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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종

누가복음 길희성............... 조회 수 1650 추천 수 0 2008.06.06 20: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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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7:7-10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우리는 누구나 다 보상을 바라고 일을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정당한 물질적 보상이 있기를 바라고, 아니면 정신적 보상이라도 받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당연한 규칙이고 상식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직업으로서 하는 행위는 물론이요 심지어 자발적인 봉사활동에서조차 보상심리는 작용합니다. 적어도 남이 알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특히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보수가 한 사람이 지닌 가치와 역량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무보수로 일을 한다든지 혹은 낮은 보수로 일을 하면 마치 그 사람이 무언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값싼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라는 것이죠.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거나 봉사하고 싶을 때가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기피하게 됩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려 해도, 이러한 순수한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도 많아 기분이 나빠서 그만두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이기는 하지만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돈 때문에 하지는 말고 꼭 그 일이 필요하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지를 분별한 다음에 하자고 수시로 다짐하곤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디다 글을 쓰거나 강연 요청을 받는 경우 보수를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지, 또 해서 보람이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본 후 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흔쾌히 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나고 나서 보면 원고를 의뢰하거나 강연을 부탁하는 측이 지나치게 적은 사례를 하는 경우 무시당했다는 생각,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속았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마저 드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 모순입니다. 돈을 기대하지 않고 한 일이지만 정작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것은 보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것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처음부터 보수를 협상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했다간 돈 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당장 매도당할 것이 뻔합니다. 돈이 사람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순수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런 일을 통해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이러한 세상적 상식과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이야기에 접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보수를 따지고 기대하는 합리적 계산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로 예수가 제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인간사회가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특별한 세계로서, 여기서는 합리적 기대와 타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오늘 저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이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실로 오늘 읽은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의 행위도 이해하기 어렵고, 종의 행위는 더욱 납득하기 어렵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생각은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거나 양을 치는 굳은 일을 하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은 "배고프지,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하는 말은 고사하고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고작 한 다는 말이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라는 매몰찬 말을 내 뱉습니다. 주인의 행동은 아무래도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아무리 인권의식이 낮은 고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주인과 종의 관계라 하지만 주인의 처사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한 수 더 뜨셔서 "그 종이 명령한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정한 주인의 행동을 당연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의 행위는 또 어떻습니까? 지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못 듣고, 곧장 주인이 먹을 음식을 차리고, 옆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시중을 들어야 하는 데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거세게 항의를 하던지 아니면 적어도 투덜거리기라도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건만 이 종은 아무 말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술 더 뜨셔서 말씀하기를 이 종은 그 무정한 주인에게 도리어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주인도, 종도, 예수님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매우 곤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게 도대체 성경 말씀일까요? 상식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의 잘못된 주인과 노예 관계를 정당화 해주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는 이와 똑 같이 상식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날품팔이를 고용하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합니다. 이것도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서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 하나를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데려와서는 일을 시킵니다. 9시경에도 다시 장터에 나가서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 하나를 고용했고, 마찬가지로 12시와 3시쯤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오후 5시에도 장터에 가서 그때까지도 일을 구하지 못해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오늘은 틀렸구나 하면서 포기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가 그 늦은 시간에 그를 부르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정작 그날 일이 다 끝난 후 일어났습니다. 임금을 지불할 때 주인은 뜻 밖에도 모두에게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당연히 아침 일찍 고용되어 하루 종일 일한 자가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인은 말하기를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후 5시에 불려와 고작해야 한 두 시간 정도 일하고도 같은 임금을 받은 자의 놀라움은 어떠했겠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셨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의 상식적 처사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 하나님 나라의 고용과 임금정책은 실로 상식을 뒤엎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선 포도원 주인은 시장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을 모조리 고용했습니다. 능력 여하, 신체적 조건 여하를 묻지 않고 무조건 다 고용했습니다. 요즈음 구조조정과 해고의 열풍이 불고 있지만(구조조정은 곧 해고!) 이 포도원 주인 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다가는 망하기 십상입니다. 또 많이 일한 사람, 적게 일한 사람에게 임금도 평등하게 주니 말이 안 됩니다. 이른바 자본주의식 인센티브라는 것이 없습니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과 오후 5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 같은 임금을 받는데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종과 주인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기업운영이나 노동윤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노동윤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특별한 관계, 하나님 나라에서만 통하는 일과 봉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 포도원 인부들, 특히 자포자기하고 있다가 뜻밖에 오후 5시에 불려가서 아침에 온 사람과 똑 같은 임금을 받은 인부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억울하리만큼 뼈 빠지게 일하는 한 종의 이야기입니다. 둘 다 하나님 나라에서만 통하는 극단의 이야기지만 아주 대조적인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 종의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심과 무조건적인 복종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특히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그의 순수한 마음과 일하는 자세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슴을 뭉쿨하게까지 합니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하는 그의 말 "나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은 참으로 기가 막힌 말입니다. 어이없다는 뜻에서도 기가 막히고, 놀랍고 감탄스럽다는 뜻에서도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마음가짐으로 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묻게 됩니다. 가끔 직장에서도 보면 혼자서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불평 한 마디 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 때문에 그 직장이 유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우리 교회만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없이 봉사하는 손길들이 있기에 목사나 전도사 없이도 우리 교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 종의 경우 어떻게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는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싫건 일하고도 "나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철학자 칸트는 진정한 도덕이란 아무런 이기적 동기 없이 순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덕은 단순히 의무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동기나 목적이 있는 불순한 행위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는 종의 말은 이런 칸트 식 윤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이 종의 행위는 아무런 이유 없는 순종이며 그야말로 '실천 이성'의 명령에 따른 무조건적인 행위일까요? 어디서 그런 순수한 복종이 오는 것이며 과연 인간에게 그런 행위가 가능할까요?
우선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먼저 확인해 놓아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종의 이러한 순수한 복종이 자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강제된 복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주인의 명령이라 해도 그는 그것을 강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그의 말은 이것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강제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일종의 자학증, 이른바 매소키즘에 걸린 사람일까요? 죽도록 일하고도 자기를 '쓸모없는 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말은 그런 의심도 불식시킵니다. 그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군말 없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럼 정말 칸트 식 실천이성의 정언명령이라도 실천했다는 말일까요? 그러나 종이 무슨 그렇게 추상적인 윤리관을 가졌겠습니까? 그는 우리와 같이 매우 상식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단지 주인에 대한 한없는 의무감으로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는 주인에 대하여 그처럼 한없는 의무감을 느꼈을까 하는 것이 핵심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 종이 무슨 구체적인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도 순수하게 주인을 섬길 수 있는 데는 무언가 이유 내지 동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이 이야기 하나만 가지고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없고 아무런 힌트도 없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삶 일반을 두고 볼 때, 특히 포도원 인부들의 비유를 상기해 볼 때, 우리는 답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즉 이 종은 자기 주인에 대해 철저한 신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명해도, 아무리 주인이 가혹한 것 같아도, 그는 주인이 하라는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상은 아니더라도 주인이 자기에게 나쁜 존재가 아니고 결국 자기를 보살펴 줄 것이라는 어떤 확신과 신뢰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인은 결코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서 괴롭히는 폭군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기본적으로는 좋은 분이라는 신뢰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 이 이야기만 보아서는 이것도 잘 알 수 없는 점이지만 - 우리는 역시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주인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신뢰는 그러면 어디에 근거했으며, 어디서 그런 한없는 신뢰가 오는 것일까요?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암시를 줍니다. 여기서는 주인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한 실직자를 아무 조건 없이 고용해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것도 냉혹한 날품팔이 노동시장에서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람을 예기치 않게 불러서 일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과 똑 같은 임금을 주신 한없이 고마운 분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이 일꾼은 단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눈물겨워 다른 인부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죽도록 일하고도 그의 입에서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종과 같이 "나는 쓸모 없는 놈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시는 주인의 상이 이렇게도 모순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하나는 포도원 주인과 같이 무한한 은총의 주님이고 다른 하나는 종을 괴롭히는 가혹한 주인과 같은 존재일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바에 따라 이야기의 상황설정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강조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 충성과 헌신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종의 헌신은 오직 먼저 와 있는 주인의 무조건적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거저 베푸는 주인의 사랑에 대한 순수한 봉사의 응답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복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계산과 타산이 있을 수 없고, 자기 주장과 자존심, 불평과 불만이 발붙일 곳이 없으며, 강제노동은 물론이요 자기비하나 학대도 있을 수 없으며, 냉혹한 의무감이나 칸트 식 정언명령 같은 것도 작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할 일 없이 방황할 때 자기를 구해 준 한없이 고마운 존재에 대한 눈물겨운 감사만이 있으며, 조건 없이 베푼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헌신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아무런 주장이나 자랑도 하지 않고 단지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지극히 겸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종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의 세계에 대해서 일깨워주고 거기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종의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다 보면 때로는 주님의 명령이 가혹하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양 떼를 치고 돌아왔는데도 또 주인의 식탁을 차려야 하는 종과 같이 우리도 살다 보면 일이 힘에 겹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혼자서만 일을 다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누군들 이럴 때 불평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 같은 죄인 건지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한 생각에 모든 불평과 불만, 시름과 피곤은 봄눈 녹듯이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이 종교의 세계며 신앙의 위대한 힘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실업자로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우리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로부터 해방시켜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즉시 가벼워지고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해도 갚을 길 없는 주님의 은총 앞에서 우리는 그저 "쓸모 없는 종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의 길, 무조건적 복종의 길은 사실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자취해서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척박한 땅에 낮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험한 꼴만 당하다가 비명에 가신 그는 하나님의 종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이 길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쳐 주셨고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이 고난의 종 예수를 잊지 못하여 오늘도 이렇게 새길교회에 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종의 도를 가르쳐 주시려고 했으나 때로는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도 높아지기를 원했고 출세를 바라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훈계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태 20:25-28).

우리도 이 종과 같이, 아니면 저 장터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겨우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고용된 날품팔이처럼 한 때는 아무 희망 없이 살던 인생의 실직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막차를 탄 일꾼과도 같이 하나님 나라의 역군으로 초대받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겨우 구원의 막차를 탄 인생들이라는 심정으로 날마다 주님의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늘 쓸모 없는 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겸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운 일들을 아무 불평 없이 감당해가야 합니다. 아무리 갚아도 못 갚을 은총 앞에서 늘 부족한 마음으로, 할 일이 주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공동의회를 열어 새 해의 살림 계획과 사업계획을 의논하고 결정하며 새로이 교회운영의 책임을 맡을 분들을 뽑는 중요한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공동의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이 종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 일하는 충성스럽고 겸손한 하나님의 종, 하늘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스스로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일하고도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실로 아름다운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각 자 자기의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주인의 음식을 만들고 시중을 드는 고된 봉사가 먼저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그야말로 정말 쓸모 없는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다하고도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말고 쓸모 없는 종이라고 겸손히 고백하면서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정말 주인의 마음에 들게 일했는지 몰라서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종의 심정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할 일을 힘껏 다하고 오직 주님의 판정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묵묵히 또 한 해 봉사와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러한 섬김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이 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군림하는 주님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섬기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가장 비천한 종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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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6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17435 출애굽기 망각의 죄 출22:20-26  박충구 목사  2008-06-15 2023
17434 누가복음 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눅6:38  한완상 형제  2008-06-15 2156
17433 누가복음 부모의 권위 눅12:51-53  한인철 목사  2008-06-15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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