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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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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종선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넷째 이야기, "비움으로 얻는 평화"
한 달포 전쯤, 저희 집에서 텔레비전이 사라졌습니다. 10년 정도 시청한 텔레비전인데 갑자기 전원 공급 장치가 고장나서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더니 기술자가 와서 하는 말이 "수리비가 8만원 정도 나옵니다."라고 해서 핑계에 텔레비전을 없애버리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볼만한 프로그램(다큐멘터리나 토론)의 방영시간이 12시 이후이기 때문에 잠을 못 잘 때가 많고, 또 한 가지는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내 입에서 최악의 거친 말들이 여과 없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9시 뉴스 시작 멘트가 나오니까 저희 작은 녀석이 "이제부터 우리아빠 욕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해서 식구들은 웃고 말았지만 정작 저는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거친 말들을 뱉어냈는데 그것이 가족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뉴스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또 흥분하고 맙니다. 뉴스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곤 합니다. 하지만 한 달포 전부터 저희 집에는 정치인들에게 퍼붓던 폭언도 파렴치한 범죄인들에게 내뱉던 쌍말도 없어졌습니다.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엔 작고 예쁜 화분하나가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에서 "평화"라는 주제로 말씀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도무지 평화란 말이 이렇게 생소할 줄은 몰랐습니다. "평화조약", "평화통일", "평화로운 마음" 이런 단어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막상 제 개인적인 평화를 얘기하려하니까 도무지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58년을 살아오는 동안 제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간이 별로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평화를 누리지 못한 것은 외부의 조건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몰아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성경)과 유영모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마음속에 화낼 준비가 되어있고,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시기하고 질투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섬기지 못하고 낮아지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탐(貪), 진(瞋), 치(痴)를 버리지 못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내 마음에 평화를 기대하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저의 모든 것은 등수가 매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명중에서 몇 등, 군대가서 사격을 할 때도, 구보를 할 때도, 개인별, 분대별, 중대별로 몇 점 몇 등으로 등수화 합니다. 사회에 나오니까 고가점수, 영업점수, 계보점수에 아부점수까지 종합해서 몇 등까지는 진급, 몇 등부터는 탈락입니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사업을 시작했더니 연말에 동종업종 몇 위로 또 등수를 매기더군요.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지점장회의에 나가면 지난달 매출 얼마 몇 등으로 저를 등수로 판단합니다. 이러다 보니 친구도 동료도 이웃도 모두 경쟁 상대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악수합니다. 유영모 선생은 악수하는 모습을 모두 허위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나로 변화되어서 얼나의 교제를 해야만 진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 했습니다.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지구천체가 평화로웠던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평화를 이루기가 말같이 쉽진 않은가 봅니다. 민족과 민족 간에, 종교와 종교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20:26)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평화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피가 되고 내피가 내 이웃의 피가 되고 그래서 인류는 한 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 때만이 평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어느 한사람, 그 어떤 위대한 몇 사람의 힘으로는 평화를 만들지는 못 한다. 다만 인류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길 밖에 없다. 이처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이 시대의 성인들이 아니겠는가?
개인과 개인이, 민족과 민족이, 국가와 국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안에서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나면 그제야 평화가 올 수 있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내가 평화하지 못하면, 우리가 평화하지 못하고, 우리가 평화하지 못하면, 세계가 평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우리들 하나하나의 평화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세계평화의 기초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는 6 25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하루 세끼 밥 먹는 가정은 참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하루세끼 하얀 쌀밥에 고깃국만 먹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장애나, 병약해서 벌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에겐 미안하지만)많은 사람들이 너무 과다한 칼로리를 섭취하고 자가용만 타고 다녀서(운동부족)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심장병 같은 성인병에 걸렸거나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없음은 어떤 이유일까요?
중광 스님의 글에 보면 인간이 탐, 진, 치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중생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마음의 평화와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법정스님의 말씀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버리면 버릴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화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법정스님의 글 하나를 소개하며 끝마치려 합니다.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에서는 가끔 도둑을 맞는다. 어느 날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했다.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정랑에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 놓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뒤주에서 쌀을 한가마 잔뜩 퍼내긴 했지만 힘에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노스님은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었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법정,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중에서
한 달포 전쯤, 저희 집에서 텔레비전이 사라졌습니다. 10년 정도 시청한 텔레비전인데 갑자기 전원 공급 장치가 고장나서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더니 기술자가 와서 하는 말이 "수리비가 8만원 정도 나옵니다."라고 해서 핑계에 텔레비전을 없애버리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볼만한 프로그램(다큐멘터리나 토론)의 방영시간이 12시 이후이기 때문에 잠을 못 잘 때가 많고, 또 한 가지는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내 입에서 최악의 거친 말들이 여과 없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9시 뉴스 시작 멘트가 나오니까 저희 작은 녀석이 "이제부터 우리아빠 욕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해서 식구들은 웃고 말았지만 정작 저는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거친 말들을 뱉어냈는데 그것이 가족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뉴스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또 흥분하고 맙니다. 뉴스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곤 합니다. 하지만 한 달포 전부터 저희 집에는 정치인들에게 퍼붓던 폭언도 파렴치한 범죄인들에게 내뱉던 쌍말도 없어졌습니다.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엔 작고 예쁜 화분하나가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에서 "평화"라는 주제로 말씀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도무지 평화란 말이 이렇게 생소할 줄은 몰랐습니다. "평화조약", "평화통일", "평화로운 마음" 이런 단어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막상 제 개인적인 평화를 얘기하려하니까 도무지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58년을 살아오는 동안 제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간이 별로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평화를 누리지 못한 것은 외부의 조건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몰아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성경)과 유영모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마음속에 화낼 준비가 되어있고,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시기하고 질투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섬기지 못하고 낮아지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탐(貪), 진(瞋), 치(痴)를 버리지 못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내 마음에 평화를 기대하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저의 모든 것은 등수가 매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명중에서 몇 등, 군대가서 사격을 할 때도, 구보를 할 때도, 개인별, 분대별, 중대별로 몇 점 몇 등으로 등수화 합니다. 사회에 나오니까 고가점수, 영업점수, 계보점수에 아부점수까지 종합해서 몇 등까지는 진급, 몇 등부터는 탈락입니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사업을 시작했더니 연말에 동종업종 몇 위로 또 등수를 매기더군요.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지점장회의에 나가면 지난달 매출 얼마 몇 등으로 저를 등수로 판단합니다. 이러다 보니 친구도 동료도 이웃도 모두 경쟁 상대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악수합니다. 유영모 선생은 악수하는 모습을 모두 허위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나로 변화되어서 얼나의 교제를 해야만 진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 했습니다.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지구천체가 평화로웠던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평화를 이루기가 말같이 쉽진 않은가 봅니다. 민족과 민족 간에, 종교와 종교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20:26)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평화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피가 되고 내피가 내 이웃의 피가 되고 그래서 인류는 한 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 때만이 평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어느 한사람, 그 어떤 위대한 몇 사람의 힘으로는 평화를 만들지는 못 한다. 다만 인류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길 밖에 없다. 이처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이 시대의 성인들이 아니겠는가?
개인과 개인이, 민족과 민족이, 국가와 국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안에서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나면 그제야 평화가 올 수 있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내가 평화하지 못하면, 우리가 평화하지 못하고, 우리가 평화하지 못하면, 세계가 평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우리들 하나하나의 평화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세계평화의 기초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는 6 25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하루 세끼 밥 먹는 가정은 참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하루세끼 하얀 쌀밥에 고깃국만 먹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장애나, 병약해서 벌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에겐 미안하지만)많은 사람들이 너무 과다한 칼로리를 섭취하고 자가용만 타고 다녀서(운동부족)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심장병 같은 성인병에 걸렸거나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없음은 어떤 이유일까요?
중광 스님의 글에 보면 인간이 탐, 진, 치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중생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마음의 평화와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법정스님의 말씀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버리면 버릴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화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법정스님의 글 하나를 소개하며 끝마치려 합니다.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에서는 가끔 도둑을 맞는다. 어느 날 외딴 암자에 밤손님이 내방했다.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정랑에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 놓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뒤주에서 쌀을 한가마 잔뜩 퍼내긴 했지만 힘에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다. 겨우 일어난 도둑이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노스님은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다. 이튿날 아침,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었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법정,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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