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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만난 자의 이웃

누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027 추천 수 0 2008.06.20 12: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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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30-3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순복음중앙교회 
저는 여러분과 함께 『 강도 만난 자의 이웃 』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느냐?" 그러니까 이 율법사가 대답하기를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 옳도다 이를 행하여 그러면 살리라." 그러니까 그 율법사 하는 말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많이 얻어 맞고 옷이 벗겨져 그만 죽게 되어 버린바 되었는데 그 길로 제사장 한 사람이 내려오다 보고 지나가고 레위인 한 사람이 오다가 보고 또 지나가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이리저리 행하다가 그 장면을 보고 와서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에게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붕대로 처매주고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데리고 와서 간호해 주고 그는 은전 두잎을 주면서 말하기를 "잘 돌보아 줘라. 부비가 더들면 내가 올 때에 갚아 주리라." 하였으니 "누가 강도 만나 사람의 이웃이 되느냐?" 물으니까 그 율법사가 "자비를 베푸는 자니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첫째로, 여기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은 오늘날의 성직자 즉, 목사나 전도사, 장로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사장은 율법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율법주의자 입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면은 항상 법을 어기는 것만 보이지 잘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제사장이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에게 잘난 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잘못한 점만 보이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람을 그 자리에서 꾸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 따위 짓을 했느냐?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갔느냐?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갔느냐?" 꾸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못된 놈이라고 교훈을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호통을 치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피투성이가 된 강도를 만나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동정과 자비와 사랑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절대 동정이나 사랑이나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준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고 판단했지 사랑과 동정으로 자비를 베풀지 아니했습니다.

(롬12:15-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놓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말라" 고 했는데 제사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에..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두 잘못한 것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할 따름이지 위로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율법주의자이면 아내의 못난 점만 자꾸 지적하고 꾸짖고 판단하기 때문에 아내가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아내가 율법주의자면 남편을 언제나 비난하고 공격하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내와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적인 부모 밑에서 있는 어린 아이는 항상 부모가 너무 엄하게 꾸짖고 심판하고 결점을 지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부모 앞에 나와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하고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가정제도가 부모들이 대개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녀들을 항상 심판하고 평론하기 때문에 부모의 품안에서 자녀들이 놀지 않고 부모를 떠나서 바깥으로 도는 경향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욥은 자식과 재산을 다 잃고 중환자가 되어서 처참하게 심신에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습니다. 엘리바스, 빌다소발, 엘리우 등이 찾아 와서 처음 욥의 전경을 보고 그들은 한 열흘 동안 티끌을 덮어 쓰고 옷을 찢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열흘 동안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차례로 차례로 그들은 욥을 꾸짖고 혹독하게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그들의 교훈이나 꾸짖음의 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교훈 하거나 훈계하거나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말은 다 올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병자에게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잘못 처방하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욥에게 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욥이 필요로 했던 것은 이해와 동정과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 고통을 이길 힘과 치료가 필요했지 욥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조차도 나중에 욥의 친구들을 꾸짖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 교훈하고 정계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들이 말은 일일이 올바른 말이었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욥이 필요한 것은 그런 정죄나 심판이나 판단이나 꾸짖음이 아니라 동정과 사랑과 위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강도 만난 사람의 처지를 보십시오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얻어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교훈이라 정죄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k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 조차도 말씀하기를 죄인들을 보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꾸짖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은혜가 필요하지 정죄와 심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제적인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것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자기 잘난체하고 자기가 세상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자만하는 것보다 고와와 과부를 그 환란에서 도와주는 이러한 것이 진실한 경건이고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 즉, 오늘날 성직자들을 상징하는 이 제사장들은 영적인 우월감이 갖기 쉬운 처지에 있습니다. 이들은 쉽게 이웃을 심판하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갈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했는데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은 일반 사람들 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되지 못한 것을 된 줄로 아는 착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피는 것보다는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를 않습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율법적인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들이 하기 쉬운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합니다.

오늘날 중의 종들이나 성직자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사랑과 동정과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는 정죄와 심판과 판단을 하는 경향력이 많은 것입니다. 닭을 길러보면 닭장에서 병든 닭이 한 마리 생기면 와서 품어주고 위로해 주면 좋겠는데 다른 닭들이 와서 상처 입은 곳을 다 쪼아서 결국은 창자가 나와서 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병든 닭은 옮겨 놓아야지 병든 닭은 건강한 닭하고 같이 해 놓으면 쪼아서 죽여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보면 닭 신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병든 성도가 있으면 가서 다 정죄하고 심판하고 쪼아서 죽여 버리지 그를 품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해서 살릴려고 하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제사장들 즉, 성직자들은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은 그들은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율법으로써 남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너무나 잘합니다. 그러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치료하는 일은 등한이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이 부랑당 만난 사람, 강도 만난 사람,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심판하고 교훈하고는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여기 보면 레위 사람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은 일반 성도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 레위인은 굉장히 개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의식만 행하면 되었지 동정이나 사랑 같은 것은 자기가 알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곁을 그는 보고 무관심하게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나는 성적에서 의식이나 집행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내가 동정이나 사랑이나 이런 것을 베풀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에 생활에 사람들은 점점 이기주의적이고 자기본의 주의적이고 개인주의가 극히 발달되었습니다. 하나 희한한 것은 미국에 9월 11일 테러 이후에 생긴 현상중에 하나인데 결혼 붐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불안한 생활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이 안식처는 오직 가족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가지는 화려한 독신 생활을 고집하는 젊은이들도 이제는 혼자 살 때 위기에 처하게 되니 아무도 위로 받을 자가 없고 위로해줄 자가 없어 삶이 극히 고달프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불안을 나누고 힘을 줄 수 있는 짝을 찾기에 나서서 오늘날 미국에는 결혼관련 업체가 굉장히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평범할 때는 개인주의로 혼자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위기를 처하게 되면은 반드시 위로하고 도와주고 힘이 되는 이웃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나는 십일조 헌금 잘드린다. 교회 행사에도 다 참석한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수많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활적, 강도 만난 사람은 내가 알 것이 머냐 그것은 목사나 알아서 하고 장로나 알아서 하고 권사나 집사들이 알아서 할 것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피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격에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한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작은 일부터 생각하고 처음부터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단위로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이웃은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니까 아휴 내가 뭐 재산을 다 팔아서 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그렇게 않으면 큰 물질을 드려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다 돌보고 홈리스를 돌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겁을 집어 먹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내 이웃이 지극히 적은 일부터 관심을 가지고 사랑과 동정과 도움과 치료를 베풀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것 보십시오. 성도님들 작은 정성들이 모여서 큰일을 하고 있는데 폐지수집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올 때 적은 폐지수집, 폐지 뭉치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폐지들이 모여 가지고서 오늘날 우리 교회 그 팔은 대금으로 심장병 어린이 3,059명을 살렸습니다. 지극히 적은 일이 모여서 그런 큰 이웃의 도움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농어촌 미자립 교회도 여러분이 매달마다 1,000원씩 여러분이 헌금한 이것이 매달 300명 이상의 목사님들에게 월급을 도와주고 농어촌에서 목회하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다 남은 폐의류나 은혜의 빵 이것이 합쳐서 오늘날까지 2억 7천만원이 생겨서 국내외 수많은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14년 동안 매년마다 우리 성도들이 헌혈을 했는데 무려 5만 6천명이 헌혈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미도 금년도 벌써 보면은 1,200가마가 지원 됐습니다. 조금씩 가져오는 성미가 합쳐져서 1,200가마가 되어서 이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갈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들은 레위인들처럼 평신도 이지만은 선한 이웃이되라는 것입니다. 선한 이웃이라면 모냐, 큰일을 해야 선한 이웃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일에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비평이나 정죄나 무관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6:36-38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보십시오. 지극히 적은 이웃 관계에서 비평하지 말고 칭찬해 주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해주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주고 이런 것이 내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큰일을 해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셋째로, 여기 생각해 볼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개로 취급하고 불결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상종도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충격적이고 극단적인 예를 들어 소히 믿는 자의 위선을 여지 없이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영적 우월주의도 갖추고 있지 아니하고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무관심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처 입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제사장 같지도 아니하고 개인주의적인 레위인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도와주고 함께 잘 살자는 심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삶의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도와주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 마음속에 꽉 들어 찼습니다. 별로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개처럼 취급 당하고 교육도 없고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람은 사람을 도와주고 살아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가정은 적은 단위의 공동체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
사랑으로써 뭉쳐진 공동체가 되어서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공동체요, 국가도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지구는 하나의 촌락입니다. 지구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약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다면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 의식으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부랑당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을 보고 말을 타고 와서 그곳에서 내려서 자기가 가진 것으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없는 것 가지고 도우라는 것 아닙니다. 거창스럽게 남에게 빌려와서 도우라는 것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것 포도주가 있었으니 포도주를 부어서 병균을 막고 기름으로 윤택하게 하고 그리고 붕대를 가지고서 감아주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이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을 것입니다. 율법주의 자인 성직자들처럼 비난하고 공격하고 비평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지나가 버리지 않았습니다. 레위인 같이 개인주의적으로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내가 뭐 상관할 것이 있느냐. 무관심하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는 포도주와 기름과 붕대를 가지고 처매주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시 112:9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인은 최선을 다하여 이 피투성이 된 부랑당 만나 사랑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막집에 데리고 와서 돌보아주고 은전 두잎을 주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갚아 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러분 하는 것이 이런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꾸준히 사랑 실천으로 부랑당 만난 사람을 도울려고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엘림복지타운을 세워서 요양원, 경로원, 청소년 직업전문학교를 통하여 사회에서 버림받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실업인회를 보십시오. 연합회와 각 선교회 차원에서 사회사업, 교통복지, 의료사업, 장학사업, 법률사업, 장애인후원, 농어촌 돕기, 소년소녀가장돕기. 사랑의 집짓기 등 여러 곳에서 손을 내밀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선한사람인 NGO는 대북 구호를 계속하고 국내, 해외 교육 사업 등에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교회 차원에서 수해 당한 자에게 지원을 하고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도 하고 이런 것이 바로 사랑 실천 운동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참 이웃으로서 해야 될만한 일인 것입니다. 다니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주면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만 은혜 받고 나만 축복 받고 나만 잘살면 되지 다른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 무엇이냐는 이 태도도 예수 믿는 사람의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수 셀리더 표창을 받은 김영춘 집사님의 간증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그는 가게 하니라고 빚이 1억 3천 만원 들어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살 충동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가게를 한다고 하나님을 등안히 한 죄를 생각하고 교회 와서 매일 철야기도 하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통회하고는 여태까지 내 중심으로 살았으나 이것이 잘못되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해야 되겠다. 그길로부터 시작해서 가게를 함과 동시에 시간을 내어서 열심히 이웃을 심방하고 돌보아 주고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베 풀고 혹은 장로님 혹은 교회 도움을 받아 쌀을 나누어 주고 위로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동안에 많은 이웃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일어나고 안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런 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가게도 점점 잘 되어서 빚도 거의 다 갚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병도 낫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 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는 주의 교훈을 체험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또한 선한 이웃이 되어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25:34-40에 보면은 예수님이 심판하실 때 어떻게 하실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녀들이여 나아와 창세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고" 이웃에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위로하고 치료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 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창스럽게 큰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적은 것을 가지고 이웃에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을 베푼 것 이것을 주님께서 절대로 심판 날에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이웃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때 비로소 내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오늘날 가장 함께 살기 힘든 사람들이 교인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교회의 직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눈에 쌍심질을 높이고 이웃을 정죄하고 심판하며 상처 입은 자들에게 가서는 소금을 뿌려 싹싹 문질러서 발로 확 비벼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나 교회 나와서 아직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하는 비평인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불신자들은 한참 싸웠다가도 함께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몇 잔 나누고 털털 털어버리고 너털 웃음을 웃으며 어깨동무하고 다 잊어 버리고 살아 나가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잊어 버리지도 아니하고 용서도 아니하고 속에 이렇게 꼬부랑하게 적개심을 품고 언제나 앙탈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잘 믿고 있는지 없는지를 깊이 살펴야 할 때가 온 것 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제사장인가 레위인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 남을 정죄하고 평론하고 비평하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서 소금 뿌리고 발로 밟아 주는 이런 제사장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으면 레위인처럼 무관심하다 개인주의적으로 나만 잘먹고 나만 잘입고 잘살면 되었지 이웃이야 죽든 살든 내가 관심할 건 무엇이냐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 버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칭찬한 것이 오히려 비천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닌 개처럼 취급 받는 비천한 사마리아인을 주님은 칭찬 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만이 선한 사마리아인이요, 참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 속에 살면서 수 많은 크고 작은 강도 만난 사람들이 마음에 피를 흘리고 생활에 피를 흘리고 곤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나요? 우리는 그들에게 쉽게 평론하고 심판하고 정죄했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고개를 돌리고 무관심하고 살았잖아요. 그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준 적이 있나요? 욥의 친구들 처럼 상처 투성이가 되어 피투성이 된 욥을 교훈하고 비평하고 정죄만 했지 욥에게 끌어안아주고 상처를 처매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지 않았잖아요? 내가 한말이 틀린 말이에요? 바른말 했는데.. 맞아요. 아무리 바른말도 그 때에 맞지 아니하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 왜 독이 됩니까? 처방을 잘못하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정죄와 심판과 무관심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참 이웃이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닙니까? 우리가 죄에 포로가 되고 세속과 마귀에 잡히고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생활에 저주받고 짓밟히고 지옥으로 내려갈 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짓밟았습니까? 우리를 무관심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당신의 살을 먹여 주시고 피를 흘려 주시면서 내 살을 받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용서를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위로를 받고 치료를 받으라 축복을 받고 영생 복락을 얻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과 살을 찢어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와서 우리를 와서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같이 우리에게 무관심하고 나만 하나님 잘 믿고 잘 살면 되었다고 하다가 천국에가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예수님의 존을 따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푸는 좋은 이웃이 되어서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린 예수 믿는 가운데서 점점 잘못 믿어서 제사장이 되어 율법의 안경을 끼고 머리에 상심질을 씌우고 이웃을 심판하고 비평하고 정죄하고짓밟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혹은 레위인 같이 내가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만 취하고 나만 잘 믿었으면 되었지 이웃 사람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던지 피를 흘리든지 무엇을 관심하리요. 하는 개인주의적인 무관심한 삶을 살은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개로 취급 받던 비천한 사마리아인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마음에 사랑과 자비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이웃을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큰 부자가 아니고 권력자가 아니고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것을 가지고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고 선한 사마리아인, 참된 이웃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심판의 날에 왕에게 적은 자에게 베푼 것이 내게 베풀은 것이라고 칭찬받고 상급 받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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