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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품꾼

누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560 추천 수 0 2009.02.12 22: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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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24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여의도순복음교회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인과 품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옛날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우화에 보면 한 나뭇꾼이 산에 나무를 갔는데 그곳에서 도인을 만났습니다. 그 도인이 나뭇꾼에게 주머니 하나를 주면서 “이 주머니 속에는 세가지 네 소원을 이루어줄 능력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이 주머니를 가지고 가서 세가지 소원을 구하라. 그러면 이루어 지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나뭇꾼이 이 주머니를 받아서 너무 좋아서 기뻐 뛰며 춤추며 집에 와서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이것 도인이 준 주머니인데 세가지 소원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준다고 한다.” 그런데 부부간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이 소원을 구하겠다. 저 소원을 구하겠다 해서 밀고 당기고 하루 종일 말다툼을 하고 아무 결정을 못내리는데 저녁이 되니까 배가 너무 출출하니까 그만 그 나뭇꾼이 그 봉지를 빼앗아 입에 대고 “술한상 차려서 예쁜 아가씨가 날 섬기게 해라.” 그러자 술한상이 차려져서 예쁜 아가씨가 와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부인이 보고있자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부인이 그것을 확 빼앗아서 그 소원 성취하는 봉지에 대고 “저 술잔 입에 딱 붙어 버려라.” 그러니까 딱 붙어서 안떨어지니까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다시 빌기를 “술잔 떨어져라.”하고 말았습니다. 술잔이 입에서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세 소원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욕심과 탐심은 굴러 들어오는 복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인생에 자기중심으로 살고 이기주의로 살고 욕심과 탐심에 이끌리면 복을 받을 수 없을뿐 아니라 들어오는 복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아버지와 둘째 아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 중에 둘째 아들이 이와같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푸른 숲이 우거졌습니다. 과수원도 잘되고 밭에 곡식들도 잘되었습니다. 많은 종들과 품꾼들을 거느리고 일을 하고 아들도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도 함께 종들과 품꾼들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들에 가서 일을 하면 저녁 늦게 별을 보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생활은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화목하고 좋았는데 애들이 자라자 둘째가 그만 둘째가 염증이 생겼습니다. “왜 우리 집에는 아버지만 주인이고, 아버지만 주권 행사를 하느냐! 왜 우리 아들들이나 머슴들이나 품꾼들은 아버지 명령에만 순종하고 따라가야만 하는가? 나는 아버지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이젠 염증이 났다. 그러므로 나도 나가서 주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아버지께 나와서 “아버지! 이제 네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나도 나가서 독립해서 살겠습니다.” 아버지가 “얘야~ 아직 너희는 나이도 안되고 스스로 주인될 능력도 없으니까 좀 더 기다려라.” “난 못기다리겠어. 아버지의 주인하는 주권 밑에서 나는 생활할 수 없으니 내 스스로 나가서 주인이 되겠습니다.” 하도 간청을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그 재산을 나누어서 둘째에게 주었습니다. 둘째는 그 재산을 순식간에 다 팔아서 정리해서 돈으로 만들어서 그날 그시로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그림자가 싫고 간섭이 싫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가 주인이 되었으니 주인 행세를 하고 싶습니다. 먼 나라에게 가서 아버지가 없이 이젠 주인이 되었습니다. “야~ 해방이다. 나도 이젠 주인이다. 나도 스스로 주권 행사를 하고 살겠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되고 주권 행사를 할 수는 있었으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부터 돈많으니까 친구들 거느리고 술집에 가서 여자들과 함께 주지육림에 빠져서 살고 허랑방탕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사흘이 아니고 날이 날마다 먹고 마시고 진탕 놀았으니 그 돈이 끝이 있을수가 있습니까? 돈은 다 고갈 되었는데 그 나라에 굉장히 큰 흉년이 다가왔습니다. 사람들 마다 먹을 양식이 결핍하고 직장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궁핍해 지고 이제 돈이 없으니까 옛날에 흥청망청 쓰던 친구들을 찾아가니 다 냉대 받았습니다. 그를 그렇게 서방님으로 모시던 아가씨들도 다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버림받은 사람. 너무나 적막하고 외로웠습니다. 입에 풀칠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겨우 직장을 하나 얻었는데 이것은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업입니다. 직업중에 가장 천하고 낮은 직업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지방에 내려가서 돼지를 치는데 먹을 양식이 부족한지라 돼지가 먹는 콩의 종류인 주암열매를 함께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려 가지고서 온 전신에 돼지 이빨자국입니다. 그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러다가 그 마음속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 우리 아버지 집에는 일꾼들과 품꾼들조차도 먹을것이 많다. 아버지가 저들을 위해서 있을곳과 입을것과 먹을 것을 충분히 준비해 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아버지만 따르고 순종하면 잘먹고 잘입고 잘산다. 그런데 나는 뭐냐? 나는 스스로 주인행세하고 나왔으나 오늘 있는 것 다 탕진 가산하고 이제는 헐벗고 굶주리고 돼지취급도 못받고 있구나. 정말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꼬? 이 자리에 있으면 굶어 죽을터이니 돌아가자. 이제는 그냥 돌아 가는데 아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하겠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이제는 주인행세 다 포기했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제 종보다도 더 못한 것이 품꾼입니다. 매일매일 고용당하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고용당하는 품꾼으로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가 시키는데로 하겠으니 나를 받아 주소서.” 그렇게 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겠다고 그 마음속에 결심을 한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예비한 에덴동산은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었습니다.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염려는 하나님이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섬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써 믿고 섬기고 따르면 주인되신 하나님이 다 돌보아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마귀의 꾀임을 받아 탐욕이 들어왔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탐욕이 들어오매 “내가 하나님께 순복할것이 무엇이냐? 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느냐? 하나님은 왜 우리 위에 주인이 되고 주권행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노릇 해야 되겠는가?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주인이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가운데 모든 죄는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도전하는 죄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천사도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고 주권에 도전하다가 루시퍼가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쫓겨나서 귀신들과 타락한 마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권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입었으나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주권에 도전할 때 하나님은 가차없이 형벌하여 에덴에서 내어 쫓아 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떠난 하나님 계시지 않은 먼 나라로 가서 먼 나라란 세상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그는 처음 하나님을 떠나 먼 나라로 와서 “이제 내가 주권자다. 이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누가 간섭하랴? 옛날에는 내 인생이 하나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내인생 내것이다. 내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데 누가 말할 것이냐?”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부요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으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떠나자 마자 마귀와 죄의 포로가 되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로 해방과 자유를 주시지 하나님을 떠났을때는 인간 스스로는 주인 노릇할 힘이 없습니다. 곧장 마귀와 세상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인 신분을 가졌으나 행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의를 행하려고 하나 힘이 없으니 죄의 종이 되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나 힘이 없으니 세속과 마귀의 포로가 되고 건강하게 살려고 해도 병을 이길수가 없으니 병들게 되고 부요롭게 살려고 하나 저주와 가난을 이길힘이 없으니 가난과 헐벗음과 굶주림 속에 떨어지게 되고 영원히 살고 싶어도 죽음에 억압 당하고 죽음을 못이기니까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주인행세를 할려고 했으나 실력이 없으므로 이제는 죄와 마귀와 세상과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죽음의 종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했습니다. 죄의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다고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는 기근이 다가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기근이 안다가올수 있습니까? 오늘날 온 인류가 당한 것은 기근입니다. 의의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깨끗함이 없습니다. 건강의 기근이 다가오고 기쁨의 기근이 다가오고 행복의 기근이 다가오고 거룩함의 기근이 다가오고 물질적 기근이 다가오고 평안의 기근이 다가오고 생명의 기근이 다가와서 오늘 세상 어느곳에 보아도 기근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풍요하고 부요하고 잘산다고 말해도 실제로 행복은 없습니다. 기쁨과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기근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오늘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소련의 유명한 문호였던 도스트 에프스키는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등질때 모든 것을 등진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버릴때 보통 하나님만 저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을 저버리는 그 순간 우리는 의도 깨끗함도 건강도 기쁨도 평안도 행복도 생명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등지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인생들은 이와같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모든 것에 버림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흑암 가운데서 방황하며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존재였습니다. 버림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기근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있을곳도 많다. 아버지는 예비하는 하나님. 종들과 품꾼을 위해서 풍족하게 예비하는 좋은 아버지였다. 훌륭한 주인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거역하고 스스로 주인행세 하려고 하다가 실력이 없어 주인도 못되고 죄와 가난과 절망에 종이 되어 있다. 어떻게 할것이냐?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2. 회개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래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회개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근본적인 삶의 방황전환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후회를 하고 있거나 자책을 하고 앉아 있거나 눈물을 흘리고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방향전환입니다. 완전한 방향전환. 이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인행세 했으나 이제는 주인행세를 포기하고 종보다 못한 품꾼으로 돌아가자. 생활태도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주인에서 종으로, 자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방향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일어나서 실천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될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에덴의 삶이야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이 형편에서 생각할 때 내가 죄짓고 세상에 짓밟히고 병들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처참한 사망의 세력에 묶여 있을때 우리가 무엇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셨을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세속과 마귀의 부패도 없었고 하나님은 병을 지은적도 없고 가난을 만든적도 없고 죽음을 지은적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예비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기가막힌 축복의 동산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낙원에 살도록 만들었지 엉망진창에 살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낙원에 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은 낙원이다. 그곳에 가면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이 우리 아버지 집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나는 여기서 죄짓고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었구나. 어떻게 할것이냐? 이 자리에 있을 것이냐?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스스로 예비해야 되겠는데 스스로 예비할 실력이 있으면 좋아요. 실력이 있어서 자기를 위해서 다 예비할수 있으면 좋은데 문제는 주인이 되었으나 스스로를 위해서 예배할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카드와 한가지입니다. 신용카드 기분내키는대로 사용해 놓고 난 다음 갚을 능력이 없어서 나중에 자살합니다.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신용사회에서 카드 사용하는것을 누가 제재하겠습니까. 10만원, 100만원, 1,000만원, 1억, 10억, 100억, 1,000억을 긁어도 갚을 능력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능력은 없으면서 자기 원하는데로 카드를 사용하고 명품을 구입하고 나중에는 빚쟁이가 되어서 빚에 쪼들리고 생활이 엉망이 되고 빚감당할 수 없으니 자살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삶이 그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행세를 하고 내인생 내가 사는데 누가 간섭하느냐 라고 큰 소리 하면서도 자기 인생 자기가 준비할 수 없으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근으로 꽉 들어찬 삶이요. 희망이 사라진 삶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입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있는데 그 천국을 받아 들이려면 회개를 해야 된다. 조건이 회개인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후회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도둑질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면서 “아이고~ 잡히지 말걸 그랬다.” 후회입니다. 회개의 일종이지만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안잡혔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잡혔기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지.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은 회개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자책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자기 가슴을 두드리고 “이 못난놈아~ 이 나쁜놈아~ 이 거지같은 놈아~ 이 바보같은 놈아~” 자꾸 자기를 자책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까? 그것도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의 일종이지만 그러나 자책하는 것은 우울증이나 병적자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행위를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모든 죄를 꼬치꼬치 다 고백을 하는 것은 회개의 일종은 됩니다만 회개는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고백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는‘방향전환’이라는 뜻입니다. 회개란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자책하는 것도 아니고 죄를 꼬치꼬치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그 근본적인 문제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후회해도 역시 그길로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지 않은 이상 아무리 자책을 하고도 가슴을 치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다 고백하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뒤로 돌아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경우를 보시면 예수님을 팔아 먹고 난 다음에 회개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후회하고 자책하고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돌이켜 예수께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죄를 범했지만은 그냥 후회하고 있었습니까? 자책하고 있었습니까? 고백하고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돌이켜 예수님께로 찾아 왔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L. 부르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기차를 잘못 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않고 “야~ 제대로 확인해 보고 탈걸. 잘못했네. 내가 왜 바보처럼 이 기차를 탔나. 이 바보천치야. 아~ 기차를 잘못 탔구나.”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자책하면 잘못된 행위를 한탄하기만 했습니다. 얼마후 도착한 곳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차를 갈아탔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메타노이아. 완전히 방향전환을 해야 됩니다. 이 탕자가 돼지 소굴에 앉아 가지고서 후회하고 자책하고 자기 잘못을 손가락 꼽아 고백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닙니다. 방향 전환입니다. 내가 주인노릇 하던 것 포기하고 이제는 품꾼으로 돌아가자. 내 중심의 생활 포기하고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자. 완전한 방향전환이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중심으로 인생을 살다가 그것을 포기하고 내 가슴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 중심으로 살고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예수님 뜻대로 살고 나를 섬기다가 예수님 섬기는 삶을 살아야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 왔다가면서도 그리스도교 문화속에 삽니다. 그저 예수 믿는 사람은 주일 교회 나간다고 하더라. 예수 믿는 사람은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한다고 하더라. 예수 믿는 사람은 십일조도 낸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 인생 내가 산다. 내 중심에 예수를 모시지 않고 그리스도교 문화속에 사는 문화적인 크리스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 아무리 교회 다녀도 인생방황 전환은 안했습니다. 옛날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가 성령의 비췸을 받아서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 인생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았구나. 주님이 내 주인이 아니구나. 내 인생 나를 섬기고 살았구나. 내가 주님을 섬기고 살지 않았구나. 내 인생 내 중심으로 살고 주님 중심으로 안살았구나.’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모셔 들이고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앉게 되면 그가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그래서 그는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절뚝거리며 쓰러지면서 어지러움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그는 변화된 삶을 방향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3. 돌아온 탕자

통회와 자복보다 중요한 것이 변화된 삶의 방향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의 말씀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앉아 있어서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없어요.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향전환인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는 멀리서 늘 아들 오기를 기다리고 밤마다 문열어 놓고 불켜놓고 기다리다가 멀리서 아들이 오는데 벌써 걸음걸이만 봐도 압니다. 뛰어 나갔습니다. 아들은 놀랬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날 잡아서 감옥에 가둘까? 매를 때릴것일까?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서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아버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말은 그렇게 했는데 아버지는 그말 들을 필요 없습니다. 방향전환해서 돌아오는 것이니 회개한 것입니다. 그 아들이 말만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아버지가 받아 들인 것 아닙니다. 그 아들이 지금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보다 백배나 낫습니다. 돌아온 그 자체가 진실한 회개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그리고 어리둥절한 아들을 보고서 종들에게 말합니다. “이 더러운 옷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날 때 벗어던져 버린 반지를 갖다 끼워라.”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가족은 반지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름, 어머니 이름, 형제간 이름을 다 새겨서 반지를 낍니다. 그것이 아들된 증거인 것입니다. 그가 나갈땐 벗어 던지고 나갔는데 아버지가 간직해 놓았다가 그 반지를 갖다 끼워라. 그리고 맨발벗고 발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신반을 갖다 신겨라. 그리고 내가 늘 이 아들이 돌아오면 축하하려고 잡아 놓은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그리고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은자가 되었으니 우리가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야 55장 7절에 말하기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십니까?
이사야 30장 26절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제가 신학교 졸업반에 있을때 아버님이 서울에 오셔서 처음으로 회개하시고 우리 채플에 참석해서 눈물을 흘리시고 기도하시고 성령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는 채플에서 나오는데 추운 겨울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 낭패와 실망에 처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아 말로 다할수 없는 고통에 처했는데 저의 손을 잡고 신학교 정문에서 하신 말씀이 “야~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운줄 몰랐다. 이사람아! 하늘에 저 눈송이들을 보아라.” 나는 보니까 구름낀 하늘에 눈덩이 내려오는데 예쁜 것 하나도 안보여요. “하늘이 저렇게 예쁘구나.” 정원에 있는 돌을 보더니 “야~ 돌 잘생겼다. 정말 기묘하고 아름답다. 저 나무가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고. 야~ 아름답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이 지은 세상.”감탄을 하십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아버님의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30장 2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늘 달빛인데 마음에 달라지니까 얼마나 아름다운지 달빛은 햇빛같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감격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화한게 아니라 내가 변화된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이런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우리는 행위가 다 더러워서 우리의 입은 의의 옷은 더러운 넝마와 같습니다. 냄새나는 넝마와 같은 옷을 입고 오는데 주님이 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제일 좋은 옷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빨래해서 곱게 씻어 만든 의의 옷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의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죄를 한번도 안지은 상태. 하나님 앞에 설때 부끄러움이 없이 설수 있는 상태. 마귀에게 참소를 당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신 여러분은 다 하나님이 그 의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은 다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된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신지 알아요? “반지를 갖다 끼워라.” 주님께 돌아오면 반지를 갖다 끼워라. 이제 세상에 있을때는 반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확증이 없어요. 그러나 이 반지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이름이 기록되고 여러분의 이름이 거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너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자녀다.” 이 반지가 바로 뭡니까?
고린도후서 1장 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이 바로 반지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의 반지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인을 쳤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아우요, 신부요, 성령님의 돌보는 양무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위대한 증거가 우리속에 인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신발을 갖다 신겨라.” 신발은. 신발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피투성이 아닙니까? 신발없이 살면 돌에 차여 발톱이 빠지고 돌자갈밭을 어떻게 걸어가겠습니까? 가시밭위를 어떻게 피투성이가 되어 걸어가겠습니까? “신발을 신겨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평안히 살수 있는 신발, 의의 신발, 거룩한 신발, 치료의 신발, 축복의 신발, 영생복락의 신발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복음의 평안을 예비한 신발을 우리가 믿음으로 신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해서 이 험한 세상을 우리는 멋있게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발없이 인생을 살지 말고 맨발로 인생을 뛰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예비해 주신 축복의 신발을 믿음으로 신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내가 예비해 놓은 송아지를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베푸는 잔치는 무엇입니까?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영원의 잔치를 베풀어라. 내 아들이 돌아 왔으니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라.”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생명의 잔치를 베풀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적으로 은혜가 넘치게 하라. 우리 예수께 돌아오고 우리 마음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받았으며 믿음, 소망, 사랑을 얻지 않았습니까? 성령 안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영적인 잔치를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다음에 범사에 잘되는 잔치를 베풀어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돌보시고 준비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잔치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제는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나가서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기고 평안의 잔치를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주님께 의지하여 춤을 추고 기쁨으로 사는 것이 우리 삶의 잔치입니다.
시편 128편 1절로 2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복되고 형통한 삶의 잔치를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고 않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겠다는 놀라운 언약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건강함의 잔치가 있지 않습니까? 치료와 부활이 얼마나 놀라운 잔치입니까?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생명의 길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생명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니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우리는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중축복의 잔치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잔치를 베풀어라.

<결론>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시는 주인이요, 절대주권자인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왕이 길을 가는데 영감님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당신 누구요?” “내가 왕이요.” “아~ 어느나라 왕입니까?” “내 나라 왕이요.” “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내 몸이 내 나라요. 그러므로 내 나라, 내 몸이 내것이니 나는 내 나라의 임금이요.”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도 다 임금이지요. 우리 나라의 우리 주인. 그러나 하나님 없이 내 나라에 주인이 된 그 순간부터 나는 마귀와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될 힘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린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주인이요, 절대 주권자요, 하나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주인행세를 하려는 곳에는 언제나 절망적인 기근과 고통이 따릅니다. 내 인생 내가 산다고 하는 것 좋은 것 같지만은 그곳에는 항상 기근과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는데 정말 천국을 누리고 천국안에 들어가 살려면 참된 돌이킴인 회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내가 주인 하던곳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나를 섬기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곳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살 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속에 천국잔치가 임하고 우리의 삶속에 천국잔치가 임하고 우리의 건강과 부활과 영생의 천국잔치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크리스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형식과 의식적인 크리스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실로 돌아온 탕자처럼 참된 방향전환을 한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임금으로 앉아 계시나요? 예수님께서만이 여러분의 절대주권자로 앉아 계시나요? 여러분은 그 밑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임금으로 섬기며 주님을 위해서 매일매일을 살아갑니까? 그러면 여러분 인생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오중복음, 삼중축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다 한때 탕자와 같이 스스로 주인 되려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또 혹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문화적 크리스챤으로써 왔다갔다 하지만은
스스로 자기 인생 자기가 살고 주인행세했습니다.
그 결과로 기근과 고통과 낭패와 실망속에 몸부림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여,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방향전환을 한것처럼 방향전환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인행세한 죄를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섬기고 살아온 죄를 회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육체를 따라 살아온 죄를 회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자기를 보좌에서 끌어 내리고 그 보좌에 예수님을 앉히고
자기를 주인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예수님으로 주인으로 모시게 도와 주시옵시고
주님을 섬기고 주를 따라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기쁘게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삶을 허락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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