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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누가복음 이현주 목사............... 조회 수 1706 추천 수 0 2008.05.30 19: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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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32 
설교자 : 이현주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아무리 좋은 보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어떤 건지 모르면, 그게 보물이라는 것을 모르면,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상황에 있어도 자기가 느끼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두 아들 얘기는 그런 사람들 얘기입니다.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고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행복은 누리면서도 불행한 것이죠.
본문을 보면 작은아들은 재산을 달라고 하고, 아버지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줍니다. 둘째 아들은 곧 그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아버지로부터 아주 멀리 멀리,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곳으로 떠납니다. 아버지 밑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그는 도시로 나가 자기가 하고싶은 대로 다 했습니다. 허랑 방탕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거칠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하고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습니다. 먹고싶은 대로 먹고, 입고싶은 옷 있으면 입고 . . . 그런데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다까시'라는 일본인이 라는 책을 썼습니다. 원래 교수였던 그 분은 그 책의 내용을 깨달은 후에, 교수직을 그만 두고, 일본에서 '도시소비자와 농촌생산자 간의 관계'를 모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얘기한 논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공업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지하자원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지하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업사회가 이대로 가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두 번째 이유는 공산품이라고 하는 것은 새끼를 낳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망아지나 송아지를 이용해 농사를 짓다보면 나중에 새끼를 낳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동차 같은 것은 말이나 소처럼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한번 태어난 공산품이라고 하는 것은, 쓰고 나면 버리는 한갓 쓰레기인 것입니다. 이 제한되어 있는 공산품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붕괴를 피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 분이 말한 삶의 목적, 논적 체제, 방향입니다.
일본사람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 . ., 단호하다고 할까요? 칼과 같은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닌 거죠. 그래서 이 교수가 이라는 긴 이름을 걸고, 맨 먼저 한 것이 넝마를 어깨에 메고 길거리에 나가서 버려진 종이를 줍는 것이었습니다. 변신하면서, 이 사회를 다시 만들어 가는 일에 투신한 것입니다.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싶은 대로 하는 삶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엄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제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경제를 살리자'는 표어를 듣는 순간, 이상했습니다. 살려야 할 것은 사람인데 왜 경제를 살리자고 할까? 저는 그 동안 우리가, 자기 하고싶은 대로, 멋대로 사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잡지에 '나는 우리가 이렇게 사는데 우리 나라가 왜 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제가 방정을 떨어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렇게 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하고싶은 대로 살다가 배가 고프게 되었습니다. 일이 잘 되느라고, 가뭄까지 들었습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며 고생하던 그는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 시절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기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모두가 아버지로부터 왔는데, 어머니 산도가 하도 좁아서 빠져 나오는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어디서 왔는지를 까먹었노라고 말입니다. 사는 동안 기억한다면 다행이고, 평생 고생만 직사하게 하면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원래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자기가 완전하고 거룩하고, 모든 좋은 말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그렇게 빛나고 완벽한 존재인지를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맨날 나는 죄인이라고만 얘기하다가 죽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나와 아버지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안동에 있는 한 목사님이 세례를 주게 되어 교리문답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하면,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게 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만 가르쳐준 대답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날 하필 그 목사님은 그 할머니를 지적해서 묻게 되었습니다. 안 물었으면 모르겠는데, 일단 물었으니 대답을 들어야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 . . . ." 큰일 났습니다. 공개적으로 물었으니 일러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할머니는 생각다 못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요 . . . , 우리 오빠시뎌." 이것은 동화를 쓰는 제 친구에게서 들은 실화입니다. 목사님은 화가 났습니다. 감히 예수님을 오빠라고 하다니요. 그래서 그 할머니는 야단만 실컷 맞고 세례도 못 받았습니다. 나중에 제 친구가 할머니를 찾아가, 아까 왜 그렇게 대답했느냐고 물었답니다.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자꾸 묻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나도 아버지라고 하니까 . . . 그러니 오빠 아닙니꺼."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진리'입니다. 진리!
'진리'를, 교리밖에 모르는 목사님이 박살냈습니다.
제 친구는 말했답니다. "아닙니더. 할머니가 맞습니더. 세례 그까짓 거 안 받아도 됩니더. 걱정하지 마시소. 천당 자신할테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내가 살았듯이 너도 살 수 있다. 나를 따라 와라 . . . 그 분이 뭐 하실 일이 없어서 저 높은 하늘에서 여기까지 내려와서 빈말이나 하고 갔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선생으로 모신다고 하면서 왜 자꾸 걱정하고 두려워합니까? 예. 긴말할 것 없습니다. 겁내지 말라면 겁내지 말아야죠. 걱정하지 말라면 걱정하지 말아야죠. 왜 말을 안 듣습니까? 그러면 무슨 선생님입니까? 제가 여기 자매님께 이것을 준다고 "가지세요." 해놓고, 나중에는 다시 가져간다면 자매님 입장은 뭐가 되겠어요?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아닙니까? '맡긴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자기가 다 가져가고. 그럼 난 뭐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대자대비 하신 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속이 없는 분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너희들 속에 불씨 하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다 자식이니,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영어로 'Remember'라 그러죠. 다시 멤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식구가 되는 거죠. 기억하는 순간 -- 그래서 그는 돌아갔고, 아버지가 뜨겁게 영접합니다. 지난날에 대해 일언반구 묻지도 않습니다. 갈 때는 언제고 왜 오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오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 말, '오늘'을 어떤 분이 푸시는데, 「온+늘」이라고 했습니다. '온'은 완전하다는, 빈틈없다는 뜻이고 '늘'은 한결같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영원한 '오늘'이십니다.
'왔으면 그만이지.' -- 그래서 얼싸 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둘째 놈은, 아버지 밑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자기 맘대로 한다는 게 얼마나 고약한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의 세포 한알 한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지식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행복한 삶을 살면서도 그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랐던 아들이 행복을 알게되는 과정이, 저는 '탕자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밑에서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경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분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분이시다'라는 말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이고, 이 앎이 늘어나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둘째 아들 덕분에 첫째 아들도 깨달을 기회를 얻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역시 불만이 많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뼈빠지게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 친구와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잡지 않았다고 말이죠. 자기가 잡아먹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입니다. 아버지를 타인으로 두었어요. 같은 집에 살지만, 남남으로 산 것입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자기를 '감시'하고 '심판'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역시 행복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온다는 기쁨이라는 것은,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집에 돌아온다는 것,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누가 경험할 수 있는가? -- 가출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가출을 안 해보고는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둘째 아들이 얼마나 복덩이 입니까? 그는 집안을 살린 놈입니다.
제가 볼 때 아버지는, 아마 둘째 놈이 "나 나갈 테니 돈 내놓으시오." 했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요놈이 이제 정신 차리겠구나. 날마다 불평만 하더니, 이제부터 뭐가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아보려고 나서나보다' 하고 얼른 돈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담 할아버지께서 선악과를 따서 잡숫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에덴동산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냥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겠지요. 보물을 잔뜩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르면 기쁨이 없어요. 그 할아버지가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잡수신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요즘 어떤 카톨릭신학자가 쓴 책을 보니, 아담의 사건을 타락(fall)이라 부르는데 자신은 상승(ascension)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격을 높였다는 것이죠.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없는 거죠. 그래서 두 아들 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선생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 고 하신 그 말씀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오자와 만시' 라는, 일본 근대진종불교의 스님이 계시는데 그 스님이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참된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여래 안에, 그 전능하고 신비한 손길 안에 내어 맡기고,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모든 일 - '모든' 이라고 하는 단어가 무섭습니다. 진짜, 문자 그대로 모든 일이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생사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생과 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즐길 수 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입을 옷이 있으면 입고."
그러다가 그 만시스님이 쓴 그 다음 문장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깨끗이 죽는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IMF'가 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 . . 여기가 바로 아버지의 집이다.
저 하늘 꼭대기가 아니라, 바로 너 있는, 바로 여기가,
네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네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 . .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분이 뭐가 답답해서 우리한테 헛소리를 하시겠습니까? 맞는 얘기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고 나의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돌아감의 길에 하나의 도구로, 계기로, 그분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더 이상 말로만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정말로 아버지와 함께 하여, 우리의 살아있는 모습 그 자체가 희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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