부르기도 하며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힘주어 말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랑스에 유학을 떠나 신학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그 곳 교수, 신부들과 곧잘 논쟁 속에 휘말리고 서구 기독교 신학자들을 화나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시아의 모성적 심성이 그로 하여금 유럽의 기독교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 곳에서 신부 서품을 받지 못하고 수도자 과정으로 머물게 됩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미츠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전 아직 신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의 성직자들에게 전 신부가 되기 위한 순종의 덕이 부족하고, 진정한 신앙에 필요한 원칙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순종의 덕이 부족하다는 것이나, 진정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도, 실은 내가 변함없이 유럽식 기독교만이 절대일 수 없다는 생각을 답안지에 쓰거나 그렇게 떠들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런 자신에게 유럽의 신부들은 카톨릭 교회를 떠나는 게 낫겠다고 말하지만 오오츠는 "나는 예수에게 붙잡혔기에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미츠코를 비롯하여 인도 여행을 했던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이런 오오츠가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인도 갠지스강가에서 힌두교 옷차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놀라움과 함께 그들이 추적해 본 오오츠의 삶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갠지스강에 대해서 조그마한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갠지스강 - 그것은 엔도 슈사꾸 소설의 제목이 말하듯이 여기에서 깊은 강으로 묘사됩니다. 갠지스강을 깊은 강이라 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도인에게 있어서 갠지스강은 인간이 살아 생전 아무리 고귀한 신분으로 살았건, 계급 밖의 천한 삶을 살았던 간에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말과 소의 오물이 버려지고, 사람들이 그 곳에서 목욕하고 빨래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죽어 화장된 인간의 마지막 한 움큼의 재 역시 이 곳에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 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다행히 돈이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힘을 입어 갠지스강까지 인도되어 그 곳에서 운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 노인, 창녀, 거지 - 오랜 순례의 길 끝에 지쳐서 길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길가에 나둥그러져 있습니다.
바로 오오츠는 길가에 나둥그러진 수많은 순례객들의 시체를 등에 업고 화장터를 오르내리며 그들의 재를 갠지스강에 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외국 수도사의 복장으로는 힌두교인들의 화장터를 출입할 수 없기에 그는 힌두교도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오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난 양파(예수)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썩어 문드러진 손을 내밀어 구걸하던 소녀도, 살해당한 간디도 똑같이 마다하지 않고 한사람 한사람의 재를 받아 흘러내립니다. 양파(예수)가 말한 사랑의 강은 어떤 추한 인간도 어떤 더러운 인간도 마다하지 않고 흘러보냅니다." "양파(예수)가 이 마을에 들르셨다면 비록 이들이 힌두교도들이지만 그분이야말로 길에 쓰러져 있는 이들을 등에 업고 화장터로 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생전에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옮기셨던 것과 같이."
오오츠 신부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됩니다. 같이 인도여행을 떠났던 동료 중에는 기자출신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직업상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화장터의 모습을 촬영하다가 몇몇 난폭한 힌두교도들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 순간 오오츠는 평소 입고 있던 힌두복장을 그들에게 입히고 그들을 피신시키곤, 자신이 사진 찍은 장본인임을 자처하여 일본인의 모습으로 그들에 의해 발로 체이고 몽둥이를 맞으면서 피를 토한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소설의 화자인 이소베는 아니 엔도 슈사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오오츠, 저 사람이야말로 예수가 환생한 것이라고." 자신의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그의 환생을 기대하여 찾아 왔던 인도 땅에서 한 카톨릭 수도사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환생을 봄으로써 그는 부활의 의미를 아시아적으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엔도 슈사꾸는 본 소설을 통해서 갠지스강 - 깊은 강, 사랑의 강, 환생의 강인 갠지스강 - 은 인도인, 힌두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예수로 환생시킬 수 있는 강, 바로 그 깊은 강, 갠지스강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성서의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깊은 강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인도의 어느 유적지보다 갠지스강만큼 인생의 오묘함을 보일 수 있는 곳은 없다고 고백하는 엔도의 말처럼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깊은 강,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추악한 모습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우리의 좌절과 아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의 논리에 맹종케 하여 얕은 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깊은 곳, 깊은 강을 외면토록 했습니까?
이제 우리들은 지나치게 세속화된 아니 타락된 종교적 심성에 대한 뼈 깎는 반성이 있어야 될 줄 압니다. 이러한 문제는 기성교회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신학대학 내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거룩한 곳이, 깊은 곳이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가르치는 신학대학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학교에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목사가 되기 위하여, 교수가 되고 큰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남들보다 좋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깊은 강과 깊은 곳을 확인하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선교사, 목사, 교수, 큰 교회를 섬기는 사람,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기능에 불과합니다. 이곳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여러분을 기능인으로 만들기 위한 곳이 아니라 삶의 바탕을 올바르게 키워주는 곳입니다."라고.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그 동안 우리는 조그마한 이익에 중심이 흔들리고 남들보다 먼저 기득권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득이 되느냐 아니냐를 우리의 행동기준으로 삼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국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책 가운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부흥사들의 값싼 설교와는 질적으로 내용을 달리합니다.
건국초기 미국은 '성품윤리'(character ethic)라고 불리는 용기, 정의, 인내, 순수함 등의 인간의 인성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고 합니다. 삶을 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지켜지고 간직되어야 할 원칙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지요.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품윤리는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로 바꾸어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는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성격 조정, 대중적 이미지, 기법과 화술, 예컨대 '찌푸리는 것보다 미소짓는 것이 더 많은 친구를 얻는다',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격윤리'란 삶의 테크닉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임시변통의 영향력 행사, 권력획득 전략, 적극적 사고방식 등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저자 스티븐 코비는 앞으로 인류 미래를 위해 다시금 성품윤리가 회복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원천적인, 기본적인 삶의 자세 확립 없이 기법과 기술에 익숙해지고 있는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새길을 가려는 우리 역시 우리를 좌절케 만든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술과 기법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은 타락된 종교적 심성의 소유자입니다. 그 속에는 깊은 강이 존재하지 않으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절망과 아픔은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 종교적 심성으로서의 깊은 강에 대한 절규가 사라져 버린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지 않고 얕은 물가에서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쫓아 자신의 직분과 명예를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지요. 이렇게 되는 경우 우리는 실상 가장 세속적이면서도 거룩의 탈을 쓰고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누구이건 간에 인간 모두를 감싸안은 깊은 강, 깊은 곳의 의미에 따라 관용과 사랑의 마음 부재를 우리의 부끄러운 리얼리티(reality)로서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희년으로 고백했던 1995년을 유엔(UN)은 세계관용의 해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평화의 원년이 되기를 바라며 행사를 주관했던 유네스코는 관용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하고 있습니다. '관용이란 편견과 독단으로부터의 자유, 타인에 대한 선입견 없는 긍정적 태도 그리고 개인적 차이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만 재능이나 신념 또는 신앙 등은 다를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더욱 이러한 개인적 차이야말로 개인과 고유의 문명을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 되며, 따라서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행동규범을 금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몸담고 있는 교회 내에는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누구를 이기고 하는 등등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앞에 벌어진 현실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이유로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배제의 원리가 우리 풍토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회는 관용의 해에 가장 비관용적 집단으로 전락해 버릴 위협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갠지스강에 오셨다면 그분 역시 가난한 힌두교인들을 등에 업고 갠지스강의 화장터로 오르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오오츠의 깊은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얕은 곳에서 자신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자신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기요, 우리 기독교의 위기이며 우리 종교성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다른 가능성을 뒤로하고 그리스도의 길로, 깊은 곳으로 나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서로 적이 되고 갈등하게 된다면 우리는 승패의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패배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문제가 되는 비참함을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깊은 곳, 깊은 강 앞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내는 결단을 합시다. 우리 삶 속에 깊은 강이 있고 내 자신이 그 곳에 발을 딛고 서 있다면 우리는 뭐라 해도 행복한 종교적 영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엔도 슈사꾸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통해 환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던 중, 저는 카메룬에서 온 흑인 목사님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분은 박사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카메룬 교회의 감독으로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7살 먹은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얼굴, 너희들의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스위스 아이들은 저마다 흰색을 써서 혹은 노란색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아들은 자기 얼굴을 검은 색 크레파스로 새카맣게 칠하고 있었습니다. 머리털도 곱슬곱슬하게 그려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선생님은 목사님께 전화를 하면서 이 아이는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깊은 곳 깊은 강에 우리들의 삶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왜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모두들 하얗게 노랗게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새카맣게 그렸던 그 흑인 소년의 자의식처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새롭게 다짐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두려움과 절망으로 얕은 물가에 그물을 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부활하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종려주일을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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