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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를 따라

누가복음 권진관............... 조회 수 1554 추천 수 0 2008.06.15 08: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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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7:33-35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오늘 본문에서는 두 인물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 예수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 비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와 요한을 모두 비난하기 위해서 한 것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미쳤다고 하고 마귀 들렸다고도 했고, 예수는 요한과 반대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많이 마시는 자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동감하고 이에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심지어 예수가 요한의 제자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이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와 요한이 행동에서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 요한의 운동의 성격과 예수 운동의 성격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비교는 오늘날 교회공동체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요한이 금욕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을 보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이라고 하는 들 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고, 그가 활동했던 중심지대는 요르단강에 이르는 광야지방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요르단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게 했습니다. 요르단강은 출애굽을 한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진입해 들어올 때 건넜던 관문이었습니다. 요르단 강물에 몸을 적시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사건을 제의적으로 재연하는 것입니다. 옛날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요르단 강물에 몸을 적시면서 건넜던 것을 상기하는 예식을 세례 요한이 거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지배 질서에 도전적인 행동이었으며, 결국 요한은 잡혀 죽게 됩니다.
요한은 금식했습니다. 또 먹되 빵과 같은 부드러운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는 빵을 먹고, 그것도 먹기를 탐하고, 취할 정도로 마셔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금식하고, 예수는 잔치하는 이러한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입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배를 탔다고 생각되는 이 두 사람의 행동에 그렇게도 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아마 오늘 본문을 읽은 사람들 중에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걸 봐라, 예수도 이렇게 술을 마셨다니 나도 이제 마음놓고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음해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교인이냐 아니냐는 술 마시느냐, 혹은 담배를 피느냐로 판단했습니다. 저도 그런 교회의 풍토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많은 구절 중에서 이 구절처럼 예수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드물 것이라고 봅니다. 이 구절은 역사적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진실하게 알려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고하신 예수에게 부담이 되는 이러한 말씀은 역설적으로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는 이 말씀대로 "탐식 하는 자요, 술주정뱅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사람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들 중에는 잔치의 비유가 많습니다. 잔치를 많이 해보고, 그러한 잔치에 즐겨 참석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모든 비유를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세례자 요한은 빵을 먹지 않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이 그 당시에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운동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John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요한의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아포칼립틱(apocalyptic)한 운동 즉, 묵시문학적 혹은 계시록적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또 다른 요한에 의한 아포칼립쉬스라고 합니다.) 요한은 묵시문학적으로 갑자기 오는 종말을 믿었습니다. 묵시문학적이란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그 뿌리가 깊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일어나는 사상과 운동으로, 요한 당시에도 팔레스타인의 하층 유대인들의 삶에는 전혀 희망이 없었고,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고, 대다수 유대인들에 대한 지배층들의 수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온통 부정부패로 가득 찼고, 정의가 없어진 상황을 오직 하느님의 압도적인 심판 개입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묵시문학적, 계시록적인 사상입니다. 요한도 이러한 묵시록적인 종말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종말에 절대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니까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한 표시로 절대적인 금욕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시로서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는 것을 상징하는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기존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바르고 정의롭게 자기의 삶을 성찰하면서 회개하고 잘못을 고쳐나가는 정도의 방안을 제시하는 정도였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심판의 날인 마지막 날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세상을 우리 인간이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만이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한 묵시적이며 계시록적인 선포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닿았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나무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무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끼가 나무의 뿌리에 닿았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가 남김없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었더냐?" 이 말도 세례자 요한이 던진 말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앞으로 닥쳐올 징벌의 날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군중에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또 세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아라." 또 군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이렇게 요한은 각자의 위치에서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면서 곧 들이닥칠 종말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사회의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들은 자신만 반성하고 고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날 새로운 세기말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모든 것을 바치고 종말의 그날만을 기다리자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요한의 생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행태는 이와는 전연 달랐습니다. 요한이 묵시적 종말을 기다릴 때 예수는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며 새로운 공동체를 엮어 나갔던 것입니다. 직접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공동체 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 것처럼 살았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올 하느님의 나라는 임박한 심판 이었습니다마는, 예수에게는 그 하느님의 나라는 기쁨의 잔치와 같은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이 땅에 그리고 예수의 공동체 안에 도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나아가서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의도적인 행동을 했던 분입니다. 요한의 행태가 묵시적 종말론이었다고 한다면, 예수의 경우는 실천적 행동적 종말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는 묵시적 사상으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묵시적 사상에는 인간을 피동적인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열어나가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분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반하여 예수는 인간의 능력과 책임을 중시했습니다. 인간은 결단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일을 이 땅에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예수는 요한보다 적극적인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요한처럼 인간들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무조건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예수는 요한의 무리처럼 금식하면서 그냥 깨끗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으로는 만족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책임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살았던 예수는 요한처럼 광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속에 들어가 잔치를 베풀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포괄하는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열었던 잔치는 그냥 즐기는 유희적인 것이 아니었고 대단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 잔치였습니다. 예수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히 최하층의 소외된 사람들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가졌던 파격적 식탁문화는 당시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린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식탁 공동체를 전 사회적으로 확산하여 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평등의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크다." 예수는 요한의 운동과 자기자신의 운동을 철저히 구별하여, 예수 자신의 운동의 의의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요한의 운동방식으로 해결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옛 시대동안에는 가장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서 요한은 아주 작은 인물입니다. 새로운 시대에서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가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요한의 운동과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운동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이념과 비전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 사회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고, 그것을 바로 잡을 기준이 없다는 말도 들립니다.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 속에 있지만 이것을 헤쳐가기 위해서 어느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안적인 생각들과 운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른바 "생명공동체 운동"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명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러한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고, 우리 나라에도 대안학교운동, 유기농을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야마기시공동체, 두레마을, 풀무원공동체 등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은 대체로 들어가서 사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시 목회를 아예 때려치우고 농촌에 들어가서 몇몇 사람들과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 것을 다짐하는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공동체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길은 없습니까?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함께 살지는 못합니다. 일년에 겨우 한 두번 그것도 1박 2일 정도 같이 지내는 정도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자기가 속하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으로 모여서 함께 일하고 생산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이라고 하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예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는 아예 들어가서 사는 것을 지양하였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지방에서만 박혀서 지낸 분이 아니라, 체제의 핵심부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서도 활동했던 분입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구원은 이 새로운 공동체들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역사 속으로,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사회 속에서 공동체적인 정신을 확산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늘 먹고 마시면서 살 형편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사회 전체를 공동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에 각자 처해 있는 위치에서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농촌에 들어가 공생하는 삶을 산다면 이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일에 참여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이 광야생활을 한다면 예루살렘은 변혁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건설업에 종사하는 한 간부사원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고 공무원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자신의 일이 공무원들에게 방해받아서 아무 것도 해낼 수 없게 되자,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어떤 재벌 부친의 묘가 도굴되고 시신의 일부가 도난 당한 사건을 접했습니다. 자기 팔다리를 자르고 보험금을 타먹으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제 돈을 위해서라면 죽은 사람의 유해도 훼손시킬 수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독한 일에서부터 질서를 안 지키고, 불친절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공공물자를 남용하는 일도 수 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재벌 부친의 묘소가 땅을 그렇게 넓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허탈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무너져 가는 역사와 사회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요? 한 예를 들고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제 학교 컴퓨터 책상 앞에는 미국에서 유명한 브라이스 캐년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캐년은 평평한 땅이 빗물에 의해서 오랫동안 씻겨 내려가면서 깊고 넓게 파헤쳐져서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깊이 파헤쳐진 그곳에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브라이스 캐년은 그랜드 캐년보다는 그 규모 면에서 작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랜드 캐년을 앞지른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캐년을 둘러싸고 캐년을 보호해 주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나무숲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나무들이 캐년을 둘러 싼 광야를 촘촘히 덮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캐년 둘레를 둘러싸고 토양의 침식을 막아주고, 캐년의 둘레를 형성해 주고 있었습니다. 작은 나무들의 숲이 캐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에워 싸주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막아줄 수 있는 숲은 이사회 속에 당연히 생겨나야 할 정의를 실천하는 평등공동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보여준 가장 낮은 계층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초대받고 참석하는 식탁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발견한 수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지켜주고 지탱해 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식탁공동체를 요르단 강가에 있는 광야나 갈릴리 지방에서만 혹은 우리 나라의 시골과 산골짜기로 물러나서 그곳에만 만들어 놓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역사와 사회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예수의 평등 식탁공동체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본 예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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