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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는가?

누가복음 강남순............... 조회 수 2278 추천 수 0 2008.05.28 08: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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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2:54-62 
설교자 : 강남순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성서는 인간에 대해 두 가지 대립되는 이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습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며,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을 거역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죄인'으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신학사상사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이 두 모습들 중에서 어떤 모습을 강력하게 부각시키는가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중세의 교회에게 절대적 권위를 주었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다양한 성품들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결과를 낳아서 결국 그 절대적 권위구조로 인해 교회와 성직자는 황금시대를, 평신도인 대부분의 인간은 암흑시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근대과학의 발전 등 다양한 혁명적 변화에 의해 중세는 막을 내리게 되고 동시에 고도의 부정적인 죄인으로서의 인간이해도 가장 낙관적인 인간이해,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로 대체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대이후, 특히 계몽주의 이후에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낙관적인 이해를 신학적으로 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율적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그 인간은 과학을 발전시켰고 예술과 철학을 창출하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의해 지속되는 역사란 진보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조화에 따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자율적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고도의 신뢰를 지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정통주의 신학의 주장은 수용되기가 어려웠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기독교가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 과학, 철학의 놀라운 발전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는 신학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고도의 낙관적인 이해가 벽에 부딪치는 사건이 발발했으며, 이 사건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신학적인 전환점을 다시 맞게 합니다. 그것은 제 1,2차 세계대전인데, 이 세계대전은 인간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동료인간에 대한 잔학한 조직적 살상을 가능하게 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율적 합리성을 지닌 인간, 역사는 진보할 것이라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 이해가 모두 커다란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인류가 경험하게 된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신학적 반응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태동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다시 '전적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가장 중심적인 이해로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이 설교에서 장황한 신학적 인간학의 변천과정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이러한 두 가지의 대립적인 듯한 인간의 모습이 역사적 정황에 따라 한쪽이 강조되고 다른 한쪽이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우리들 속에 언제나 공존하고 있는 모습임을 이 시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가 어떤 분이셨는가에 대하여 늘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며,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름으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언제나 '진리'에만 관심하고 집착하였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신 예수에게 있어서 진리는 형이상학적인 추상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리에의 관심을 통해 그는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인간이하로 취급받던 세리나 창녀에게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고귀함을 볼 수 있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그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에의 관심과 집착은 십자가상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옆에서 회개하는 강도를 따스하게 맞아주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예수는 십자가상에서의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움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남아있게 하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이러한 진리에의 전적인 관심을 보면서, 오늘 저는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진리를 향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 그러면서 동시에 진리를 끊임없이 외면하고 부인하고자 하는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모습 모두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우리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삶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조오지 오웰의 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보면서 저는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무서운 경고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왜곡되고 흉악해진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대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소설이 전개되고 있는 오세아니아에서 사람들의 생활은 철두철미 국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고 가족까지도 같은 가족들을 사상경찰에 고발하고 매도하곤 합니다. 인권이라든지 표현의 자유라든지 하는 것은 일체 무시됩니다. 이와 같이 기계화된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윈스턴 스미스라는 사람이 우연히 어느 여자와 만나 애정관계를 맺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데 그들의 금지된 애정은 마침내 국가체제에 대한 반역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정부의 첩자에 의해 두 사람은 체포되고, 고문을 당한 뒤, 사랑하는 그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정부가 가한 세뇌를 받습니다. 반역정신은 제거되고, 정치학습을 마친 윈스톤은 사상경찰에 의해 총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총살되면서도 완전히 세뇌된 그는 '큰형'이라 불리는 독재자를 찬양하며 죽어 가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어떻게 인간성의 고갈이 오는가, 그것이 과학의 발전과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권력중심부에 의하여 어떻게 비인간화의 도구로 쓰여지는가 하는 것이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화장실을 포함한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을 설치함으로서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하고, 또한 언어를 완전히 새롭게 바꿈으로서 모든 인간을 통제합니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 자유, 정의, 평등, 종교, 민주주의 등과 같은 인간의 고귀한 보편이상을 담은 용어들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며, 그러한 것들은 모두 '사상죄'(crimethink)라는 한 단어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일기를 쓰는 것도 금지되고, 과거를 찾는 것도 금지됩니다. 최고당의 건물에는 이라는 표어가 쓰여져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쟁은 평화라고 가르쳐지고, 진실과 허위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는 예속이라고 하며, 무지해야 잘 길들여지기 때문에 무지는 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증오 주간이 있을 정도로 증오는 인간의 덕목이며, 잔혹한 것에는 아이들까지도 쾌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아이들이 나옵니다. 두 아이의 엄마는 주인공인 위스턴에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구는군요. 교수형 구경을 못 가서 안달하는 거예요. 제가 너무 바빠서 애들을 데리고 가지 못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왜 우린 교수형 구경 안 가는 거야?" 소년이 큰소리로 외쳤다.
"교수형 보고싶어! 교수형 보고싶다니까!" 꼬마계집애가 깡충깡충 뛰었다.

이 아이들은 이미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 속의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를 고발하여 영웅이 되고자 하고, 사람이 죽는 모습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삼는 끔찍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단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일까요?
저는 과학기술의 발달 아래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의 모습이 점점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모습들과 유사해짐을 봅니다.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고도의 과학기술 아래 난센스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등 인간이 오랫동안 종교, 철학, 예술에서 추구하려고 했던 보편적 이상들이 암묵적으로 '사상죄'로 여겨지고 있는 세계로 치닫고 있습니다. 핵실험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으며,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는 살인과,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자신들조차도 그러한 끔찍한 사실을 더 이상 끔찍한 것으로 보지 않는 무감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총을 가지고 부모를, 선생을, 그리고 친구를 아무 거리낌없이 죽이고 마는 아이들이 종종 신문에 등장합니다. 에 나오는 것처럼 현대인간에게서 증오는 사랑보다 더욱 분명하고 현실적인 감정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기술과학에 의하여 발명된 다양한 게임기구들을 통해 다른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상이 자신에게 점수를 주고, 이득을 주는 것이라는 환상을 현실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근세의 사람들은 기술과학은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희망에 차 있는데, 이제 그 기술의 진보로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룩했다고 생각되는 바로 이 때에 인간은 사실상 희망을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기술들이 이제 오히려 인간을 철저히 비인간화시키고, 몰 개성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하며, 증오와 폭력을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사랑, 정의, 진리, 평등에 관한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인간은 자신이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 소설은 이러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으며, 인간은 비인간적 사회를 인간적 사회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품성을 지녔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 쓰여진 이 소설은 전후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인간에 대한 고도의 비관적 이해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닐 수 있는 희망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저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듣습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 - 그는 예수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수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지냈는데도 예수의 비참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진실보다도 먼저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은 차라리 흉악범인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치는 증오에 찬 군중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모습이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의 좌편에 앉을 것인가 우편에 앉을 것인가의 문제로 다툼까지 하던 예수의 제자들의 기대도 한없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십자가상의 흉악범과 같이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좌절되고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이들의 찬양을 받는 영광스러운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바라바와 같은 흉악범보다도 못한 위치에 서게 된 예수의 모습 앞에서 베드로도 한없이 실망하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함으로서 진리를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새벽닭 우는소리는 베드로의 이러한 진리의 외면을 깨우치게 합니다. 진리를 외면하고 부인하는 자신의 이기심, 비겁함, 왜곡된 기대를 한 순간에 돌이켜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베드로에게 들렸던 새벽닭 우는소리는 예수의 소리, 예수의 삶, 예수의 진리에의 관심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외면하고 부인하는가를 깨우쳐 주는 소리, 거룩한 깨달음으로 돌이키게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는 소리입니다. 비본래적 자기로부터 본래적 자기로의 돌이킴입니다. 이러한 돌이킴은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벽닭 우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보다는 증오에, 배려보다는 자기욕심에, 보살핌보다는 폭력에, 살림보다는 죽임에 집착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의 삶과 말씀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그 진리의 실천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 예수의 죽음 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같이 왜곡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날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예수가 보여준 진리의 올바른 실천을 위한 노력을 회피하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득과 기득권, 그리고 이기성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의 모습은 이러한 왜곡됨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차라리 베드로처럼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새벽닭 우는소리를 듣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베드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느냐?". . . 이러한 물음에 끊임없는 결단과 응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진리를 고도의 비인간화와 차별의 사회에서 실천해 나아가려는 삶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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