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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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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장기천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오직 늙어갈 뿐이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사람이 몸담고 있는 사회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회도 붕괴되고 말 것이다. 오늘 말씀증거의 주제도 이 문제에 관계된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지벌이나 학벌에 있지 않았다. 오직 그 사람의 정직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였다. 그에게 주신 주 예수의 응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지역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정직성의 문제였다. "이 사람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요한 1:47)
나다나엘은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반사회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있는 최고 최선의 장점을 통찰하시고 칭찬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오신 예수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감지케 한다. 정직, 그것은 예수에게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이것은 예수에게만 값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 전 유대 나라의왕이었던 다윗에게서 도 우리는 듣고 배우고 있다. 여러 갈래와 종족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 통일된 나라로 건설했던 다윗은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스리는 데 무엇보다 골몰하였다. 그런 역경 속에서 그가 터득한 진리는, 인류사회의 기본은 "진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주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죄 없는 손,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 헛된 것에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신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움을 인정받을 것이다."(시 24:3-5)
하늘과 통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느님께서 의롭다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약속을 지키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요, 다윗의 경험이다. 1960년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책이 있었다. 존 로빈슨(John Robinson)의『하나님께 정직하게』였다. 이 사람은 성공회 주교로서의 경험을 근간으로 이 글을 남긴 것이다. "정직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성(聖)과 속(俗)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은 실제에 있어서는 일치해야 한다. 성은 속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게 되고, 속은 성을 통해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양심이 죽어버린 시대요, 웃음거리가 된 시대이다. 양심이 죽은 시대에는 도적이 판을 치게 된다. 진실이 빛을 잃은 세상에서는 잔꾀가 판을 친다. 그것은 자신을 붕괴의 나락으로 몰아가는 꼴이 된다. "거짓에 맹종하는 것은 비인간화요, 영혼 포기다."(1974.2.12, 솔제니친의 일기) 거짓을 일삼는다는 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거짓은 단순한 윤리규범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망종이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께 청탁하였다. 자기의 머슴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계급사회였으므로 머슴 하나쯤 죽는다 하여 로마의 장교에게 책임이 추궁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인도주의적인 정신이 그로 하여금 앉아서 머슴 죽는 모습을 지켜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로마의 고급 장교, 그러므로 피지배민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예수께, 이스라엘 사람 예수에게 긍휼의 은덕을 탄원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매우 감동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누가 7:9)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기수로 갇혀있던 간첩 이인모씨가 북한에 송환되었다. 그것 때문에 당시의 통일부 장관이 인책되기도 했다. 그가 북에 돌아가 작은 수상집을 발간했다. 그는 그 책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인간이 바라는 사회는 이데올로기보다 한층 고귀한 인도적인 사랑의 실천을 요청하는 것이라 했다. 그 구체적 사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오랜 세월 옥에 갇혀 있는데, 면회가 정해진 날이면 반드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서울 궁정감리교회 조영민 목사의 아내와 또 다른 여성 집사님이었다. 그들이야말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도적 사랑의 실천가들이 아닐까? 아무리 사상적 변화를 강권해도 불복하던 사람이었고, 미결수의 신분으로 북쪽으로 돌아갔었는데, 그의 마음 속 깊은데서 예수의 사랑으로 인도주의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글로 써서 공개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신론자의 입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증언한 것이며,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 힘인가를 증언한 것이라 여겨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요, 나누며 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함께 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켜 주고 자신의 소득을 넉넉하게 쓰며 즐기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의사의 도움으로 태어난다. 성장도 부모와 스승의 도움을 힘입어 교육받으면서 자라나는 것이다. 결혼, 심지어 죽음도 형제 자매들, 친구들의 보살핌이 없다면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람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없다. 사람은 가정이라는 사랑공동체 사회라는 연대 공동체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위하여"라는 말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음을 마음에 깊이 담고 살아가야 한다.
마포의 양화진에는 외인 묘지가 있다. 그곳에 특별한 묘비를 찾아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준엄한 경고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멋대로 살아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도 한다. 과연 이 땅에 이렇듯 존귀한 죽음도 있었는가를 되새겨 보게 된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로마서 14:8) 청나라와 일본이 한국 땅 평양을 무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후유증으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때 전염병 퇴치를 위해 투신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홀. 이 땅에 처음 여류 의학전문학교를 세운 그의 아내 로제타 홀, 그리고 그들 부부의 아들로 이 땅에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보급한 셔우드 홀의 무덤이요 비문이다. 지금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이 바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였으며 이 땅에 가장 무서운 결핵퇴치를 위한 기관이었던 해주결핵요양원도 바로 그들의 유산이었다.
사랑에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진실한 사람만이 큰 일을 일구어내며, 마침내 내 몸을 던져 자기희생을 감행케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사랑은 너무 크고 너무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은 살리는 것, 미움은 죽이는 것"이라고 갈파했으리라. *
예수의 관심은 지벌이나 학벌에 있지 않았다. 오직 그 사람의 정직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였다. 그에게 주신 주 예수의 응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지역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정직성의 문제였다. "이 사람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요한 1:47)
나다나엘은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반사회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있는 최고 최선의 장점을 통찰하시고 칭찬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오신 예수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감지케 한다. 정직, 그것은 예수에게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이것은 예수에게만 값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 전 유대 나라의왕이었던 다윗에게서 도 우리는 듣고 배우고 있다. 여러 갈래와 종족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 통일된 나라로 건설했던 다윗은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스리는 데 무엇보다 골몰하였다. 그런 역경 속에서 그가 터득한 진리는, 인류사회의 기본은 "진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주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죄 없는 손,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 헛된 것에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신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움을 인정받을 것이다."(시 24:3-5)
하늘과 통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느님께서 의롭다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약속을 지키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요, 다윗의 경험이다. 1960년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책이 있었다. 존 로빈슨(John Robinson)의『하나님께 정직하게』였다. 이 사람은 성공회 주교로서의 경험을 근간으로 이 글을 남긴 것이다. "정직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성(聖)과 속(俗)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은 실제에 있어서는 일치해야 한다. 성은 속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게 되고, 속은 성을 통해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양심이 죽어버린 시대요, 웃음거리가 된 시대이다. 양심이 죽은 시대에는 도적이 판을 치게 된다. 진실이 빛을 잃은 세상에서는 잔꾀가 판을 친다. 그것은 자신을 붕괴의 나락으로 몰아가는 꼴이 된다. "거짓에 맹종하는 것은 비인간화요, 영혼 포기다."(1974.2.12, 솔제니친의 일기) 거짓을 일삼는다는 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거짓은 단순한 윤리규범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망종이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께 청탁하였다. 자기의 머슴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계급사회였으므로 머슴 하나쯤 죽는다 하여 로마의 장교에게 책임이 추궁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인도주의적인 정신이 그로 하여금 앉아서 머슴 죽는 모습을 지켜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로마의 고급 장교, 그러므로 피지배민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예수께, 이스라엘 사람 예수에게 긍휼의 은덕을 탄원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매우 감동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누가 7:9)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기수로 갇혀있던 간첩 이인모씨가 북한에 송환되었다. 그것 때문에 당시의 통일부 장관이 인책되기도 했다. 그가 북에 돌아가 작은 수상집을 발간했다. 그는 그 책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인간이 바라는 사회는 이데올로기보다 한층 고귀한 인도적인 사랑의 실천을 요청하는 것이라 했다. 그 구체적 사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오랜 세월 옥에 갇혀 있는데, 면회가 정해진 날이면 반드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서울 궁정감리교회 조영민 목사의 아내와 또 다른 여성 집사님이었다. 그들이야말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도적 사랑의 실천가들이 아닐까? 아무리 사상적 변화를 강권해도 불복하던 사람이었고, 미결수의 신분으로 북쪽으로 돌아갔었는데, 그의 마음 속 깊은데서 예수의 사랑으로 인도주의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글로 써서 공개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신론자의 입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증언한 것이며,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 힘인가를 증언한 것이라 여겨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요, 나누며 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함께 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켜 주고 자신의 소득을 넉넉하게 쓰며 즐기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의사의 도움으로 태어난다. 성장도 부모와 스승의 도움을 힘입어 교육받으면서 자라나는 것이다. 결혼, 심지어 죽음도 형제 자매들, 친구들의 보살핌이 없다면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람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없다. 사람은 가정이라는 사랑공동체 사회라는 연대 공동체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위하여"라는 말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음을 마음에 깊이 담고 살아가야 한다.
마포의 양화진에는 외인 묘지가 있다. 그곳에 특별한 묘비를 찾아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준엄한 경고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멋대로 살아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도 한다. 과연 이 땅에 이렇듯 존귀한 죽음도 있었는가를 되새겨 보게 된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로마서 14:8) 청나라와 일본이 한국 땅 평양을 무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후유증으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때 전염병 퇴치를 위해 투신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홀. 이 땅에 처음 여류 의학전문학교를 세운 그의 아내 로제타 홀, 그리고 그들 부부의 아들로 이 땅에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보급한 셔우드 홀의 무덤이요 비문이다. 지금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이 바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였으며 이 땅에 가장 무서운 결핵퇴치를 위한 기관이었던 해주결핵요양원도 바로 그들의 유산이었다.
사랑에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진실한 사람만이 큰 일을 일구어내며, 마침내 내 몸을 던져 자기희생을 감행케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사랑은 너무 크고 너무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은 살리는 것, 미움은 죽이는 것"이라고 갈파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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