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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임흥순............... 조회 수 1743 추천 수 0 2008.09.20 23: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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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25-37 
설교자 : 임흥순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6.9.10주일설교 
제목: 어떤 사마리아 사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설교: 임흥순 목사 (충주 선린교회 담임목사)
(새길교회 2006.9.10주일설교)

30년 전 생명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질병에서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만 된다는 단순한 생각을 소명으로 알고 직장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신학을 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고 동녘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아주 헐값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몇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죽어나간 흉가(?)였습니다. 흉가는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3년만 있으리라는 계획이었지만 16년을 살았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것 같이 보였지만 그 믿음은 아주 작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초라하게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예배 처소가 있는 곳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막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동네 이름 그대로 마지막 동네입니다. 그곳에 평안도에서 피난 오셔서 홀로 사시는 길상원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교회에 오셨고 글도 모르시는 분이 두툼한 성경을 들고 예배에 오셔서 찬송을 부르면 좌우로 흔들며 흥을 돋우셨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그 먼 길을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염소 적 붙이려고 그러는데 와서 기도해 주소!”
“예?”
염소 짝짓기 하는데 목사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먼 길을 오신 할머니와 함께 가서 염소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할머니는 ‘기왕에 기도하려면 새끼 많이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몇 마리요?”
“아, 네 마리.”
“예?”
점점 곤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믿음 없는 나는 ‘주님, 염소 새끼 네 마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해산달에 어미 염소는 보란 듯이 네 마리를 새끼를 낳았습니다. 두 번째도 그렇게 기도하면서 염소는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세 번째는 할머니께서 기운이 달려 기를 수 없으니 반으로 줄여달라는 부탁으로 두 마리의 새끼가 기도 응답(?) 속에 태어났습니다. 열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를 잘 키워 십일조로 드리는 믿음의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길 할머니는 정말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사셨고 세상을 떠나시면서 임 목사가 장례 치러주고 임 목사 가까운 곳에 묘를 만들라는 유언(?)으로 후덕한 동녘마을 막골에 장례를 했습니다. 고스란히 벌초와 성묘는 나의 몫이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길 할머니를 만나러 가야 됩니다. 이 염소 사건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 작은 믿음의 목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율법 선생과 예수와의 대화 중 영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영생’하면 너무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 머리를 스칩니다. “불신지옥, 예수천당!” 그러나 요한복음 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길상원 할머니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영생이고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 선생과 같이 무엇인가를 하여야만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자인 것처럼 자신을 의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착각을 갖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당당하게 묻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 잣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경계선을 긋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가 보여져야만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이 생각합니다. 많아져야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기와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풍성하면 축복이고 적으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실상입니다. 결과에 따라 최고가 되기도 합니다. 넉넉하게 하신 은혜를 알지 못하고 무례하고 무지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대하게 커진 교회들과 공룡처럼 거식증이 걸린 교회는 큰소리를 치며 최고가 되는 교회를 추구합니다. 죄송하지만 이것은 양아치 집단만큼도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안하무인입니다. 제가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지금까지 십 수 년에 걸쳐서 되풀이 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점점 고령화되고 황폐화되는 농촌에 젊은이들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가지고 도시교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도농교회들과 교우들의 관계를 회복하며 먹을거리를 건강하게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촌놈으로부터 출발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거들먹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졸부와 같이 오만하게 굽니다. 저농약 고추를 팔기도 하고, 유기농 검은쌀 등을 공급해 주면서 느끼는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경제논리로 맞서는 저들의 신앙 앞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탕발림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제 때에 값이라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십 년이 넘게 기다렸는데 주님께서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시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주님 앞에서 곱빼기로 받게 하실 주님의 계획인가 봅니다.

오늘 교회들은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헌금도 잘합니다. 기도도 무지무지 잘 합니다. 우리 조국 교회들은 예배당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짓기로 소문났습니다. 방송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우리 같은 촌놈 목사는 목사도 아닙니다. 서울에서 경험한 수 년 동안의 일들로 이제 익숙해졌지만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고추 서너 근도 이리 놓아라 저리 놓아라 할 때도 제 무식한 방법으로 뺨때기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본인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는 그렇게 못하지요. 촌놈이니까 사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배짱입니다. ‘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만 하지 삯군과 같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핀잔합니다. 촌부들을 어떻겠습니까? 등 굽은 할머니들이 돈 몇 푼 받고 돌아올 목사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며 입술을 지그시 물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값이라도 바로 주면 좋겠는데, 값을 받지 못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고 돈을 빌려 갖다 드리면 우리 촌사람들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교회는 힘을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대하여 각성해야 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민하여야 합니다. 책임성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상실한 그저 그런 교회, 목사! 교인의 책임입니다. 교인이 우매해서 그렇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목사, 본질을 상실한 교회는 나가지 말아야 되는데 꾸역꾸역 나가니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고 기고만장한 것입니다. 성장과 부흥에 목적을 두다 보니 예수님은 저만큼 내동댕이쳐져 있습니다. 교회성장학과 같은 성공주의가 판을 치다보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상실했습니다.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자기의 목적만 성취되면 되기에 더불어 사는 방법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세칭 축복받은 목사와 성도면 다입니다. 그런 교회는 구름이 몰려들듯이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렇게 복 받는다고 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보라고 합니다. 그래야 성장하고 부흥한다고 합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 새길을 묵묵하게 십자가를 지고 새 삶을 열어가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하여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여리고(=종려나무의 마을)까지는 약 30k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황야, 언덕과 비탈 등의 조건으로 강도가 많기로 악명 높은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여호수아 18:17에서는 여리고 길을 ‘피의 오르막’이라는 뜻으로 ‘아둠빔의 오르막’이라 일컬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강도들은 한 여행객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채로 버리고 갔습니다(30절). 죽음의 위기를 당한 사람 곁으로 두 명의 인물이 접근합니다. 성경은 ‘제사장이며 레위인’이라고 밝힙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그를 피하여 다른 쪽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그를 피하여 지나친 경위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악한이었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를 도울까, 아니면 못 본 척 지나갈까?’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실존의 문제라고 봅니다. 지나치자니 양심은 방망이질을 하고 돕자니 내가 거룩한 성직자인데… 부정한 자가 될 것 같습니다. 생명가치를 추구하려면 당분간 성직자이기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신분상 가장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며 피범벅 된 자들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는 것은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알량한 선행으로 자신의 지위를 잃기에는 너무나 지혜롭고 똑똑했습니다. ‘내 본래의 임무에 충실하자. 내 몸을 성결하게 해야 되지!’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나라도 정결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이랬을지도 모릅니다.

영생은 사람들로 잘 짜여진 체계나 이념이나 교리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그러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생명폐기를 방조하는 것은 결단코 영생의 삶이 아닙니다. 힘이 정의가 되어 강도들이 세상을 제압하는 그런 나라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 나라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생명을 유일한 궁극적 가치로 삼는 나라입니다. 내 삶의 모든 목적은 예수를 닮은 인간 가치, 생명 가치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당한 자를 피하여 지나친 후에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이 사람도 이름이 없습니다.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꽤나 지명도 있는 신분의 사람인 반면에 이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큰 손실을 감수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보이며 그를 살려냅니다.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쳤고, 기다리던 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그를 구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 사람은 재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고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생명을 살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율법선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이웃으로 여기는 좁은 생각을 버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사람의 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사랑은 모든 상황을 포함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게 하고 일치하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사랑을 명하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이 길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 이 비유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종교적 우월성이나 경건의 겉껍질 속에 임한다는 믿음에 노골적으로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우월감과 제도를 초월하여 이루어집니다. 제도나 신분의 권위나 문화나 인간의 통상적인 생각을 깨는 것이 없이는 결코 그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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