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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화작(化作)

누가복음 김명수 목사............... 조회 수 1686 추천 수 0 2008.09.08 00: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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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7:33-35 
설교자 : 김명수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6.4.9주일설교 
제목: 예수의 화작(化作)
본문: 누가복음 7:33-35
설교: 김명수 목사 경성대학교 신학과 교수 (새길교회 2006.4.9주일설교)

지금까지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신앙은 성서에 근거하여 얻은 결론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의 변증적인 목적에 의해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헬라 종교나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가? 타종교나 철학의 창시자들과 비교할 때 그들이 믿는 예수가 어떤 점에서 우월한가? 이러한 선교적 목적 때문에, 초대교회는 예수를 헬라세계의 종교적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된 구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초대교회의 교리화 과정에서 예수는 ‘참 신이요 동시에 참 인간’(Gott-Mensch)성을 지닌 분이라는 양성론(兩性論)이 주장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의 본질로 자리 잡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참신이요 참인간으로 믿고 있지만, 신앙의 무게 중심은 언제나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데 있었고, 그의 인성은 단지 그를 신화적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판 구실을 하는데 그쳤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예수 신앙은 복음서가 전하는 역사의 예수와 상당한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불트만이 지적한 대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지만, 이와 다르게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설교했던 것이다. 예수는 달을 가리키며 보라고 했는데, 교회는 예수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던 격이었다.  

초대교회의 예수 신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십자가 대속사건이 그 하나요, 메시아사상이 다른 하나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죄를 대신한 대속사건인데, 그 배후에는 죄를 지으면 어떤 형식으로든지 반드시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약성서의 응보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 사건을 대속사건으로 이해하는 근저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분임을 발견된다. 이와 같이 십자가 사건을 속죄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은 예수사건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전체를 속죄사상의 시각에서만 이해한다면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복음서의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어느 분인가? 죄인을 벌주는 인과응보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 지은 죄를 벌주는 대신으로, 다른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는 분도 아니다. 블로흐(E.Bloch)가 말했듯이 심지어 자기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피에 굶주린 하나님도 아니다.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 어떠한 조건을 내걸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분이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의 하나님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신앙했다. 구약성서에서 메시아 신앙은 항상 유대민족주의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고대한 메시아는 외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권력과 힘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생전의 예수에게는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예수가 실은 연약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본문이 우리는 어떠한 예수 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가? 본문은 예수와 더불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논쟁하는 장면이다. 앞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자주 금식하고,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고 광야에서 금욕주의 생활을 하니 그들은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린 자”라고 했다. 귀신은 먹을 수 없고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한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요 성자 하나님으로 신앙 고백되는 예수의 실제적 삶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민중 그대로의 모습이다.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았고, 그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포식했던 대식가였고, 주량이 센 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게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였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예수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는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그것이다. 본문은 예수가 이와 같이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한다.

예수는 민중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다. 민중의 한 사람으로써 민중의 친구로 살았을 뿐이다.  예수는 자기와 민중을 결코 분리시키지 않았다. 적어도 예수의 민중은, 예수에게서 민중을 보고, 민중인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으로 분리되지 않고, 언제나 둘이 아닌(不二) 관계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예수 속에 민중이 들어있고, 민중 속에 예수가 들어있다. 예수는 민중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민중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리새파가 붙여준 별명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간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6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인 원효대사가 있다. 원효는 삼국시대 말기 경주에서 육두품 출신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씨(卨氏)이다. 어릴 때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장성하여 화랑이 된다. 그는 삼국 전쟁에 참여할 때마다 승리하여 젊은 나이에 장수가 되고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의 나이 29살 때 전쟁터에서 절친한 친구 화랑이 적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게 된다. 친구의 무덤가에서 그는 슬피 울며 원수 갚을 것을 다짐한다. 그때 문득 그는 원수들을 생각해보았다. 지금쯤 그들은 전승을 위한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원효는 자기가 전쟁에 승리했을 때를 떠 올렸다. 그 때 적은 지금의 자기처럼, 전우들의 무덤가에서 슬피 울며 보복을 다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일을 두고 한쪽에서는 승리의 기쁨에 젖어있고, 상대 쪽에서는 패배의 슬픔에 빠져있다. 내가 전쟁에서 이길 때는 패배한 적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막상 전쟁에 패배하여 절친한 친구를 잃고 보니, 내가 그동안 승리하고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 다름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패배에 기초하고 있고, 그들의 원한을 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전쟁 놀음의 허망함을 깨닫게 된 원효는 그 자리에서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자기 집을 절로 개조하여 초계사라 이름을 붙이고 밤낮으로 불교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독학의 한계를 느끼게 되자,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원효는 친구와 함께 육로를 통하여 당나라에 가려다가 그만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나, 우여곡절 끝에 몰래 도망쳐 나와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효는 바닷길로 유학을 가려고 한다. 그는 자기보다 8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두워 어떤 동굴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당시 신라는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드는 수혈식(竪穴式) 무덤이 유행이었는데, 백제나 고구려는 땅 위에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달고 그 안에 시체를 안치하는 횡렬식(橫列式) 무덤이 유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무덤은 신라무덤보다 도굴하기가 훨씬 쉬웠다. 횡렬식 무덤은 오래 되면 비를 피하기가 안성맞춤이었다.

원효는 밤에 목이 말라 더듬거리며 손에 잡히는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셨다. 시원함이 감로수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가 밤에 마신 그 물은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구역질이 났다. 그 순간 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물이나 해골바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니 만 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만 가지 법이 사라진다. 화엄경의 핵심 가르침인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된 것이다. 진리는 당나라나 불교서적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친 원효는 유학길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당시 함께 했던 의상은 유학을 가서 지엄화상 밑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지금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열었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면서 대승기신론소를 비롯하여 200여종에 이르는 불교경전들의 해설서를 저술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은 신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당시 신라에는 다양한 불교 종파들이 자기 종파가 옳다고 서로 쟁론을 일삼고 있었는데, 원효는 서로 다른 종파들의 가르침을 요약해보니 그 가르침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0개 종파의 다툼을 화합시킨다는 의미에서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을 주창했던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한 줄 깨닫게 되면, 화쟁은 저절로 된다는 것이 그 핵심내용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중국에서 용수의 중론(中論)보다도 더 뛰어난 대승사상으로 인정받았다.

하루는 원효가 외출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에 대안대사를 만났다. 신라에는 자장율사처럼 불교를 국가정책화하거나 의상대사처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승들도 많았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천민 출신 고승들도 있었다. 대안대사는 그 중의 한 분인데, 그는 절에 살지 않고 남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어미 잃고 울고 있는 너구리 새끼를 데려다 놓고, 동네 다니며 사람 젖을 빌어서 먹여 키우는 스님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대안”(大安)이라고 인사했다. “큰 평화가 있을 지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안이다.

대안대사는 원효에게 “내가 당신 책을 잘 읽었습니다. 내가 물어볼게 있으니 시간을 내주십시오.” 그는 원효를 분황사 뒷산에 천민들이 사는 동네인 동천으로 데리고 갔다. 어느 주막집에 들어가 주모를 부르며 술 한상을 부탁했다. 그러나 원효는 그것은 승려의 본분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대안대사가 불러도 원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돌아가는 그를 보며 대안이 소리쳤다. “원효대사,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지금 여기에 두고, 자네는 어디에 가서 별도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인가!”

천민촌의 고통받는 중생을 여기에 두고, 그들을 더럽다고 피하면서 중생구제라는 것은 얼토당토않다는 소리다. 그 대안대사의 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귀하고 천한 것이 둘이 아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색과 공이 둘이 아니다. 이러한 불이법문을 머리로는 인식을 했지만, 막상 그 경계에 부딪히게 되자, 분별심이 작동하여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고 생각했고,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는 더러움을 멀리하고 깨끗한 것을 취했던 것이다.

승과 속, 부처와 중생,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둘이 아님을 몸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원효는 자기 신분을 숨기고 변복을 하고 감천사로 간다. 그곳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부목살이를 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신분이 탄로나자 야밤에 도주를 하게 된다.

원효는 천민촌으로 다시 갔다. 이제 중생을 구제하러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려고 갔다. 그러나 천민들은 그 유명한 원효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 유명한 원효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원효는 생각했다. “왜 그럴까?” 소위 그 유명한 원효가 문제였다. 그는 그 유명한 원효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민들의 친구로 살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원효라는 껍질을 깨는 길밖에 없었다.

요석공주와의 스캔들은 그 유명한 원효의 명성을 여지없이 추락시켰다. 이제 원효는 미친놈, 파계한 놈으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어느 누구도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오갈 데 없는 원효, 파계하여 죄지은 놈, 천민들이 보기엔 이제 원효는 그들과 우리와 형편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움막을 하나 마련해 주어 그 동네에 살도록 하였다. 그제서야 원효는 천민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원효의 친구 중에 뱀을 잡는 땅꾼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동이었다. 어느날 사동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동은 원효에게 어머니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 데 도와달라고 했다. 그들은 시신을 가마니 떼기로 둘둘 말아 둘이 어깨에 짊어지고 동네 밖으로 나갔다. 시신을 묻기 전에 사동이 원효에게 말했다. "야,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염불이나 해 달라!“ 원효는 간단하게 염불을 했다.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은 괴로움이요,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동이 말했다. “야, 먹물 친구야, 왜 이리 말이 많으냐, 좀 짧게 해라.” “그래, 알았다. 새로 할께.” “생사고!” 그제서야 사동은 “됐다”고 했다.

여기에는 가르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깨우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없는 세계에서 중생은 스스로 깨우쳐나간다. 그 이후에는 원효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누가 원효이고 누가 천민인지 알 수 없었다. 원효라는 자아가 없어져버렸고, 천민이 되어 천민의 하나로 살았다.  농사일을 하면 농사꾼이 되어버리고, 백정 일을 하면 백정이 되어버린다. 장사 일을 하면 장사꾼이 되어버리고, 민중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면, 아예 민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불교용어로 화작(化作)이라 한다.

천민촌에 들어간 이후 원효의 행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신라의 방방곡곡에 원효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원효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민중 속에서 수많은 원효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이 말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세계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셨던 예수,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살았던 예수, 이러한 예수의 삶 속에서 우리는 민중의 구원자로 군림하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과 동고동락하는 예수를 만난다. 민중과 하나 된 예수, 아예 민중이 되어버린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진흙탕 속에서 물들지 않는 한 송이 연꽃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진흙으로 살았던 것이다. 인간이 되어버린 하나님, 민중이 되어버린 예수, 실은 연약하여 수난과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이러한 민중 예수에게서 우리는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들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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