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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15:28-3 |
|---|---|
| 설교자 : | 류상태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2006.10.29 주일설교 |
제목: 끝나지 않은 이야기
본문: 누가복음 15:28~32
설교: 류상태 (새길교회2006.10.29 주일설교)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28절부터 읽었지만) 11절부터 시작되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탕자의 비유’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표현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가려내자면,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보기보다는, 두 아들을 무한히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둘째 아들’, 혹은 ‘그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두 아들’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확히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탕자의 비유’로 이해하면,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큰아들은 조연의 역할로 그치게 되며,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이해하고 읽으면 큰아들 문제도 중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작은 아들보다 오히려 큰 아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 안에서 작은 아들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이 큰 아들의 문제가 부각되어 있고 이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몸과 마음이 다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뿐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가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큰 아들의 가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몸의 가출이 아니라 마음의 가출이기에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곪아가는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려서 작은 아들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큰 아들이 돌아오기를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의 가출
그러면, 왜 큰아들은 동생의 돌아옴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지 못했을까요? 큰아들이 볼 때, 아버지는 불공평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가출한 적도 없고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먹는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동생은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가출한 문제아(?)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별로 없는데 반해서, 재산을 다 팔아먹고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에게는 지난 잘못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환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큰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이런 태도는 매우 불공평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에 큰아들을 등장시키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진정으로 새겨듣기를 원하는 대상은 바로 큰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겉으로는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안에는 용서 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비뚤어진 당시 신앙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고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사는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죄인들은,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그들의 그런 신앙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 죄인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어울리고, 죄에 찌든 그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더 옳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독설을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예수를 그들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평생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실컷 죄 짓고 살다가 뒤늦게 회개한답시고 예수와 어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과 어울려 희희낙락하는 예수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악독한 자요 유대 공동체의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단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 이면에 담겨진 ‘속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 차이는 그토록 컸고 매우기 어려운 골이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의 외침
오늘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주님께서 그토록 경고하시던 바리새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따라야 할 교황은 황제와 다툴 정도로 세속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초호화 예배당을 짓기 위해 사제들을 길거리로 내보내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명설교가로 이름을 날린 테쎌 신부는 이런 설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마련된 이 헌금함에 어서 돈을 넣으십시오. 동전이 헌금함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그 순간, 여러분 부모의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휙 날아올라갈 것입니다.”
이런 때에 개혁자들은 세 가지 모토를 내세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총만)
SOLA FIDE (오직 믿음만)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충분한 것이지, 어려운 수련과정을 통과하고 허리가 휘도록 교회에 충성봉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규범은 오직 성서에 근거해야 하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교회의 전통이나 조직, 교리에 근거하여 신도들에게 무거운 의무를 지워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개혁자들의 외침은, 마치 2천 년 전, 유대 율법주의와 종교 권위주의로 사로잡혀 가엾고 힘없는 서민들을 옥죄던 당시 종교권력자들을 향한 예수의 경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권력과 싸우는 개혁자들에게 Protestant, 즉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붙여주었지요.
그렇습니다. 개신교는 그렇게 태동했습니다. 그들은 항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차별에 항거하고 종교권력에 항거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오직 성서에 기록된 생명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큰아들과 한국교회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 사나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절대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그 무자비하고 사나운 교리로 성서 가운데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에 사로잡힌 죽은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죽은 문자로 신도들을 교회의 종으로 만들고 하나님께 충성하라면서 실제는 하나님을 팔아 교회 조직을 늘리고 덩치를 늘리고 재정을 늘려 새로운 종교권력을 만들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도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교회와 교우님 섬기기를 주님 섬기듯 하는 진실된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는 진실로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고, 저의 이런 거친 말씀으로 마음의 상처를 드린데 대해 마음 깊이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친히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가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던가요? 탕진했던 돈을 되찾아 오라고 했던가요? 냄새나는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한 다음에 오라고 했던가요?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둘째 아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바로 그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비참한 거지 신세였고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후에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상황은 단지 아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산 것도, 그래서 괴롭고 외로웠던 것도 모두 아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독립하여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그것 또한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왔다”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집을 늘 동일선상에서 놓고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집에 돌아온 것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고 병입니다.
교리주의자들에게 본문에서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교회로 돌아와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교리주의자들은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의 결과로 50년 전까지도 가톨릭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는 가톨릭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신교회는 제외됩니다. 오직 가톨릭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뜻이지요.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은 불과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신교회들 중에 가톨릭은 음녀고 사탄이며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곳이 많더군요. 형제의 싸우는 모습을 보는 하나님 마음이 어떠실까요?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은총은 차별 없이 만민에게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배타야말로 큰아들의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들도 여전히 큰아들의 신앙, 큰아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너무 쉽게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와 같은 방식, 자기와 같은 신앙, 자기와 같은 종교가 아니면 다 잘못된 것이며, 지옥불에 떨어질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혹 문제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예외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특정 시스템 안에 들어와서 수련을 쌓아야만, 종교의식과 의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배우기 전에, 예수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아니 기독교가,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 한 구원받기 어려운 종교로,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넓게는 지구마을에 갈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 자체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은 기독교 뿐 아니라 역사상 지구마을에 꽃핀 수많은 아름다운 종교들, 아름다운 문화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충분히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지구촌 이웃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아무 전제도 없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으나 큰아들의 가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은 언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본문: 누가복음 15:28~32
설교: 류상태 (새길교회2006.10.29 주일설교)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28절부터 읽었지만) 11절부터 시작되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탕자의 비유’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표현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가려내자면,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보기보다는, 두 아들을 무한히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둘째 아들’, 혹은 ‘그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두 아들’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확히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탕자의 비유’로 이해하면,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큰아들은 조연의 역할로 그치게 되며,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이해하고 읽으면 큰아들 문제도 중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작은 아들보다 오히려 큰 아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 안에서 작은 아들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이 큰 아들의 문제가 부각되어 있고 이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몸과 마음이 다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뿐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가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큰 아들의 가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몸의 가출이 아니라 마음의 가출이기에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곪아가는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려서 작은 아들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큰 아들이 돌아오기를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의 가출
그러면, 왜 큰아들은 동생의 돌아옴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지 못했을까요? 큰아들이 볼 때, 아버지는 불공평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가출한 적도 없고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먹는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동생은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가출한 문제아(?)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별로 없는데 반해서, 재산을 다 팔아먹고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에게는 지난 잘못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환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큰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이런 태도는 매우 불공평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에 큰아들을 등장시키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진정으로 새겨듣기를 원하는 대상은 바로 큰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겉으로는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안에는 용서 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비뚤어진 당시 신앙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고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사는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죄인들은,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그들의 그런 신앙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 죄인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어울리고, 죄에 찌든 그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더 옳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독설을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예수를 그들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평생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실컷 죄 짓고 살다가 뒤늦게 회개한답시고 예수와 어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과 어울려 희희낙락하는 예수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악독한 자요 유대 공동체의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단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 이면에 담겨진 ‘속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 차이는 그토록 컸고 매우기 어려운 골이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의 외침
오늘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주님께서 그토록 경고하시던 바리새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따라야 할 교황은 황제와 다툴 정도로 세속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초호화 예배당을 짓기 위해 사제들을 길거리로 내보내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명설교가로 이름을 날린 테쎌 신부는 이런 설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마련된 이 헌금함에 어서 돈을 넣으십시오. 동전이 헌금함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그 순간, 여러분 부모의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휙 날아올라갈 것입니다.”
이런 때에 개혁자들은 세 가지 모토를 내세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총만)
SOLA FIDE (오직 믿음만)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충분한 것이지, 어려운 수련과정을 통과하고 허리가 휘도록 교회에 충성봉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규범은 오직 성서에 근거해야 하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교회의 전통이나 조직, 교리에 근거하여 신도들에게 무거운 의무를 지워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개혁자들의 외침은, 마치 2천 년 전, 유대 율법주의와 종교 권위주의로 사로잡혀 가엾고 힘없는 서민들을 옥죄던 당시 종교권력자들을 향한 예수의 경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권력과 싸우는 개혁자들에게 Protestant, 즉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붙여주었지요.
그렇습니다. 개신교는 그렇게 태동했습니다. 그들은 항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차별에 항거하고 종교권력에 항거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오직 성서에 기록된 생명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큰아들과 한국교회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 사나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절대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그 무자비하고 사나운 교리로 성서 가운데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에 사로잡힌 죽은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죽은 문자로 신도들을 교회의 종으로 만들고 하나님께 충성하라면서 실제는 하나님을 팔아 교회 조직을 늘리고 덩치를 늘리고 재정을 늘려 새로운 종교권력을 만들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도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교회와 교우님 섬기기를 주님 섬기듯 하는 진실된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는 진실로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고, 저의 이런 거친 말씀으로 마음의 상처를 드린데 대해 마음 깊이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친히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가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던가요? 탕진했던 돈을 되찾아 오라고 했던가요? 냄새나는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한 다음에 오라고 했던가요?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둘째 아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바로 그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비참한 거지 신세였고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후에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상황은 단지 아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산 것도, 그래서 괴롭고 외로웠던 것도 모두 아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독립하여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그것 또한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왔다”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집을 늘 동일선상에서 놓고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집에 돌아온 것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고 병입니다.
교리주의자들에게 본문에서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교회로 돌아와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교리주의자들은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의 결과로 50년 전까지도 가톨릭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는 가톨릭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신교회는 제외됩니다. 오직 가톨릭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뜻이지요.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은 불과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신교회들 중에 가톨릭은 음녀고 사탄이며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곳이 많더군요. 형제의 싸우는 모습을 보는 하나님 마음이 어떠실까요?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은총은 차별 없이 만민에게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배타야말로 큰아들의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들도 여전히 큰아들의 신앙, 큰아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너무 쉽게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와 같은 방식, 자기와 같은 신앙, 자기와 같은 종교가 아니면 다 잘못된 것이며, 지옥불에 떨어질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혹 문제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예외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특정 시스템 안에 들어와서 수련을 쌓아야만, 종교의식과 의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배우기 전에, 예수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아니 기독교가,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 한 구원받기 어려운 종교로,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넓게는 지구마을에 갈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 자체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은 기독교 뿐 아니라 역사상 지구마을에 꽃핀 수많은 아름다운 종교들, 아름다운 문화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충분히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지구촌 이웃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아무 전제도 없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으나 큰아들의 가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은 언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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